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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불교경전에 나타난 효사상(上)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1/11/02 [08:53]
지배복종의 윤리가 양방이 평등한 도덕을 의미하는 불교에서의 효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불교경전에 나타난 효사상(上)

지배복종의 윤리가 양방이 평등한 도덕을 의미하는 불교에서의 효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1/11/02 [08:53]

<연재순서>

() 지배복종의 윤리가 양방이 평등한 도덕을 의미하는 불교에서의 효

()대표적인 불교 효 관련 경전과 불교 효 사상의 적용가능성 

 

전통적인 효사상은 사회에서나 가정에서 윤리적으로 의무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아닌,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한 규범화된 도덕률을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 해도 현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과거에 집착하여 융통성을 잃어버린다면 현실성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사회 지도층들은 젊은 세대에 대한 도덕교육이 사회질서의 근본임을 인식하고, ‘사상이 만사의 근본이 되는 덕목임을 가르치되, 효를 오늘날의 가치들과 접목시켜 새롭게 국민의 일상 속에 정착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효의 근본사상이 우리 사회 안에 현대적 가치와 부합하여 확산된다면 사회적으로는 봉사정신으로, 국가적으로는 애국심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며, 세계적인 인류애로 승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교에서 효를 이야기 할 때 항상 부모의 자애로운 은혜와 더불어 그에 대한 자식의 효가 언급되는 것은 불교의 윤리가 신분의 높낮음에 따른 지배복종의 윤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양방이 평등한 도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불교의 일여평등(一如平等)은 불교의 미래불, 당래불 사상에 잘 나타나 있는데, 불교에서는 사람은 모두 불성으로 부처가 될 수 있어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그리고 천자나 거지도 평등하다고 이야기 한다. 이처럼 모든 관계가 높고 낮음의 수직관계가 아닌 수평관계로써, 대평등의 마음을 바탕으로 가족윤리를 논하고 효를 이야기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몸을 올바르게 세워 그 이름을 후세까지 남겨 부모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이야말로 큰 효라고 하였다.

▲ 효는 모든 종교를 초월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덕목으로 인식되고 있다. 사진은 강릉시 죽헌동 핸다리마을 내 ‘사모정(思母亭) 공원’에 있는 석조물.    

  

효의 개념: 동서고금 모든 종교를 초월, 인간의 기본적인 덕목으로 인식되는 효

 

효는 모든 종교를 초월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덕목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 생명을 잉태하여 낳고 기른 부모에 대한 감사, 사랑과 공경은 부모와 자식간이라는 애정관계에서만 볼 것이 아니다. 인간세상에서 자기 존재를 승화시켜 구경에 궁극지에 이르는 수행의 길, 자타를 이롭게 하여 함께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대승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것이 효라 할 것이다.

 

효행은 인간으로써 근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은혜를 알아 갚고자 하는 마음, 가엾이 여기는 자비의 마음 등의 여러가지 덕을 갈무리 하고 있는 행이다. 그래서 유교에서도 인의 근본이 되는 것을 효라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을 모시듯 부모님을 섬기라고 하면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가르치고 있다. 불교에서는 어머니가 죽어서까지 천도를 하여 지옥고를 면하게 한 목련존자의 예를 통해서 생사를 뛰어넘는 영원한 효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효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고자 할 때 제일 먼저 실천해야 할 덕목으로 자식의 어버이에 대한 극진한 정성을 말한다. 이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름을 나타내는 인격형성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효를 학술논문 등에서는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다.

 

효는 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어버이를 섬기는 태도에 바탕을 둔다고 하였다. 이러한 효는 부모 섬김에서부터 시작되지만 임금을 섬기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몸을 세우는데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생명존중의 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유한의 생명을 무한의 생명으로, 즉 인간의 삶을 과거로부터 미래로 잇게 해주는 근원적 생명의지라고 표현했다.

 

부모에 대한 보은의 사상행위인 한편 자식에 대한 부모의 자애와 예경을 의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적으로는 가정과 부모를 버리고, 공적으로는 사회를 등지고 산에 들어가 수도에 전념하는 것이 불교의 전부이며, 불교에서 이야기 하는 윤리인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

 

맹자의 시각에서 바라보아도 불교의 윤리는 온당치 못하다. 맹자는 자식을 못 낳아 조상의 대를 끊기게 하는 것이 불효 중 제일 큰 불효라 하였으니, 이러한 유교적 관점에서 볼 때, 불교는 전통 효 윤리와 상반되는 비윤리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석가의 생애와 행적을 살펴본다거나 그가 설법한 수많은 경전을 더듬어보면 불교의 효 관념이 얼마나 철저한지를 알게 된다. 위에서 이야기한 정토삼부경, 부모은중경을 필두로 하여 사십이장경이나 아함경등 대다수의 경전에는 부모와 자식의 필연적 인연을 통해 알 수 있는 부모의 존재론적 의미, 효의 방법이나 중요성 등 효 이론이 상당히 치밀하게 언급되어 있다.

 

초기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은 전생에 부모를 극진히 모신 희생과 봉양덕분에 왕자의 신분으로 이생에 출생하여 성불했으며, 목건련은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제했다. 불교는 유교에서 주장하는 효의 실천방식의 효 윤리와 상반되는 비윤리적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효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하는 윤리적 종교이다.

 

불교에 가르치고 있는 효는 넓게보면 깨달음을 통한 소위 사생자부(四生慈父)가 되는 것이며 불교의 효가 지향하는것은 일체중생을 받들고, 나의 부모뿐만 아니라 다른이들의 부모라도 윤회의 과정에서 나의 부모가 되었을 지모를 가능성을 깊이 통찰하여 진실한 자비를 실천할 때, 효는 더욱 깊이가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주장하는 효는 마음을 중요시하여 행하는 것으로 물질적 봉양보다 정신적 위안을 앞세우며, 평등한 원리에 전개되는 내세관을 가진다.

 

불교에서 부모와 자식의 인연 관계는 자신의 전생업에 따른 인연으로 자신에게 책임을 두고 있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에서 부모를 만나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 부모를 골라 그것을 인연으로 해서 태어났다고 한다. 즉 부모가 마음대로 자식을 낳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골라 전생의 업을 인으로, 부모를 연으로 해서 태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불교의 독자적 인생관이며 연기사상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효는 어디까지나 서로 예배하는 부처로서의 관계에 선 것이었다. 효란 물론 자식이 부모에 대해 가지는 보은의 사상이고, 행위지만, 한편 이 효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자애와 예경을 의미하는 윤리였다. 즉 윤회설과 연기설에 바탕을 두는 불교의 효 사상은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직접적인 조건을 제공해 준 지금의 부모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최상의 효도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일체중생이 전생에 내 부모였다는 윤회사상에 근거하여 모든 존재를 자비와 선행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점에 불교 특유의 효 사상이 있다고 할 것이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 대해 붓다의 가르침은 서로 상호성을 가지며 자식이 부모에 대한 보은 사상으로 나타난다. 또한 불교의 효 사상은 현세적인 물질적 정신적인 부모봉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윤회 속의 고통과 괴로움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삼세적 효행이다. 더 나아가 효행 대상이 나의 부모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체중생을 나의 부모와 같이 여기는 동채대비사상으로 불교적 효행은 그 가치와 완성을 이룬다.

 

불교의 효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일회적인 것이 아니며, 윤회를 통해 자식이 부모가 되고 부모가 자식이 될 수 있으며, 그러한 다생의 반복을 통해 일체의 남자는 아버지요, 일체의 여자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 세종 후궁 명빈 김씨에 의혜 간행된 부모은중경. 보물 1125호    

 

이와같은 의식으로 형성된 부모은중경에서 설명되고 있다.

 

그때 세존께서는 대중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가시다가 마른 뼈 한 무더기를 보시자 다섯 활개 땅에 던져 마른 뼈에다 절을 하셨다. 이때 아난 등 대중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삼계의 큰 스승이시며 사생의 인자(慈父)한 어버이시어서 많은 대중들의 공경을 받으시거늘 어찌하여 이 마른 뼈에다 절을 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비록 나의 우두머리 제자로서 출가한 지가 오래되었건만 아는 것이 넓지 못하구나, 이 한 무더기의 뼈는 혹시 나의 전생의 할아버지이거나 부모일 것이기에 절을 하였느니라,

 

육도집경43,섬도사본행 부처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보면

 

붓다가 모든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생에 모든 부처님을 받들고 지극히 효행을 하였기 때문에 덕이 높아지고 복이 융성하여져서 마침내 하늘 중의 하늘로서 삼계에 홀로 서게 되었으니라, 그때 섬이란 자가 바로 나였으며 국왕은 아난이었고 섬의 아버지였던 자는 지금의 나의 아버지이며, 어머니였던 이는 나의 어머니이고, 하늘의 제석은 미륵이었느니라

 

윤회는 돌고 도는 것이다. 말 그대로 바퀴가 돌 듯, 지금의 인간관계가 전생, 혹 내생에 어떤 인연이었는지는 알 수없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은 가깝게는 전생에 부부,부자,형제,자매일 수 있다. 지금의 인연만 생각한다면 상대에게 섭섭하게 할 수 있지만 불교에서는 그럴 수 없다. 한번의 죽음으로 모든 인연이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순환한다는 것이 불교에서 보는 세계관이다. 그것은 불교에서 나이가 어린 사람의 죽음 앞에서 예를 갖추는 근본적인 이유가 될 수 있다.

 

정토삼부경에서 들려주고 있는 이야기를 살펴보면 아사세 태자와 빈비사라왕 그리고 위제희 부인 세 명에 얽힌 과거의 인연이 금생에 이와같은 악연으로 이어졌다. 빈비사라왕이 뒤를 이을 자식이 없어 고민하였다. 신에게 기도하였지만, 영험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왕은 점치는 사람에게 상담을 하게 된다. 점치는 사람은 산중에 한 사람의 수행자가 있는데, 오래지 않아 죽지만 삼 년 뒤에 다시 태어나 왕의 자식이 될 것입니다.” 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기뻐하지만 과인은 이미 나이를 먹어 도저히 삼 년을 기다릴 수 없다며 신하를 통해 수행자에게 왕을 위해 빨리 죽기를 청한다. 왕의 부탁을 따를 수 없다는 수행자의 말을 전해 들은 왕은 그의 목숨을 끊을 것을 말한다. 죽음에 임한 수행자는 유언으로 나는 아직 수명이 남아있는데 왕 때문에 죽는다. 만약 내가 왕의 자식으로 바뀌어 태어나면 반드시 원수를 갚을 것이다.”라고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이후 위제희 부인은 임신하였다. 점술가를 통해 전해들은 아이와 빈비사라왕, 위제희 부인과 관계는 왕을 위해 좋지 않다는 소식이다. 왕과 부인은 공모하여 태어나는 순간 아이의 목숨을 거두는 일을 벌인다. 그러나 아이는 무사했다. 후일 두 사람이 원치 않았던 아사세 태자가 왕이 된다. 그리고 수행자로 생을 마감하는 순간 품었던 일을 벌이게 된다. 이것이 왕사성의 비극이다. 제바달다가 알려준 아사세 태자의 탄생 비밀, 후계자를 만들기 위한 피의 서막 왕사성이란 무대에 등장하는 네 명의 주인공(빈비사라왕, 우제희 부인, 아사세 세자, 제바달다) 모두 죄의 경중을 논할 수 없다.

 

내 생에 원수로서 서로 해치는 허물이란 세간의 부모와 자식 사이다. 금생에 있어서 원한의 마음을 일으켜 미워하고 질투하면 다음 세상에서는 큰 원수가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부모와 자식, 형제, 부부, 가족, 일가, 친척 간에는 마땅히 서로 공경하고 사랑해야 하며 미워하고 시기하지 말지니, 있든 없든 서로 도와서 탐하고 아끼지 말며, 말과 얼굴은 항상 부드럽게 하여 서로 다투고 다투지 말아야 한다……. 다음 생에는 더욱더 심해져 원수가 된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인연이 아니다. 왕사성에서 만나는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전생에 심어놓은 인과에 의해 악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빈비사라 왕, 아사세 왕, 위제희 부인 이들은 복수를 다짐한 수행자에 의해 왜곡된 부모,자식으로 만나고 있다. 좋은 인연과 전생의 원한을 갚으려는 악연으로 만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기에 붓다는 이렇게 설법하였다.

 

태어날 때는 혼자이나, 전생에 원한이 있으면 서로 같은 곳에 태어나서 보복하여 마지않으며, 그 악업의 종자가 다하기 전에는 서로 떠날래야 떠날 수도 없느니라

 

처자를 버리고 부모를 모시지 않으며 머리를 자르고 후사를 끊는 불교의 전통수행법이다는 연구자의 의견과 유교에서 주장하는 불교의 특징으로 멸인륜(滅人倫), 무군(無君), 무충(無忠), 무효(無孝)를 근거를 통해 불교가 효와 거리가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는 출가와 재가로 나눠 있으며 재가인들에게는 극락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효를 통한 것을 보고 있다.

붓다는 아미타경을 통해 인간의 법칙과 극락세계에 들어감을 설하고 있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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