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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와 불교-㊲ 포르투갈 해외 식민지 개척, 스리랑카에서 불교만나 승단 파괴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1/09/06 [08:27]
계피 무역에 집착, 전쟁 일으키면서 기독교 전파,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이 지배

서양문화와 불교-㊲ 포르투갈 해외 식민지 개척, 스리랑카에서 불교만나 승단 파괴

계피 무역에 집착, 전쟁 일으키면서 기독교 전파,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이 지배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1/09/06 [08:27]

계피 무역에 집착, 전쟁 일으키면서 기독교 전파,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이 지배

 

포르투갈 제국은 매우 이른 시기(15세기 초)에 해외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그래서 포르투갈 식민지 제국(Império Colonial Português)으로도 알려져 있다. 포르투갈 본토는 스페인과 함께 붙어 있는 작은 나라이지만, 해외에는 본토의 수십 배가 되는 식민지를 갖게 되었다. 남아메리카의 브라질, 아프리카 양안과 인도. 스리랑카에 식민지를 구축했다. 포르투갈은 1415년 북아프리카의 세우타(Ceuta) 정복부터 1999년 포르투갈의 마카오가 중국에 반환될 때까지 거의 6세기 동안 지속된 유럽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해외식민 제국 중 하나였다. 제국은 15세기 초에 식민개척에 나서서 16세기 초에는 북미와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의 다양한 지역에 기지를 두고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

▲ 15세기 초부터 한 때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지역 지도(빨간 색 부분).     

  

불교적 관점에서 포르투갈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지역이 바로 인도와 스리랑카이다. 인도양을 처음 개척한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 1460~1524)는 포르투갈 출신 탐험가로서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1488년 희망봉을 발견한 이후, 포르투갈의 숙원이던 인도 항로를 개척하였다. 

▲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가1498년 5월 인도에 도착하여 깃발을 들고 있다.  


바스쿠 다 가마는 유럽인으로는 최초로 대서양과 아프리카 남해안을 거쳐 인도까지 항해한 인물이 되었다. 14977월에 리스본을 출발, 귀국할 때까지 총 2년이 걸렸고 약 42,000km를 항해하였다. 출발할 때 함선 4척이었지만 2척만 돌아왔으며, 170명중 55명만이 생존하여 귀환했다. 신항로 개척으로 인해, 포르투갈은 동방무역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유럽과 인도 간 해상을 통한 직접 교역을 시작할 수 있었다. 3차례에 걸쳐 인도로 항해했으며 1524년 인도 부왕(Viceroy)으로 부임, 활동하다가 인도 코친에서 사망하였다.

 

바스코 다 가마 탐험 원정대가 리스본을 떠난 지 약 10개월 후에 인도 무역항 캘리컷에 도착했으나, 그곳 상권을 주도하고 있던 이슬람 상인들의 방해로 통상조약을 체결하지는 못했다. 그는 힌두 통치자 자모린을 만나서 무역을 청했다. 이슬람 상인들의 적대감으로 향신료 등을 구입한 후에는 귀국길에 올랐다. 포르투갈은 인도양을 개척함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스리랑카(실론 섬)를 주목하게 됐다. 포르투갈은 1505년에서 1658년까지 스리랑카에서 식민지 정착에 지속적인 작전을 폈다. 

▲ 인도 서남해안을 통치하던 힌두 통치자 자모린을 알현하는 바스쿠 다가마.  

   

포르투갈이 불교와의 접촉을 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려다보니, 이야기가 길어졌다. 포르투갈의 인도양 식민지 개척에는 자연스럽게 기독교도 함께 들어올 수밖에 없었는데, 16세기와 17세기에 불교도와 서양인 사이에 대규모 직접 접촉이 있게 된다. 17세기 후반에 이르게 되면 유럽인 상인과 학자들은 이름은 다르지만 아시아 전역에 부처의 형상을 숭배하는 많은 불교도들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 아소카 대왕의 딸이기도 한 상가미타 비구니가 보리수를 스리랑카로 가져 오는 그림.   

 

불교가 지역 이교의 한 형태가 아니라 오랜 역사를 지닌 아시아의 종교라는 인식을 하게 됐고, 가톨릭 선교사들은 불교를 아시아의 기독교 전파에 대한 심각한 경쟁자로 보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더 많은 연구를 하도록 이끌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불교가 신성한 계시에서 비롯된 종교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많은 유사점도 있었음을 파악했다. 그것은 수도회, 창시자의 동정녀 탄생, 천국과 지옥에 대한 믿음 등이 유사했다. 가톨릭 수도원이나 불교사원, 부처의 우협탄생(어머니 옆구리로 탄생), 극락과 지옥에 대한 설정 등이 공통점이 있었는데, 가톨릭 선교사들은 이 점에 착안, 불교를 설명하려고 했다. 이 때문에 많은 포르투갈 작가들은 불교를 악마에 의해 타락한 기독교의 한 형태로 설명했고 일부는 불교도가 "악마와 동맹을 맺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아시아의 가톨릭 선교사들은 특히 중생에 대한 불교적 관점, 불상 숭배, 카르마(), 윤회전생 등에 대하여 부정적 비판을 가했다.

 

스리랑카의 불교는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지만, 역사적 굴절 또한 심각했다. 인도불교의 원형을 그대로 이어 받았지만, 이런 전통을 미얀마와 태국에 그대로 이식해 주고 근대에 이들 나라로부터 다시 역수입하는 등, 승단의 우여곡절은 아슬아슬하였다. 스리랑카 불교에 얼룩을 낸 데에는 유럽열강도 크게 한 몫을 하게 된다. 조용한 불교국가인 실론에 닻을 처음 내린 나라는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이 파악한 바로는 실론 섬은 7개의 전국(戰國)으로 분할되어 대립하고 있었고, 외침을 막아낼 여력마저 없었다.

▲ 인도 아소카 대왕 때의 불교전파 지도.  

 

포르투갈 인들은 섬에 가톨릭교를 소개하려고 했고, 싱할라족과의 전쟁에서 그들은 종종 불교 수도원을 파괴하거나 가톨릭 교단에 넘겨주었다. 16세기부터 기독교 선교사들은 지역 주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고 시도했다. 비기독교 종교인 불교와 힌두교 이슬람교는 억압과 박해를 받았고 기독교인은 특혜를 받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섬에서 기독교 소수 민족이 형성됐다. 포르투갈은 전쟁을 일으켰고 이 전쟁으로 불교 승가는 결정적인 파괴를 당해서 계를 줄 비구마저 소멸해버리는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다. 승가가 너무 약화되어버린 것이다. 이에 1592년 캔디의 위말라 1세 왕은 버마에 도움을 요청하여 비구들이 스리랑카에 와서 계맥을 이어주도록 계단을 설치하여 승가를 복원 시켰다. 

▲ 부처님 치아사리를 모신 캔디 불치사 전경. 

 

포르투갈은 스리랑카 섬에 반했고, 아시아의 식민지 개척과 무역을 위한 교두보로서 안성맞춤이라고 여겨서 더욱 집착했다. 포르투갈은 1517년 콜롬보 항구 도시에 요새를 구축했고, 1592년에 이르면 섬의 전체 해안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중요 요충지를 요새화하고 통제를 가 할 정도가 되었다. 이에 싱할라족들은 해안에서 점점 안으로 밀리면서 내륙 깊숙이 고지대에 있는 캔디에 수도를 정하고 방어에 임했다. 종교적으로는 많은 싱할라족들은 기독교로의 개종을 강요당했고, 해안가의 무슬림들은 종교적 박해를 받으면서 내륙 고지대로 밀려나게 되었다.

 

스리랑카 무슬림은 남인도의 타밀족과 중동에서 온 아랍인들이었는데, 대체로 이들은 수니파에 속한다. 타밀어를 사용하는 타밀족은 남인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로서 인도에서부터 이미 무슬림으로 개종한 뒤였고, 싱할라족과는 인종과 언어가 다른 민족이다. 스리랑카 전체 인구의 10%를 차지하면서 싱할라족과 대립하고 있다. 섬의 동북부 지역에 주로 분포해 있으면서 분리 독립운동을 요구하고 한동안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LTTE)전선을 구축, 내전을 주도했다. 내전은 1983년부터 2009년까지 진행되었고, 스리랑카 정부군은 26년 만에 이 지역을 완전히 소탕, 제압한 바 있다.

▲ 캔디 페라헤라 축제에서 무용수들이 춤을 추고 있다.   

 

실론불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었음에도 유럽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의 희생양이 되었다. 포르투갈, 네덜란드와 브리티시 직할 식민지를 겪으면서 기독교 선교활동도 맞물려서 돌아가고 있었다. 특히 포르투갈과의 전쟁 중에 불교 승가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1590년대에 이르면, 실론 불교승가는 최악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새로 입문하는 승려에게 수계해 줄 비구가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거의 2세기에 걸쳐서 불교승단은 공백기나 다름없을 정도로 불교승단은 말이 아니었다. 불교는 전통적으로 계맥(戒脈)에 의해서 법통이 이어지는데, 이것을 우빠삼빠다(Upasampadā)라고 하는데, 한역(漢譯)에서는 구족계(具足戒)라고 말한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서, 출가한 사람이 정식 승려가 될 때 받는 일종의 통과의례로서 계율의식을 말한다.

 

실론 섬이 외세의 점령으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내륙의 깊숙이 천도한 캔디왕조는 불교를 국교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교도 왕과 신도는 있었지만, 승단을 구성하는 비구가 없을 정도로 승가가 피폐해져 버리자. 당대 키르티 스리 라자 싱하(Kirti Sri Raja Singha 재위: 17471782) 왕은 승단복원을 위해서 노력했다. 왕은 즉위하자마자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네덜란드의 도움을 받아서 시암(태국)에서 일단의 비구들을 초청해 와서, 비구계단을 재건하고 수계를 받게 하였다. 1753년에는 웰리위타 스리 사라난카라 테로(16981778)에게 실론 승가의 최고위직인 상가라자(승왕=종정)의 지위를 부여하고 승가를 재건하도록 했다. 

보검스님<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필자 보검스님이 스리랑카 마하보디 회장 스님과 포즈를  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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