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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와 불교-36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 중국서 활약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1/08/30 [09:10]
서방에서 온 현사(賢士)로 대접받고, 중국식 복장입고 호(號)는 서강(西江), 청태(淸泰)

서양문화와 불교-36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 중국서 활약

서방에서 온 현사(賢士)로 대접받고, 중국식 복장입고 호(號)는 서강(西江), 청태(淸泰)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1/08/30 [09:10]

서방에서 온 현사(賢士)로 대접받고, 중국식 복장입고 호()는 서강(西江), 청태(淸泰)

-<곤여만국전도><천주실의> 저술로 유명

 

나는 어릴 때 땅 끝 해남 대흥사에서 득도, 수계하였다. 주지 실에 근무하면서 유물장을 관리한 적이 있다. 유물장에는 많은 유물이 전시되었고, 그 가운데는 서산대사가 입었던 가사와 염주가 있었다. 또 하나 진기한 유물은 마테오 리치 신부가 서산대사에게 선물로 주었다는 은 십자가가 있었다. 이것은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마는 마테오 리치 신부가 서산대사에게 선물한 은 십자가가 분명히 유물장에 보관되어 있었다.

▲ 중국식 복장을 입고 중국 식 호를 사용한 마테오 리치 신부.   

 

마테오 리치 신부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대륙에 기독교 신앙을 정착시킨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이다. ()는 서강(西江), 청태(淸泰)였다. 중국인들도 그를 태서유사(泰西儒士)라고 존칭하여 불렀다. 그만큼 서양인으로서 중국 문화에 정통했으며 유사(儒士) 대접을 받았다.

 

마테오 리치 신부는 선교를 목적으로 1582년 포르투갈 정착지 마카오에 도착하여 중국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운 좋게 유럽인들로서는 처음으로 명말 신종황제(만력제)의 초청으로 자금성에 들어 갈 수 있었다.

▲ 마테오 리치 신부가 마카오에서 베이징으로 갔던 경로 지도.   

  

1601년 그는 중국 북경에 도착, 신종 황제를 만나 황제의 호의로 선무문(宣武門) 안에 천주당을 세워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을 정도로 대우를 받았다. 만력제는 천문학과 달력 등 과학지식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학구파 황제였다.

 

마테오 리치는 1552년 교황령 마체라타에서 츨생, 1571년 가톨릭교회에 입교하여 동양에서 선교할 뜻을 품었다. 로마 대학교에서 1575년부터 1577년까지 수사학 인문과정을 공부했으며, 1577년부터 1579년까지 같은 대학교에서 철학 과정을 마쳤다. 나머지 신학공부는 4년 간인도 고아에서 받았으며 사제서품은 1581년 받았다. 그는 사제 서품을 받기 전에 이미 해외 선교의 길에 나섰다. 1578년 포르투갈 리스본을 출항하여 해외 선교에 나섰으며, 인도의 고아와 코친에서 주로 머물렀다. 1582년 예수회로부터 중국에서 전교하라는 지시를 받고 마카오에 도착하여 중국어와 한문을 배웠는데, 그의 유창한 중국어 실력은 문서선교(문서로 '하느님 말씀'을 전달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되었다. 마테오 리치가 중국 선교사가 된 것은 아시아선교책임자 알레산드로 발리냐노의 중국전도책임자 임명에 의한 것이었다.

▲ 1498년 바스쿠 다 가마의 항해 이후의 포르투갈 인도 함대의 무역로(파란색)와 1568년에 형성된 스페인 보물 함대 및 마닐라 갈레온의 무역로(흰색).     

 

예수회 선교사들이 동양(인도. 중국)에서 선교를 할 수 있었던 배경은 서구 열강의 무역로 개척과 식민지 확보와 무관하지 않다. 해양 국가였던 포르투갈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다른 유럽 국가보다도 한 발 앞서서 바다로 나갔다. 북아프리카를 탐험했던 포르투갈은 초기의 성공에 고무됐고 수익이 큰 인도로 가는 해상 무역로를 독점하는 데 주목한 개척대가 1488년 희망봉에 도착했다. 9년 뒤인 1497년 마누엘 1세의 명령으로 항해자 바스쿠 다 가마의 배 네 척이 희망봉을 돌아 동아프리카 해안의 말린디를 너머 인도양을 건넌 뒤 인도 남쪽의 코지코드에 도달했다. 포르투갈 제국은 향신료 무역으로 성장한 가장 빠른 유럽 해상 제국이었다.

▲ 항해가 가능한 포르투갈의 캐러벨 발명은 유럽의 해양 탐사에 필수적이었다. 캐러벨은 아랍 제국의 다우를 응용하여 포르투갈 인들이 개발한 어선이었다. 캐러벨은 점점 대형화 되었지만, 새로 개발된 캐럭에게 주선박의 자리를 뺏기고 지중해 근해를 항해하는 선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유럽 국가들은 중국과의 향신료 무역에 주목했다. 이미 16세기 초반 포르투갈 인들은 믈라카 해협에 진출한 광둥 상인들을 따라 중국 남동 해안에 도착하여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를 구입하였다. 포르투갈 인들은 명 조정으로부터 마카오를 얻어 중국의 비단실과 일본의 은, 구리 등을 중계 무역하여 크게 이득을 보기도 하였다. 이런 가운데 점차 비단, 도자기, 차 등 중국 산물이 아시아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향신료의 비중은 축소되어갔다. 17세기 전반까지는 유럽인들이 원하는 중요한 상품으로 지위를 유지하던 향신료는 이미 17세기 말에는 무역액의 20%, 18세기에 이르면 5%도 채 되지 않을 정도였다.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은 중국 무역에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 가운데 최종적으로 아시아 무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중국에 접근한 것은 영국이었다. 특히 18세기에 들어가면 중국에서 수입하는 차는 영국인들의 대표적인 기호품이 되었다. 런던 노동자가 자기 수입의 5%를 차를 구입하는 데 사용할 정도였다. 게다가 산업 혁명이 진행되면서 영국의 중국 무역에는 '광대한 상품 시장의 개척'이라는 또 하나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조금은 환상이 가미된 것이었지만 "4억 중국인의 셔츠가 1인치씩만 늘어도 영국 공장이 30년 가동된다."라는 말은 중국 시장을 개방하려는 영국인들의 집요한 노력을 암시해 주는 근거이기도 했다.

▲ 대항해시대의 무역로 지도.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진입한 과정은 참으로 극적이다. 1553(명나라 가정 31), 포르투갈은 마카오 관리에게 화물이 젖어서 육지에서 말리고 싶다는 구실로 뇌물을 주고 마카오 체류를 인정받았고, 4년 뒤부터는 뇌물을 매년 건네면서 본격적으로 마카오에 눌러앉게 되었다. 1572년부터는 명나라 조정도 매년 500냥의 지대(地代)를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포르투갈인의 마카오 거주권을 인정하였다. 처음 정착할 당시 포르투갈 인이 도교 사원인 마쭈거(媽祖閣) 근처에 살았는데, 현지인에게 그곳의 지명을 물으니 현지인은 사원의 이름을 묻는 것으로 착각하여 "마쭈거"라고 알려주었는데, 이를 잘못 알아들어 마카오라고 부른 것이 현재 이름이 되었다. 그 후 마카오는 금, , 도자기, 아편 등의 중개 무역과 기독교 포교의 기지로서 번영했다. 포르투갈과 청나라가 체결한 1887년 리스본 의정서, 1888년 청-포르투갈 통상 우호 조약에 따라 마카오는 정식으로 포르투갈령이 되었다.

▲ 캐럭선(船)은 주 돛대가 3개가량 있고 삼각형 모양의 돛을 단 대항해시대의 범선.    

 

마테오 리치 신부는 중국어에 능통했으며 실제로 중국문화에 심취한 선교사였다. 무조건 기독교를 광적으로 전도만 하려는 선교사들과는 달랐다. 그는 예수회의 전통선교방법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의 전도'라고 하여 상위계급이나 지식인들에게 먼저 전도하여 복음이 확대되게 하려는 전도방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회의 이러한 전도방식은 '아래로부터 위로의 전도방법'을 갖고 있던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명나라 황제 만력제는 외국 사람들에게 무관심했기 때문에 마테오 리치 신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100% 진행되지 못했지만, 명나라의 쇠락을 걱정하는 개혁파 사대부들과의 교제 하였고, 서광계(15621633), 이지조(15651630), 양정균(15621627) 등 일부 사대부 지식인들을 천주교인이 되게 하였다.

 

그는 천주교 서적을 저작하는 한편, 서광계·이지조의 협력을 얻어 과학 기술 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중국 최초의 세계 지도로서 유명한 '곤여만국전도'를 제작하였다.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1602년에 마테오 리치 신부와 명나라 학자 이지조(李之澡)가 함께 만들어 목판으로 찍어 펴낸 지도이다.

▲ 마테오 리치 신부와 명나라 후기 정치가이자 학자인 서광계. 

  

마테오 리치 신부는 교우론(交友論,1595년경:마테오 리치의 첫 한문저서),서양기법(西洋記法,1596:아리스토텔레스와 중세 고전암기술을 소개한 책),이십오언(二十五言,1599:고대 그리스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투스(Epictetus)의 잠언집을 중국인들에게 맞게 고쳐 쓴 편역서), 기하원본(機何原本,유클리드 저)6:한림원 서광계와 함께 번역), 기인십편(畸人十篇):중국 사대부, 선비들과 나눈 토론을 언급하며 기독교 신앙을 소개한 기독교변증서), 성서말씀(마태복음서 7:14,로마서 8:18)을 한자로 풀어서 소개), 기법(記法:기억술을 소개하는 책) 등이다. 그는 일생을 중국에서 활약하였다. 한국 실학파 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예수회 동양선교는 단순히 기독교의 전파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다. 서양사상과 문물을 전파하고 서구의 최신 과학지식을 전달하였다. 또 가장 중요한 것은 불교를 이해하여 서양에 소개하였다는 사실이다.

보검스님<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필자 보검스님이 철없이 탑 위에 올라가서 다른 두 스님과 기념촬영했는데, 지금 같으면 어림도없는 일이다. 그 때의 지각없는 일을 참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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