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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형식 목사의 성서 이해
주형식 목사의 지상 설교●우리를 채워주시는 엘 샤다이 하나님
주형식 목사의 성서 이해
기사입력: 2021/11/01 [16:00]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주형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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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12:8)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13:4)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21: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왕의 이름을 불렀더라

(26:25) “이삭이 그 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위의 성경절들은 창세기에 나오는 믿음의 선조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을 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이한 사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먼저 그들이 단을 쌓은 사실이고, 두번째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영적 부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 부흥이 필요할 때 그들은 먼저 단을 쌓고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아벨을 대신한 셋이 그러했으며,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그의 아들 이삭도 아버지의 모본을 따라 항상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 영적 부흥이 필요할 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만이 참다운 영적 부흥을 경험할 것입니다. 영적 부흥과 각성을 원한다면 우리는 창세기에 기록된 믿음의 선조들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야 하고, 그 이름을 불러야 할 것입니다.

 

엘 샤다이라는 이름의 의미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창세기 171절에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번역이 되었습니다. ‘은 모세 오경에 200회 정도 언급되면서 항상 강하다, 혹은 힘이 있다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7장에는 하나님으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샤다이라는 단어의 뜻은 무엇일까요? ‘샤다이라는 단어 자체는 구약 성경에 48회 나오는데 항상 전능한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샤다이라는 말의 어근은 ‘Shad’로써 여자의 유방혹은 젖꼭지를 언급하는 단어입니다. 구약 성경에 24회가 여자의 젖가슴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Shad’의 동사형은 ‘Shaddah’ 인데 축축하게 하다(moisten)”, 혹은 피가 억수같이 퍼 붓다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43,10절에 나오는 싯딤 골짜기의 어근이 바로 ‘Shadah’인데 싯딤은 땅에서 올라오는 많은 자연수와 풍부한 녹음 때문에 하나님의 동산으로 물이 잘 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합해 보건대 샤다이라는 단어는 자양분을 공급하고, 무엇인가를 항상 제공해 주며, 또한 만족시켜 주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어머니의 젖은 항상 어린 아기를 만족시키고 충족시켜 주고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먹지 못할 경우 생명의 위협이 뒤따릅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젖은 항상 충분하고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축복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배려, 그리고 사랑은 항상 우리를 위해 충분하고 충만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이름이 엘 샤다이이기 때문입니다.

 

갓난아이가 울며 보챌 때에는 아무 것도 아기를 잠재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엄마의 가슴만은 어린아이에게 진정한 안식과 휴식을 줄 수 있습니다. 어린아기에게 어른들이 먹는 음식을 먹일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의 젖가슴만이 아이에게 무한한 힘을 제공해 줍니다. 어머니의 젖 속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어머니의 젖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말해 주는 전설이 전해져 옵니다. 어떤 엄마가 아이를 내려놓고 양떼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는 동안 갓난아이가 절벽으로 기어갔습니다. 갓난아이가 절벽이 무엇인 지도 알지 못한 채 절벽 밑을 신기한 듯이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엄마가 발견했습니다. 이제 한 발짝만 더 앞으로 디디면 아이는 절벽 밑으로 떨어질 참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엄마는 본능적으로 아이를 살리기 위해 그의 웃통을 벗어 아이를 향해 그의 젖가슴을 내어 보였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앞으로 손을 내어 딛기보다는 즉시 엄마의 젖을 보고는 뒷걸음질하여 엄마에게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엘 샤다이속에 젖가슴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통해 생명을 주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줄 때, 충분히 충만히 주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생명과 은혜를 충분히 충만히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엘 샤다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도 있지만 충만하게 충족시켜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하나님의 축복과 생명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고 축복을 항상 받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나타나신 엘 샤다이

 

아브라함과 사라가 전능자 하나님 즉 엘 샤다이하나님을 처음 만난 때가 창세기 17장에 등장합니다. 여기에서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성경에 처음 등장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세 였고, 사라의 나이는 90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우르에서 불러내신 이후에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으므로 그의 종이었던 엘리에셀을 그의 상속자로 삼고자 했습니다.(15:2-3)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를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를 의로 여기셨습니다.(15:6)

 

그가 우르를 떠날 때 그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수년이 흘러갔지만 사라를 통해 도무지 아들이 탄생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거한 지 십년이 흘러 그의 나이 거의 100세가 되었을 때 부인에게서는 더 이상 자식이 탄생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사라는 남편에게 여종 하갈을 보내어 아들을 낳고 대를 잇고자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탄생합니다.(16:1-4)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약속에 대한 신뢰가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하갈을 통해 하나님을 돕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의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믿음이 점점 사라져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20여년 전에 아브라함과 한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아브라함 앞에 엘 샤다이하나님으로 자신을 소개하시며 나타나신 것입니다.

 

(17:1-4)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창세기 17장 전까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엘로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주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17장에 와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다른 이름으로 소개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전능하신 엘 샤다이하나님입니다. 17장에서 전능하신 엘 샤다이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15장에 약속하신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을 잃고 있었습니다. 확신이 그들의 삶 중에서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가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 특별히 전능하신 엘 샤다이하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엘 샤다이하나님입니까? ‘엘 샤다이라는 이름은 충분히 충만하게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식어져 가는 믿음이 채워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언약에 대한 확신이 확고해져야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충족되어져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 그들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무엇인가를 잃어갈 때에 충분히 충만하게 채워 주시기 위해 나타나시는 분이 바로 엘 샤다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Ah란 무엇인가?

 

식어져 가는 믿음을 채워 주고, 신뢰를 확고하게 하시는 엘 샤다이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무엇으로 채워 주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고, 사래가 사라로 바뀌는 과정 속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이 아브라함으로 바뀌면서 채워졌습니다. ‘Abram’‘Abraham’이 되면서 ‘Ah’가 아브람의 이름 속에 채워졌습니다. ‘Sara’라는 이름이 ‘Saraah’가 되면서 ‘Ah’가 채워졌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람과 사래라는 이름을 채워 아브라함과 사라가 되게 한 ‘Ah’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Ah’는 사람이 숨을 내어 쉴 때 생겨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이 쉬는 숨을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 속에 집어넣어 그들의 이름을 아브라함과 사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사라라는 이름 속에는 하나님의 숨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은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사람 속에 집어넣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의 코를 통해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이 때 생기를 불어넣는 소리가 바로 ‘Ah’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의 ‘Ah’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숨이 아담 속에 들어 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Ah’가 아담 속에 들어갔을 때 아담이 산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Ah’는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브람와 사래는 육신의 아버지에게 받은 이름입니다.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숨을 집어넣으시므로 그를 살리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아브람 속에 하나님의 숨이 그 이름 속에 들어감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한 부분이 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숨을 자신의 이름 속에 넣으므로 더 이상 육신에 속한 죽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숨 때문에 산 자가 되었습니다. 사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래는 죽은 부모에게서 이름을 물려받았습니다. 그 이름 속에 ‘Ah’가 들어갔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하나님의 숨이 들어간 사라가 되었고, 그 순간부터 산 자가 되었습니다.

 

‘Ah’는 하나님의 숨입니다. 그 속에는 영생케 하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아담이 이를 받았고,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우리가 영생하려면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Ah’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Ah’를 주시되 젖을 먹이는 어머니처럼 항상 충분히 충만하게 주십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Ah’라는 발음은 히브리어 글자의 ‘H’에 해당됩니다. 히브리어 글자의 ‘H’를 발음하려면 ‘Ah’라고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라는 이름을 히브리어로 쓰면 ‘WHYH’가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 속에 히브리어 ‘H’자가 2개씩이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히브리어 철자 하나로 표기하라면 항상 ‘H’ ‘Ah’로 합니다. 그러므로 ‘Ah’는 하나님 자체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호흡은 생명이고 생명은 하나님임을 증명해 주는 글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아브라함과 사라로 바꾸어 주실 때에 그들의 이름 속에 자신의 이름을 포함시켜 충족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이름과 삶 속에 들어갈 때, 그들에게 참된 기쁨과 평안과 안식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삶과 이름 속에 들어갈 때에 비로소 그들은 이삭을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넉넉히 채워 주시는 엘 샤다이하나님이 그들 속에 들어가 살아 계실 때만 그들에게서 생명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름과 삶 속에 하나님이 들어오셔야만 우리 중에 생명이 있고,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지만 아직도 ‘Ah’, 하나님의 숨이 그들 속에 들어가지 못해 이름만 그리스도인인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Ah’의 하나님이 아브람의 이름과 삶 속에 들어가심으로 그들에게 생명이 생겨나고, 또한 그들이 생명을 탄생시켰듯이 우리의 생애와 이름 속에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의 숨이 들어 와야 할 것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아담 속에 하나님의 ‘Ah’가 들어가서 아담이 생령이 된 것처럼, 우리 중에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의 ‘Ah’가 들어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의 ‘Ah’를 받아들인 사람만이 참다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중에 하나님의 ‘Ah’가 있습니까?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의 호흡이 우리 중에 있음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엘 샤다이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그의 호흡을 누구에게나 충족히 주시고자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삭과 야곱과 나오미의 엘 샤다이 하나님

 

(28:3)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이 말씀은 야곱이 형을 속이고 도망가기 바로 직전에 이삭이 야곱을 불러다 놓고 축복한 말씀입니다. 야곱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험한 객지 생활을 곧 떠나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 그는 혼자서 20년 이상 아무의 도움도 없지 못한 채 살아야 했습니다. 그를 보살펴 줄 사람이 없는 광야로 곧 떠나야 했습니다. 이삭은 앞으로 닥칠 야곱의 생애의 위기와 환란을 미리 보았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하나님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야곱을 떠나보내며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하나님을 구합니다.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시고 채워 주실 하나님이 야곱에게 가장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을 떠나보내며 그에게 가장 필요한 엘 샤다이하나님을 언급합니다. 그러기에 엘 샤다이하나님은 앞이 캄캄하고 앞길이 막혀 어떤 희망이나 소망이 전혀 없을 때에 이삭이 야곱을 위해 부른 하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43: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는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 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라

 

이 말씀은 야곱이 애굽으로 베냐민을 보낼 때 그의 아들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쌀을 구하러 애굽에 가서 도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형제 중 한 사람을 그 곳에 두고 왔습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결코 볼모로 잡아 둔 시므온을 애굽에서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므온을 애굽에 둔 채 다시 야곱에게 돌아왔습니다. 야곱은 결단코 베냐민을 보낼 수 없다고 했지만, 시므온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결국 베냐민을 보내기로 결심하면서 아들들에게 이와 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야곱은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내지만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지를 전혀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을 살리기 위해 그는 다른 아들들과 함께 베냐민도 보내야만 했습니다. 앞날이 어떻게 될 지, 그리고 아들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어린시절 아버지께서 자신을 위해 찾으셨던 엘 샤다이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채워 주시고, 옳은 길로 인도하시며, 그들의 필요를 아시고, 해결해 주실 엘 샤다이하나님을 그는 불러 의지하였습니다.

 

이삭이나 야곱의 경우 그들이 엘 샤다이하나님을 불렀을 때는 앞길이 난감해 보이고 캄캄할 때였습니다. 도무지 해결책이 보이지 않고, 칠흙같이 캄캄하여 뚫고 나갈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그들은 엘 샤다이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야곱이 험한 생애를 살 것을 내다본 이삭은 엘 샤다이하나님께 그를 인도하여 충만하게 해주십사 탄원하였고, 야곱은 그의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내면서 엘 샤다이하나님을 부르며 그들의 앞길을 엘 샤다이하나님께 맡겼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삭이나 야곱과 같이 앞이 캄캄해 본 적이 있습니까? 도무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도무지 뚫고 나갈 희망이 전혀 없이 보일 때가 있었습니까? 이렇게 앞이 어떻게 풀릴지 전혀 알지 못할 때 우리가 불러야 할 하나님의 이름은 바로 엘 샤다이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충분히 충만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엘 샤다이하나님만이 우리의 앞길을 책임지실 수 있고, 우리를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1:20,21)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겼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나오미 역시 전능자 즉 엘 샤다이하나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전능자 엘 샤다이하나님이 자신을 괴롭게 했다고 증언합니다. 그녀가 베들레헴에 있었을 때 풍족하게 살았지만, 모압으로 이민갔을 때는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은 채 빈털털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녀는 이것을 전능자가 치신 것으로 여겼습니다. 나오미는 전능자 엘 샤다이하나님이 그녀를 충분히 충만하게 축복해 주실 수 없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방 땅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 왔을 때 그녀는 베들레헴에서 가장 행복하고 복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나오미의 경험을 통해 깨달아야 할 것은 엘 샤다이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수 있는 자리에 우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엘 샤다이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과 안식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압 땅에서 살면서 하나님께 기대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베들레헴에 거해야 합니다. 그곳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영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축복해 주실 수 없는 영적 모압 땅, 세상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전능자 엘 샤다이하나님이 마음껏 축복하실 수 있는 떡의 집베들레헴에 거하고 있습니까?

 

연어는 2월을 전후로 산란하고 부화하는 어류의 일종인데, 산란기가 되면 바다에서 자신이 자랐던 곳으로 이동합니다. 곰이 연어를 밟고 강을 건널 정도로 많은 연어들이 알레스카에 몰려듭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을 부화하고 나면 어미 연어는 죽어버립니다. 그것은 새끼가 어미의 살을 먹고 자라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거미의 세계에서도 발견됩니다. 수 백 마리의 새끼 거미들이 어미 거미의 잔등에 붙어서 어미의 살을 먹고 있는 장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알이 부화하여 이제 입과 이빨로 살을 뜯어먹을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어미 거미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립니다. 그러면 알에서 부화된 새끼들은 죽은 어미의 살을 뜯어먹고 장성하며 자라납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시여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려고 자신을 십자가에 죽이셨습니다. 그가 죽었기 때문에 그 피의 대가로 우리가 생명을 받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그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엘 샤다이하나님, 그분은 무엇이든지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엄마의 젖처럼, 베고픈 아이를 위해 자신은 굶더라도 자식을 먹이는 엄마의 모습이 바로 엘 샤다이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충분히 충만하게 채워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형식 목사는 다수의 교회와 교단행정직에서 봉사를 하다가 미국 미시간주에 위치한 Andrews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octor of Ministry)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현재 묵동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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