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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와 불교-㊳ 산스크리트어 유럽에 상륙, 불교학 연구 태동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1/09/13 [08:38]
성 바돌로매의 파울리누스 선교사 인도서 산스크리트어 연구

서양문화와 불교-㊳ 산스크리트어 유럽에 상륙, 불교학 연구 태동

성 바돌로매의 파울리누스 선교사 인도서 산스크리트어 연구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1/09/13 [08:38]

성 바돌로매의 파울리누스 선교사 인도서 산스크리트어 연구

 

불교가 학문적으로 서양에 진출하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기독교가 동양 진출에 빨리 성공한 것은 성경을 각 나라말로 번역한 때문이다. 선교사가 아무리 말로써 설명해도 문서화된 경전이 없으면 전도가 더딜 수밖에 없다. 경전 내용의 옳고 그름은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 그 나라 말로 번역이 된 다음에는 지속적인 전도가 뒤 따라야 한다. 경서만 번역됐다고 해서 어떤 한 종교가 금방 퍼지는 것이 아니다. 인도나 중앙아시아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는 데는 역경(譯經)이라는 과정이 있었다. 무려 8백년간 역경사업이 진행됐다. 정작 불교의 본고장인 인도나 중앙아시아에서는 산스크리트어본 불전(佛典)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산스크리트어 그 자체는 사라질 수가 없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이른바 범본(梵本) 불전이 인도에서는 전멸하다시피 했고, 중국과 티베트에서 한문대장경이나 티베트 대장경으로 살아남아서 오늘날 인도불교는 중국이나 티베트에서 존립하고 있는 것이다. 

▲ 성 바돌로매의 파울리누스 선교사     


서양에서 불교학 연구를 학술사적으로 정리해 놓은 분이 얀 윌렘 드용 (Jan Willem de Jong: 19212000)이란 학자이다. 드용 교수의 유럽.아메리카 불교학 연구 약사(A brief history of Buddhist studies in Europe and America)란 학술서가 있는데, 여기에 보면 근데 유럽 최초 산스크리트어 연구자로 성 바돌로매의 파울리누스(17481806) 선교사를 거론하고 있다. 파울리누수 선교사는 가르멜 산의 성모 형제회 소속 선교사로 인도에서 14년간 활동했다. 드용 교수가 주목한 것은 그의 선교활동 보다는 산스크리트어를 연구한 그의 학문적 업적이다. 영국의 문헌학자이자 판사였으며 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가 영어나 라틴어 등과 뿌리가 같다고 밝혀낸 윌리엄 존스 경(1746~1794)이나 프랑스 출신 인도 선교사 가스통이 뒤를 이었다고 한다.

 

인도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불교학 경전들을 접하게 되고 불교학이 유럽에 소개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불교학을 위한 불교경전어(佛敎經典語)는 산스크리트어 빨리어 티베트어 불교한문이다. 이 가운데 산스크리트어는 인도나 중앙아시아에서 불교 경전 생성의 기본 경전어였으며 문자였다. 나중에 간다리어 등도 있기는 하지만 산스크리트어는 불교 경전어이다. 불교혼성범어(산스크리트어)라고 하는데, ‘Buddhist Hybrid Sanskrit (BHS))이다. 인도 불교학을 연구하는 있어서 불교혼성범어를 모르고서는 완벽한 인도 불교학 연구가 어렵다. 물론 고타마 붓다는 인도 중부지방의 언어였던 빨리어로 설법을 하였지만, 이 빨리어는 문자를 가지지 않은 구어(口語)였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말씀은 암송에 의한 구송으로 전해졌고, 이 빨리 경전이 스리랑카에서 싱할라 문자로 문서화 되었다. 싱할라 문자만 빌렸을 뿐, 말은 빨리어였다. 오늘날 남방 상좌부의 경전인 것이다.

▲ 인도의 고대 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전사와 산스크리트어.    

 

인도 불교의 모든 부파가 다 혼성 범어를 경전어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불교혼성범어는 대중부 불교(大衆部佛敎,Mahāsāṃghika)에서 주로 사용했으며, 이 부파는 인도에서 성립된 부파불교 시대의 종파로서 대승불교 탄생의 기반이 되었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âsti-vāda)는 고전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여 경전을 생성했다.

 

설일체유부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모든 법(一切法)존재하다()’고 설명하는 부파(), ‘과거, 현재, 미래의 3세에 걸쳐 법의 실체가 존재한다. , 법의 실체는 항상 존재한다라는 뜻의 삼세실유법체항유(三世實有法體恒有)’는 설일체유부의 주장을 대표하는 명제이다.

 

설일체유부의 대표적인 논서는 2세기 중엽 인도에서 카니슈카(재위 127~151)의 후원 아래 500인의 아라한(고승)이 편찬한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4세기에 세친(316~396)이 설일체유부의 설을 근간으로 하면서 필요시 경량부(經量部)의 설로 설일체유부의 설을 비판한 구사론(俱舍論)으로, 구사론에서는 일체법을 오위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으로 설명하고 있다.

 

독자들에게는 복잡한 철학적 교설(敎說)이 되겠지만, 유럽의 선교사들은 이런 언어적 장벽을 넘어서 불교를 연구하여 유럽에 소개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를 하고 싶다.

▲ 파니니(기원전 520년~기원전 460년)는 십육 대국 시대에 활동한 고대 인도의 문법학자이다.   

 

산스크리트어(梵語)는 인도의 고전어로, 힌두교.대승불교.자이나교 경전의 언어이자 수많은 인도아리아 계통 모든 언어의 고급 어휘의 근간을 구성하는 언어다. 인도 공화국의 공용어 가운데 하나이며, 아직도 학교에서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며, 관련 문학.예술.방송 활동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며, 일부 브라만은 산스크리트어를 모국어로 쓰고 있다. 산스크리트어는 인도유럽어족 인도이란어파에 속하며, 현대인도 북부에서 쓰이는 힌디어를 위시한 아리안계 인도 모든 언어의 조상언어다. 인도 고전 언어가 유럽의 고전 언어인 라틴어와 희랍어와 유사성을 보인다는 점에 착안한 유럽의 학자들은 인도유럽어족이라는 어족을 세밀하게 밝혀내게 되었고, 이가 곧 비교언어학의 시초가 된다. 같은 인도유럽어족인 영어와의 동계어를 예로 들면, ‘mus- mouse()’, ‘sharkara-sugar(설탕)’, ‘manu-man(남자)’ 등이다.

▲ 인도 중앙 산스크리트 대학에서 산스크리트어를 수업하는 장면.   

 

산스크리트어는 베다 산스크리트어의 발전형으로, 베다 산스크리트어와 구분하여 고전 산스크리트어라고도 한다. 기원전 4세기에 파니니에 의해 고전 산스크리트어 문법이 완성되면서 베다 산스크리트어는 완전히 사어(死語)가 되었다. 파니니는 산스크리트어의 문법을 총 3,959개의 규칙으로 정리하였다. 현대에 산스크리트어를 기록하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데바나가리 문자가 쓰이나 역사적으로 범어 표기는 특정한 문자에 국한되지 않고 각 지방에서 널리 쓰이는 문자가 사용되어, 나가리(Nagari).그란타(Grantha).샤라다(Sharada).모디(Modi) 등 여러 가지 문자가 쓰였다. 산스크리트어는 인도 전역을 아우르는 고전어로서의 위치를 현대에 이르기까지 굳게 견지하고 있어, 방송 매체에서 산스크리트어 방송이 송출되는가 하면, 산스크리트어 문학 활동 역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북부의 마디아프라데시 주에는 일상적으로 산스크리트어가 널리 쓰이는 마을이 몇 곳 존재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산스크리트어를 현대에 되살리려는 부흥 운동은 산스크리트어 부활 운동이라 통칭한다.

 

가톨릭 선교사들이 인도나 중국에 파견되어서 전도 활동을 하면서 그 나라 언어와 문화 그리고 종교를 연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과정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특히 다른 종교를 알아야 자신의 종교를 전파한다는 생각에서 연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불교가 유럽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고, 상대 종교로서의 경쟁 내지는 극복대상의 종교에서 오히려 흥미와 관심을 넘어서 학문적으로 연구해야할 철학의 종교로 인식하는 결과를 가져와서 오늘날 불교학은 수준 높게 발전하게 되었다.

 

사실 불교는 처음에 인도에서 서진하였으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장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하지만 불교가 동진하는 데는 큰 장벽이 없었다.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와 오아시스를 거쳐서 중국에 도달, 중국의 사상계를 압도하여 주류 종교 철학으로 정착하였다. 자연스럽게 주변 국가들인 한반도 일본 베트남 등에 전해졌으며, 초기에는 동남아시아도 중국식 대승불교가 전파되었으나 12세기 스리랑카 불교가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에 전파되면서, 동남아시아는 빨리어가 경전어인 상좌부 불교 전통이 정착하게 됐다.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은 대승불교인 동아시아 불교 전통이 확립됐으며, 다만 베트남은 캄보디아 영토에 있는 상좌부 불교 전통을 흡수하다보니 대승과 상좌부(소승)가 동거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양문화와 불교를 리서치하면서 살펴본 바로는 고대 헬레니즘 시대부터 불교는 서양문화와 밀접한 관련 속에 교섭해 왔다. 중세 시대 기독교가 전성을 이루던 시대에는 불교와의 직접적인 교류가 미약했으나, 유럽식민지 개척과 함께 아시아로 진출한 가톨릭 선교사들로 인하여 불교라는 종교는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 지중해에서 성 바울의 전도 여행지도.    

 

기독교 선교 역사는 성 바울로부터 시작된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는 전도에 의해서 신자를 확보했다고 보는데, 불교전도와는 약간의 방법의 차이를 보인다. 불교는 처음부터 위로부터의 교화였다. 고타마 붓다 자신이 왕자 출신이기도 하지만, 불교를 시작했던 초기 멤버들이 거의가 석가족의 왕손이나 장상(將相)들이었고, 첫 교화(敎化) 대상이 왕이나 대신 그의 가족과 부자들이었다. 왕이 불교를 받아들이면 직계 가족과 신하들은 자연스럽게 불교도가 되었으며, 거부장자가 불교도가 되면 그 밑에서 종사하던 모든 사람들이 불교도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였다. 이런 전통이 중앙아시아 중국 한반도 일본 등지에 그대로 전습된 것이다. 거리로 나서서 신자를 불러 모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기독교는 처음부터 불러 모아야 했다. 수천 년이 지난 21세기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 전통과 방식은 변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보니 불교는 소극적인 전도방식을 갖게 됐고, 기독교는 적극적인 전도(선교)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한국 불교계의 해외 전도는 미미하지만, 한국 기독교의 해외선교는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로 선교사 수가 많다.

 

불교가 서양에 소개되고 전파되는 것은 불교도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촉발이 됐고, 학자나 지식인 다음으로는 일반 지성인들에게 까지 미치고 있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필자 보검스님이 태국의 유명 불교대학(MCU) 국제심포지엄에서 통역을 끝내고 참가자들과 함께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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