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청주향교의 연혁과 현황, 의의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1/10/07 [08:56]
충주 대표 조선시대 지방 교육 기관이자 선현을 제향하는 공간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청주향교의 연혁과 현황, 의의

충주 대표 조선시대 지방 교육 기관이자 선현을 제향하는 공간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1/10/07 [08:56]

  


충주 대표 조선시대 지방 교육 기관이자 선현을 제향하는 공간

세종 치병 위해 초정에 행행했을 때 서책 하사...1988년 유형문화재 제39호 지정

 

고려 성종 6년인 987년 전국의 12목에 학교를 세우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당시 12목의 하나였던 청주에 향교와 문묘가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창건년대는 명확하지가 않다.(그 당시 전국 십이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보내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리고 청주향교와 문묘는 동국여지승람향교재주동이리 문묘재향교라 하여 관아 동쪽 2리에 묘학동궁으로 함께 자리하고 있다고 했는데 지금의 자리와 일치하고 있다. 그 후 1444(세종 26)에 세종이 치병하기 위해 초정에 행행하였을 때 통감강목·통감절요집성·통감훈의·근사록·소학·한문등 서책을 하사하였고 1464(세조 10)에는 세조가 속리산 가는 길에 문묘에 대뢰로서 친히 제사를 올림으로써 삼남에서 으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592(선조25) 임진왜란과 1597(선조 30) 정유재란이 종식된 후 1609(광해군 1)에 이르러 본현 남방 기산리로 이건하였다. 1663(현종 4)에 명륜당 중수를 가하였으며 1683(숙종 9) 현감 이언기가 현 위치로 재 이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 후 고종16년에 군수 장한의 주관하에 명륜당에 일대중수를 가하였고, 1905년에 군수 이명재가 대성전을 중건하였으며, 1938년에 직원 김명제가 재임중 대성전 중수에 이어 사재를 희사하여 사무실을 짓고 경의재라 제액하고 사무실로 사용하던 중 숭인관 신축으로 인해 철거되었다.

 

이후 명륜당 번와·도로보수 등 일대공사를 완료하였다. 그리고 6.25전쟁 때 동서양무가 불에 타 1981년에 서무를 1982년 동무를 복원하였다. 조국 광복후 1957년에 처사 채진두의 희사금으로 증반실을 복원하였고 1969~1971년에는 시. 도 보조금과 유림성금으로 대성전,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증반실, 경의재, 홍전문을 중수하고 교직사를 개축하는 등 창건이래 최대중수를 단행하였다.

 

1973년에는 교궁 주변시설과 환경정화 공사를 완료하여 면모를 일신하였고, 1979년에 제기, 관복, 제복 등 비품을 구비하였다. 그 후에도 중. 보수공사가 이어져 1980년 담장개축, 대성전 계단, 보도개설, 내삼문 번와, 홍전문 개건, 축대개축과 2006년도에는 명륜당 내외부를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4계절 교육시설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으며 1985년 양현당, 1996년 복지회관, 2001년 숭인관 신축등으로 교육 및 복지시설을 완벽하게 갖추어 오늘날의 웅장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향교와 문묘의 배치는 앞에 향교로 외삼문과 명륜당을 두고 그 뒤에 문묘로 신문과 대성전 그리고 묘정 좌우에 동서양무를 둔 전교후묘의 형식이다.

 

청주향교는 197712월 충청북도 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었다가 19889월 재분류되어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청주향교는 조선시대의 주학이며 교관으로 세종때 유학교수 1명을 두었다가 성종때 종6품의 교수 1인을 두고 경국대전에 교생의 수를 90명으로 정하였는데 호서승람68호서읍지에는 90충청도읍지에도 90명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학전은 세종 27(1445)10결이 지급되고 대전속록의 규정은 10, 속대전의 규정은 7결인데 실제로 얼마나 보유했었는지 알 수 없다.

 

현재 본향교 대성전에는 오성과 송조육현 그리고 우리나라 십팔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五聖, 宋朝六賢,우리 나라 十八賢 배향...‘동국여지승람기록 이후 향교의 변천

 

5(五聖), 송조 6(宋朝六賢) 및 우리 나라 18(十八賢)을 배향한다. 원래는 동·서무에 나누어 제향하다가 현재는 모두 대성전에 모신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동쪽 2리로 위치가 기록되어 있어 창건 당시 위치가 현재의 위치임을 알 수 있다. 1609(광해군 1) 현의 남쪽 기산리로 옮겼다가 1683(숙종 9)에 현감 이언기(李彦紀)가 다시 현 위치로 이건하여 중건하였다.

 

1728년 무신란이 일어나 향민이 모두 피난을 가 향교가 텅 비자 최생도(崔生徒)21일간 향교를 지켰는데 반란군에게 잡혀 문초를 받자 사실을 설명하고 풀려났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알려져 관에서 포장하기도 하였다.(1816년 조연규 기문)

 

1905년에 군수 이명재가 대성전을 중건하였으며, 1938년에 직원 김명제가 재임 중 대성전 중수에 이어 사재를 희사하여 사무실을 짓고 경의재라 제액한 뒤 사무실로 사용하던 중 숭인관 신축으로 인해 철거되었다. 이후 명륜당 번와·도로보수 등 일대공사를 완료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동서양무가 불에 타 1981년에 서무를 복원하고, 1982년 동무를 복원하였다. 광복 후 1957년에 처사 채진두의 희사금으로 증반실을 복원하였고 1969~1971년에는 시. 도 보조금과 유림성금으로 대성전,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증반실, 경의재, 홍전문을 중수하고 교직사를 개축하는 등 창건 이래 최대중수를 단행하였다.

 

1973년에는 교궁주변 시설과 환경정화공사를 완료하여 면모를 일신하였고, 1979년에 제기, 관복, 제복 등 비품을 구비하였다. 그 후에도 중. 보수공사가 이어져 1980년 담장개축, 대성전 계단, 보도개설, 내삼문 번와, 홍전문 개건, 축대개축을 시행하였으며 1985년 양현당, 1996년 복지회관, 2001년 숭인관 신축등으로 교육 및 복지시설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2006년도에는 명륜당 내, 외부를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현재의 웅장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교생(校生) 90인과 자모생(自募生) 70인이 있었으며, 재직(齋直) 40, 노비 13인이 있었는데 1894년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문묘의 향사만 하게 되었고, 1910년 이후에는 조선총독부령에 의하여 문묘 직원을 두어 관리하게 되었다.

 

건물의 배치와 역사적 변천, 현황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양현당, 복지회관, 숭인관 등이 있다. 향교의 배치는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외삼문과 서향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고, 내삼문을 기준으로 문묘 공간인 대성전(大聖殿)이 후면에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로 되어 있다. 대성전은 정면 3, 측면 2칸 반 규모의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이며, 전면 반 칸은 퇴칸으로 개방하였고, 내부는 통간(通間)으로 하여 신위를 모시고 있다.

 

좌우에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있다. 동무는 1982, 서무는 1981년 복원한 것이다. 명륜당(明倫堂)1638년에 세운 것으로 정면 5, 측면 3칸 규모의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경내에 홍살문과 하마비, 그리고 향교중건에 기여한 공적비 4기가 있다.

 

1444(세종 26)에는 세종(世宗)이 초정(椒井)에 행차했을 때 청주향교에 통감절요, 소학(小學)등 서적을 하사한 것과, 1464(세조 10) 세조(世祖)가 요양 차 초정에 머물면서 문묘제향을 주관하여 삼남 제일의 향교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1663년 송시열이 기문을 쓴 청주향교지가 전한다.

 

1977126일 충청북도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었다가 19889월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39호로 재분류되었다. 현재 향교재단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있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 도배방지 이미지

많이 본 기사
1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