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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격 스님 "한때 교회 옥상서 천막치고 포교했어요"
어우러짐과 나눔을 실천하는 남양주 천년고찰 봉선사 주지 초격 스님
기사입력: 2022/06/20 [20:57]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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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러짐과 나눔을 실천하는 남양주 천년고찰 봉선사 주지 초격 스님 

 

봉선사(奉先寺)는 교종본찰(敎宗本刹)로서 대한불교조계종 25교구 본사이다. 969년 법인국사탄문(法印國師 坦文) 스님이 창건하여 운악사(雲岳寺)라고 하였다 그 후 1469(예종 1) 정희왕후(貞熙王后) 윤씨가 광릉(光陵) 세조를 추모하여 89칸으로 중창하고 봉선사라고 하였다. 1551(명종 6)에는 교종(敎宗)의 수사찰(首寺刹)로 지정되어 여기에서 승과시(僧科試)를 치르기도 하고, 전국 승려와 신도에 대한 교학(敎學)진흥의 중추적 기관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여러 번 수축했으나, 19516·25한국전쟁 때 다시 법당과 함께 14150칸의 건물이 소실되었다화엄(華嚴) 스님이 1956년 범종각을, 1961~1963년에 운하당(雲霞堂)을 세우고, 1969년에는 주지 운허(耘虛) 스님이 법당을 중건하고, 1977년에는 월운(月雲) 스님이 영각(靈閣)을 세웠다절 종각에 보존돼 있는 동종(銅鐘)은 조선 전기의 것으로 보물 제397호로 지정돼 있다.

 

초격 스님 "누구든 오고 가며 마음의 안정 찾는 곳그것이 종교의 역할"

 

여기 어디쯤 일터인데?’

201910, 봉선사 제16대 주지 임명장을 받은 서성 초격(逝城 超格) 스님은 경기의 금강으로 불리는 운악산(雲岳山)에 올랐다. 깊은 산 속의 토끼가 너무 맑아 세수는 못하고 입술만 살풋 대고 갔다는 그 옹달샘을 며칠 동안 찾아 나섰지만 허사였다. 옛 기억을 떠올리면 고작해야 큰법당에서 서쪽으로 20여 분 거리의 산기슭에 있을 법한데 눈에 띄지 않았다.

 

물맛이라면 큰법당 옆 샘물이 일품이다. 보기엔 흐릿해도 바가지로 떠보면 아주 맑은 물이다. 지금은 방치돼 있지만 한때 봉선사 대중스님들의 다관(茶罐)을 채웠던 샘이다. 절에 갓 들어온 행자는 이른 아침이면 주전자를 들고 옹달샘으로 달려갔다. ‘역경(譯經) 보살로 칭송받는 월운(月雲, 봉선사 조실) 스님에게 특별한 찻물을 드리기 위해서다.

 

하얀 찻잔에 담긴 연잎 향이 그윽하다. 산속 옹달샘은 찾았을까. “행자 때 본 옹달샘과는 많이 다르더군요. 거의 막혀 있어 다시 쓰기는 어렵겠습니다. 그러나 대웅전 옆의 샘은 복원하려고 합니다.” 유독 샘에 마음을 두는 연유가 궁금했다.

 

정신을 맑게 하는 차는 수행인의 도반입니다. 찻잎이 품고 있는 맛과 향을 올곧이 내려면 좋은 물을 만나야 합니다. 옛 선지식들도 인정했던 천혜의 샘물입니다.”

 

그리 높지 않은 운악산임에도 그 샘물만은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행자 초격의 어머니는 대전 심광사(心侊寺) 신도였다. 매월 초하룻날이 되면 절일 본다고 하루, 이틀 정도는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동네 시장 사람들이 건넨 공양물도 대신 받아 부처님 전에 올렸다고 하니 화주(化主) 보살이었던 듯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엉덩이에 예방주사 한 대 맞았는데 앉거나 걸을 때마다 욱신거렸다. 담임선생님이 진학을 상담해야 하니 어머니를 모시고 오라고 했다. 어머니는 절에 가 있고, 전화기도 없었다. 산으로 뛰어 올라갔다. “엄마, 선생님이 내일 학교 오시래요.” 큰 숨을 몰아쉬며 앉으니 엉덩이가 다시 욱신거렸다. “마음을 놓아서 아픈가? 뛰어 올라올 때는 왜 안 아팠지,” 

▲ 경기 남양주 봉선사 주지 초격 스님   

 

아들의 혼잣말에서 어머니는 무엇을 직감했던 걸까. 아들을 대의 스님에게 데려갔다. 상원사, 마하연, 표훈사, 범어사, 백담사, 망월사, 통도사 백련암, 법주사 복천암, 수덕사 등에서 수십 안거를 성만하면서 조계종 정화불사(淨化佛事)에도 앞장섰던 대의 동원(大義 東元. 19011978) 스님이다조계종 정화불사는1954년 음력 817불법(佛法)에는 대처승(帶妻僧)이 없다는 기치 아래 종단 정화운동이 일어났다.

 

 

처음 본 스님이었지만 그냥 좋았다. 학교에서 수업을 파하면 곧장 절로 가 아궁이에 불도 넣고, 비질도 하며 절 일을 거들었다. 주말이나 방학 때면 아예 절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어머니도 아들을 보려면 절로 와야 했다. “어린이가 미래의 부처님이요 불교의 희망임을 주창했던 대의 스님이 주석한 심광사는 어린이·청소년 포교의 요람으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 또래의 친구들이 유독 많이 찾는 절이라는 점도 소년의 절집 삶을 윤택하게 했다초격 스님은 봉선사 주지로 부임하자마자 큰법당 옆에 자리한 샘을 복원할 계획이었다. 심광사 중등부 불교학생회를 이끈 경험을 살려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대전불교학생회장을 맡아 대작불사도 해냈다. ‘무진장 스님 초청 대법회를 대전 상공회의소에서 봉행한 것이다. 불우이웃돕기 일일찻집을 열면 대성황을 이뤘다. 초격 스님은 물론 대전지역 불자 학생들의 자긍심은 드높았다() 복무를 마치고 심광사를 다시 찾았다. 대의 스님이 없는 절은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부전을 보던 스님이 넌지시 묻는다.  부전은 사찰에서 예불이나 기도 등 의식을 집전하는 역할을 맡은 스님이다.

 

왜 그리 서성이시오.”

출가해서 절에서 살고 싶습니다.”

봉선사에 학덕 높으신 스님이 계십니다. 월운 스님입니다,”

 

1986년 여름, 월운 스님을 찾아 봉선사로 떠났다은사는 문중에서 정하는 법이다. 법명은 월운 스님이 지어 주었지만 은사는 경암 스님과 맺어졌다. ‘스님답게 살면 격()을 뛰어넘는() 대장부가 될 것이고, 스님답지 못하게 살면 격()에 어긋나는 졸장부가 될 것이라는 의미로 초격(超格)’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직계 상좌는 아니었지만 초격 스님에게 쏟는 월운 스님의 정성은 남달랐다. 초격 스님 또한 3년 동안 시봉할 정도로 월운 스님을 존경했다. 스승은 제자를 불교학자로 키워내려고 무던히도 애썼으나, 제자는 출가 전부터 포교 원력을 굳건히 세워 놓았던 터였다. 자신이 정한 길을 가려고 중앙승가대학교(사회복지학과)에 원서를 냈다. 이른 새벽 월운 스님을 찾아뵈었다.“오늘 일이 있어 세간에 다녀오겠습니다.”“그래라.”

 

이른 아침 버스를 타고 중앙승가대로 향했다. 면접실에 들어섰다

아니, 초격. 일 있다고 나간다더니.”

월운 스님이 면접관일 줄은 꿈에라도 예상치 못했다. 옆에 있던 보각 스님이 눈치를 채고는 일렀다너는 이리 와서 면접 봐라. 거기 있으면 혼만 더 난다.”

 

저녁에 월운 스님을 찾아뵈었다. 그리고 대의 스님으로부터 들은 일언을 고했다. ‘아무리 훌륭한 법이 있다고 하지만, 믿고 의지하고 닦는 이가 없으면 그 법은 죽은 것이다. 부처님 법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써라.’ 심광사에 머물 때 이미 가슴 한편에 포교(布敎)’라는 심인(心印)이 찍혔던 것이다.

 

 “네 뜻이 정녕 그러하다면 그리해라. 홍릉에 보살님이 일궈가는 포교당이 하나 있다. 학교는 거기서 다니거라.”

 

통학 편의를 봐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포교에 뜻을 세웠다면 일찌감치 현장에 뛰어들라는 뜻이기도 하다.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오듯 부처님 인연 따라 되돌아온 것일까, 파릇파릇하던 20대 사미승은 30여년 만에 명실상부한 '큰스님'으로 돌아왔다휴대전화 컬러링에 가수 이문세의 '나는 행복한 사람'이 흘러나오는 사람, 천일기도에 묵언(默言)까지 병행하면서 성탄절에는 교회와 성당을 찾아 축하 인사를 하는 승려, 삼성을 상대로 문화재 반환을 이끌어 내며 '문화재 제자리 찾기'운동의 첫불을 지폈던 행동가 초격 스님이다.

 

"봉선사는 젊은 나이에 뛰놀던 곳입니다. 청년의 나이로 큰스님을 시봉했죠. 연꽃이 피고 지는 연못과 그곳의 자라 한 마리까지 곳곳에 추억이 서려 있습니다. 속세로 치자면, 서울로 공부하러 갔다가 나이 들어 고향으로 돌아온 셈인가요, 감회가 새롭습니다.“

▲ 봉선사 회주 밀운 스님(왼쪽)과 주지 초격 스님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 소실돼 여러 차례 중건되기는 했지만, 광릉숲에서 이어지는 고즈넉한 풍광과 잘 어우러진 사찰의 분위기는 천년고찰(969년 창건)의 면모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남양주와 포천 등 경기 북부 지역에 84개 말사를 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봉선사

조선시대 승과시(僧科試)가 치러졌던 곳. 전국의 승려와 신도들을 대상으로 교학(敎學) 진흥의 중추기관 역할을 해온 교종본찰 봉선사(敎宗本刹 奉先寺)’의 주지로 임명돼 20191025일 취임 법회를 가진 초격 스님은 1987년 바로 이곳에서 사미계를 받았을 만큼 봉선사와 인연이 깊다

 

30여년 만에 돌아온 절은 놀랍게 발전했지만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사찰 곳곳이 잘 정비되고 신도와 관광객도 크게 늘었지만,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것처럼 봉선사는 예나 지금이나 대중들에게 여전히 열려 있는 공간이다

 

절에 문화재가 즐비하지만 입장료는 물론 그 흔한 주차비도 받지 않는다.  신도든, 비신도든 점심때 절을 찾은 사람은 누구나 무료로 절밥을 먹을 수 있다. 그렇게 하는 이유를 초격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편하게 찾아와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힐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종교의 역할이자 존재 이유가 아닐까요.“

 

이런 열린 마음은 스님이 각별히 강조하는 '종교간 화합'으로 이어진다초격 스님은 관내 기관장과 정치인들을 만날 때면 그가 비록 불심(佛心)이 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특정 종교를 내세우지 말라고 엄중하게 당부한다지도자가 내 종교만 두둔하고 남의 종교를 멀리하면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스님이 성탄절에 교회와 성당을 찾아 축하하고, 목사와 신부가 부처님오신날에 절에 와서 함께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여야 신도들에게도 그대로 영향을 미쳐 사회 화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초격 스님의 지론이다.

 

나눔에 대한 '()'은 나눔을 실천한 사람의 몫이고, 누군가 그 복을 가로채지 않는다는 게 일반화돼야 기부와 나눔이 선순환된다는 논리였다여기에 '평등공양 차등보시'란 말을 보탰다. 밥은 공평하게 나눠먹고, 베푸는 것은 능력에 따라 차등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자기의 나눔이 투명하게 쓰인다는 믿음이 있으면 나눔은 샘솟듯 계속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스님에게 휴대전화를 걸면 익숙한 대중가요 '그대 사랑하는 나는 행복한 사람, 잊혀질 때 잊혀진대도~' 노래가 흘러나왔다

 

"스님이 남들이 갖는 것을 갖지 못하고, 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고관대작이라고 한들 집을 몇십 채 씩 갖고 있겠어요. 하지만 스님들은 전국 명산 곳곳의 절이 다 내 집이고, 나물 반찬 한 개만 있어도 진수성찬이니 진정한 자유인이고, 모든 걸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그런 연유에서일까. 스님은 봉선사를 '가고 싶은 곳', '가면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절'로 만드는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봉선사가 남양주 노인복지관을 포함해 어린이집, 청소년쉼터, 가정폭력을 겪는 아이들을 위한 보호소 등을 운영하는 것도 함께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스님의 소망과 무관치 않다. 절에 기도하러 간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불 주사'를 맞은 통증도 잊을 만큼 한달음에 산을 올랐다가 불심에 이끌려 아예 절집 생활을 시작한 초등학교 5학년 어린아이. 이제 경기북부의 대표 사찰 주지가 된 초격 스님은 절의 문턱을 낮추고 국민과 종교가 함께 모두 행복해지는 것을 불가에서의 또다른 소명으로 여기는 듯했다.

 

초격스님 “‘평생 수행담보할 승려복지 토대 탄탄히 다져 놓겠다

 

경기도 가평 현등사(懸燈寺) 3층석탑 사리를 30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오게 한 장본인이 초격 스님이다. 현등사 주지 당시 조계종 실행위원장을 맡아 삼성문화재단이 사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현등사 3층석탑 사리구 반환소송을 제기했다.(2005) 삼성문화재단은 사리는 문화재로 본 반면, 초격 스님은 사리는 성보(聖寶)’라고 주장했다조계종이 법원에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패소한 터였지만 스님은 '낮에는 협박, 밤에는 읍소'를 이어가며 결국 삼성의 대승적 결단을 이끌어 냈다. 1년여의 소송이 이어진 가운데 문화재청이 사리는 문화재와 거리가 멀다는 의견을 내며 새로운 국면을 맞았고, 협의 끝에 삼성문화재단이 현등사에 사리를 영구 기증하는 형식으로 매듭지어졌다.(2006) 

 

사리를 향한 신심은 스님이었으니 그 누구보다 충만할 수 있다. 그러나 삼성문화재단을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담대함은 어디서 비롯됐는지 궁금했다. 그 실례(實例)로 초격 스님은 서울 방배동 천막법당과 광명선원에서의 일화 한 토막을 전했다.

 

 

중앙승가대를 다니면서도 포교당 돌보는 것은 물론 정릉도서관 공부방을 위탁받아 운영할 만큼 남다른 행보를 보인 초격 스님에게 월운 스님의 새로운 명이 떨어졌다.

 

방배동에 보살님이 일궈가는 봉선사 포교당이 있다. 가 보거라,”내키지 않았다. 포교당 운영에 관한 한, 자신과 보살의 의견이 너무 다르다는 사실을 홍릉에서 경험했기 때문이다.

 

보살님이 운영하는 포교당에는 왜 자꾸 가라고 하십니까?” “보살님께 머리 숙이는 게 그리 어려워? 포교한다더니 아직 멀었구나.” 

▲ 2019년 10월25일 봉선사 주지 겸 제16대 교구장 서성 초격 스님 취임법회 때에 기념촬영한 모습


방배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포교당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포교를 사업처럼 여기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기에 봉선사 포교당현판을 떼어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신도 소유의 4층 건물 옥상에 천막을 치고 부처님을 모셨습니다.”

 

 목탁 소리가 크게 들리면 주민들이 불편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천막 문을 닫은 채 예불을 모셨다. 절을 하며 거친 숨 한 번 내쉬면 먼지가 한 움큼씩 솟아올랐다. 한여름의 폭염에도 천막 속 기도는 끊이지 않았다. 신도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공양은 제때 하는지, 더위에 쓰러지지는 않았는지. 그렇게 8개월이 흐르는 동안 신도들의 정성이 모아져 광명선원이 개원됐다.(1993) 개원 직후 청년회부터 창립했고, 불교교양대학도 열었다. ‘초격만의 포교첫걸음을 뗀 셈이다. 1995년 천일 관음기도에 들어갔다. ‘기도하다 죽어도 좋다. 이 한 몸 바쳐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겠다는 원력으로 입재한 천일기도였다. 두문불출한 채 하루 8시간 사분정근(하루에 네 번하는 기도로 새벽 4~6, 오전 9시반~12시반, 오후 2~4, 저녁 6시반~8시반 등 8시간 기도함)에 임했고, 오후 2시면 어김없이 1000배를 올렸다. 회향을 앞둔 어느 날,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이 밀려들어 오더니 이내 어떤 형체가 자신에게로 다가왔다. 그 형체가 무엇인지를 확인한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초격 자신이었다. 놀라움은 이내 환희로 승화됐고, 그 자리에서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이 땅에 실현시키자는 원력을 세웠다

 

“‘도로 아미타불을 흔히 물거품정도의 헛된 노력으로 해석하는 데 아닙니다. ‘도로원래의 상태’, ‘이전과 다름없이라는 말이니 원래의 아미타불을 뜻합니다. ‘10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란 10년 동안 수행을 해서 자신이 본래 아미타불임을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 또한 자신 안에 존재합니다. 내 안의 관세음보살을 찾아 확인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봅니다. 타인의 얘기를 많이 들어 주고 살펴 주세요. 그 또한 관세음보살의 마음입니다. 이것만 되어도 나와 상대방 모두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남을 위하는 마음에서 오고, 모든 불행은 이기심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초격 스님은 주지 부임 직후 복지국장을 임명해 봉선사만의 승려복지 청사진을 그려나갔다.<2020819守岩칼럼-스님도 연금 받는다남양주 봉선사 교구 차원 보편적 복지첫발: 참조>

 

봉선사 본말사 재적승(在籍僧)의 인원과 현 상황을 상세히 살피고 있습니다. 국가와 종단으로부터 받는 복지혜택이 무엇인지를 분석하고 그에 따른 대책을 세우고 있습니다. 승가 특유의 전통적 시봉체계를 최대한 되살리겠지만, 수행과 전법에 매진할 수 있는 기본 토대를 다지려 합니다. 나이가 좀 드신 스님이라고 해서 정진 의지가 약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실이신 월운 큰스님은 지금도 틈만 나면 경전을 펼치십니다. 현 시대에서 승려복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이전 주지 스님들의 노력으로 도량 정비는 거의 마친 듯싶습니다. 다만 선원 하나는 새로 지으려고 합니다. 신숙주(申叔舟)가 머물렀다는 암자터를 매입했습니다. 봉선사 곁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중스님들이 동의해 주시면 그 자리에 선원을 건립해 보고자 합니다.”

 

초격 스님이 주지 부임 당시 계획했던 선원 건립이 실행되고 있다. 봉선사는 2021223일 봉선사 전법회관(문화교육센터) ‘금곡선원건립을 발원하고 불사 원만 회향 기원 법회 및 탑돌이를 했다. 새롭게 건립될 금곡선원은 남양주 진접읍 금곡리에 위치하며, 향후 남양주시를 중심으로 경기북부 지역의 포교구심점이자 불교종합센터로 운영될 예정이다. 경기북부 지역의 전법과 포교를 견인하게 된다.

▲ 봉선사 전법회관 ‘금곡선원‘ 조감도. 현대불교신문사    

 

초격 스님이 조계종 제25 교구장으로서의 포부도 '화합'과 맥을 같이 한다.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스님들에게 기본적인 노후대책을 보장하고 싶습니다. 단순히 종교인의 복지를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수행 환경이 보장돼 있지 않은데 어떻게 청빈한 마음으로 사회와 신도들에게 봉사할 수 있겠어요. 열심히 수행해 그 결과를 이웃에게 베풀고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건물을 세울지, 어떤 문화 축제를 기획할지도 중요하지만, 선원에서 수행하는 스님들과 학림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에게 복지기금과 장학금·노후 생활비를 보장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봉선사 조실 월운스님, 매일 컴퓨터 앞에서 한문경 번역세수 94세에도 날마다 역경

 

30여년 전 봉선사 주지 월운 스님의 시자로 살았던 초격 사미는 현재 봉선사 주지이다. 스승은 구순이 훌쩍 넘어 봉선사 조실이 됐고 제자는 종단의 중진이다. “밤에 잠을 잘 주무셔야 허리에도 좋고 컨디션이 좋은데, 우리 스님께서 요즘도 컴퓨터로 한문경전 번역하느라 밤에 시간가는 줄 모르신다며 은사를 걱정하는 초격 스님은 하도 걱정하니까 아예 컴퓨터방 커튼을 쳐놓고 하신다역경(譯經)은 우리 스님의 평생 원력이라고 말했다.젊은 시절 호랑이처럼 엄했던 월운 스님 옆에는 어떤 시자도 반년을 못버텼지만 3년을 시봉한 유일한 제자가 초격 스님이다. 월운 스님이 지어준 초격(超格)이란 이름도 격을 뛰어넘는 출가수행자가 되라는 스승의 경책과 사랑이 깃들어 있다.

 

월운 스님은 점심공양 후 포행(布行)을 하고는 작은 컴퓨터방 책상에 앉아 역경에 집중한다. 차갑고 엄준했던 스님의 모습은 너무나 맑고 깨끗하고 청정했다. 위트 넘치는 농담으로 이따금씩 큰 웃음도 선사했다

▲ 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을 보이는 월운스님  

 

월운 스님은 1950년대 초 부산 범어사에 있었던 육군전몰장병 안치소이야기도 들려줬다. 당시 유엔군사령관과 고위직 정치권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월운 스님에 모두가 놀랐다, 이 자리에서 불교계 가장 시급한 불사는 역경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일화가 있다, 그날 이후로 역경불사 지원금이 나왔던 경사를 스님은 어젯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당시 일화를 소개하면서 ---역경으로 결론을 냈다. “내 소원은 우리 스승님이 간절히 원했던 소원과 같지. 역경은 너나 나나 개인의 원이 아니여. 국가적인 원이요 역사적인 원이라.”  

▲ 세수 구순을 훨씬 넘긴 나이에도 컴퓨터 앞에 앉자 경전 번역을 하고 있는 월운 스님. 초격 스님이 뒤에서 부축해 주고 있다.    

 

월운 스님은 1965년부터 2002년까지 법보종찰 해인사에 소장된 고려대장경을 총 318권의 한글대장경으로 풀어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10여년 간은 개역(改譯)과 전산화에 힘쓰면서 현대불교사상사에 커다란 이정표를 세웠다. 대한민국 문화예술발전 유공자에 대한 문화훈장인 은관문화훈장 서훈자로 선정된 이유다. 당시에도 월운 스님은 은사 스님이 시작하고 거의 다 해놓은 것을 마무리만 했을 뿐인데 내가 전부 다 한 것처럼 돼버렸다며 은사 운허 스님에게 공을 돌렸다.

 

월운 해룡(月雲 海龍)스님은 1929년 경기도 파주 장단 출생으로, 1949년 운허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동국역경원 역경위원(1964), 동국역경원장능엄학림 학장을 역임했다. 중앙승가대 교수를 정년 퇴임헸고현재 봉선사 조실이다.

 

봉선사, 불교대학 최초 월인석보강좌 개설...312일부터 20232월까지 1년 과정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도 함께 다뤄훈민정음 불경 도량봉선사 역사도 조명

 

조계종 제25교구본사 교종본찰 봉선사(주지 초격 스님)가 불교대학에 월인석보정규강좌를 개설했다. 강의는 터키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학과 정진원 교수가 맡았다. ‘조선불교대장경의 효시라 불리는 월인석보강좌가 사찰 불교대학에 개설된 것은 처음이다. 강좌에서는 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도 함께 다룬다.‘훈민정음 불경 도량으로 손꼽히는 봉선사는 월인석보강좌를 통해 봉선사와 관련된 세조와 정희왕후의 역사를 함께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 강좌에서는 2019올해의 불서(佛書)’로 선정된 정진원 터키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학과 교수의 저서 월인석보, 훈민정음에 날개를 달다(조계종출판사)월인석보, 그대 이름은 한글대장경(박이정)를 교재로 삼아 훈민정음과 '월인석보' 이야기를 함께 풀어 니간다.

봉선사는 일반적으로 세조와 정희왕후의 무덤인 광릉의 능침사찰과 수목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세조는 월인석보의 저자이며 정희왕후 또한 봉선사를 중창한 주역이기도 하다. 봉선사는 강좌 개설로 지금까지 조명되지 못했던 이러한 역사적 가치들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로 삼았다.

 

초격 스님은 그동안 조선은 유교 국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조선불교의 역사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조선시대 이래 교종본찰의 위상을 실현하고 있는 봉선사 불교대학에 개설된 월인석보강좌를 계기로 수미산 같은 조선불교의 역사와 문화가 보다 깊이 있게 조명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강좌에서는 조선불교의 역사와 문화를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으로 엮어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월인석보탄생의 주인공인 세종과 왕비 소헌왕후를 시작으로 조선불교의 삼보라 할 수 있는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월인석보의 의미를 되돌아본다. 강의 후반부는 훈민정음 경전의 산실인 봉선사 이야기로 이어진다. 창건부터 한글 탄생의 주역으로 알려진 신미대사의 제자 학열 스님과 학조 스님이 봉선사 주지였다는 역사적 사실과 함께 영화 나랏말싸미의 내용 가운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지도 살펴본다.그밖에도 우리가 몰랐던 인간 세조의 슬픈 뒷이야기와 불교의 우주관과 시간관, 불교식 최초의 인류 탄생, 고타마 붓다의 전생이야기 등 월인석보에서만 만날 수 있는 12부 경전의 내용을 깊이있게 다룬다. 봉선사를 일군 큰 인물들과 한글 역경의 산실이며 미래의 ‘K Classic 콘텐츠중심 사찰의 비전 등도 엿볼 수 있다.

▲ 정진원 교수.    

 

강의를 맡은 정진원 교수는 터키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동국대 세계불교학연구소서울대 규장각고려대 한국학연구소 교수를 역임했다. 2000년부터 해외에서의 한국학 학회 발표와 특강, 외국 학생들과 한국유적지 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석보상절월인석보를 주제로 문학박사를, ‘삼국유사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월인석보, 그대 이름은 한글대장경』 『월인석보, 훈민정음에 날개를 달다』 『삼국유사, 여인과 걷다』 『자장과 선덕여왕의 신라불국토 프로젝트』 『삼국유사, 원효와 춤추다』 『여행하는 인간 놀이하는 인간등이 있다.

 

이번 학기 강의는 비대면과 대면방식으로 함께 진행해 전국의 불자와 비불자는 물론 해외 불자도 수강할 수 있다.

 

봉선사는 일반적으로 세조와 정희왕후의 무덤인 광릉의 능침사찰과 수목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세조는 월인석보의 저자이며 정희왕후 또한 봉선사를 중창한 주역이기도 하다. 봉선사는 이번 강좌 개설로 지금까지 조명되지 못했던 이러한 역사적 가치들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로 삼을 계획이다.

 

초격 스님 법문 작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함 갖는다면 행복은 곁에 있어요

 

우리는 언제나 행복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행복은 어디에서 오고, 누구에게 주어지는 것일까요. 또 행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요. 저는 행복이라는 것은 불러주는 자에게만 온다고 생각합니다. 길을 가다가 누군가가 누구야혹은 누구씨하고 부르면 돌아보게 되고, 다가가게 됩니다. 그런 것처럼 행복하고 싶다면 행복을 찾고, 불러야 합니다. 행복을 찾고 부르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일상에서 작은 것에서 만족하고 언제나 그 자체로 감사하고 고마워하면서 늘 주변에 기쁨을 주는 삶, 그것이 바로 행복을 찾고 부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행복은 저절로 우리 곁에 다가와 있을 것입니다.

 

현대인들, 몸 건강에 극진하면서도 정신건강은 관심 부족몸과 정신의 균형 맞아야 건강한 삶 살 수 있어 

 

요즘 사람들은 유독 건강에 관심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건강을 챙기는 것은 중요한 것이지만 몸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는 것 같습니다. 배고프면 먹여주고, 추우면 따뜻하게 입혀주고, 더우면 시원하게 해주고. 또 어디가 아프면 금방 병원에 가서 진료받고, 약을 먹습니다. 이렇게 몸 건강은 극진히 챙깁니다. 그런데 마음 건강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몸과 더불어 정신건강도 중요한 데 사람들은 여기에 인색합니다.부처님은 정신건강의 중요성에 대해 수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신건강에 대해 투자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고가의 명품을 사서 몸을 치장하는 데 많은 돈을 사용하고, 몸에 좋다는 것은 아낌없이 쓰면서도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돈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니 균형이 깨져서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치장해도 행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의 균형이 잡혀야 건강합니다.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면 균형이 깨져서 결국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몸에 쓰는 경비의 절반만이라도 정신건강에 사용한다면 더 큰 행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 계시는 불자님들은 정신건강을 위해 투자를 많이 하고 계셔서 그런지 얼굴이 맑고 건강해 보입니다.

▲ 봉선사 주지 초격 스님    

 

우리가 절에서 불사를 한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다 보이지 않는 정신건강을 위한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절에서 기도를 하는 것은 사실 남는 장사입니다. 매월 초하루 때만 되면 보통 3일간 기도를 합니다. 3일간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하게 되면 부처님의 가호가 있고, 화엄신중님들이 돌보셔서 적어도 한 달은 평온하게 살아갑니다. 3일 기도를 해서 30일이 평온하니, 이것만큼 남는 장사가 어디에 있습니까?예전에 큰 인기를 끌었던 유행가 가운데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라고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김국환씨의 타타타라는 노래입니다. 대개 노래 제목은 가사에도 나오는 데, ‘타타타라는 노래에는 타타타라는 가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타타가 무슨 의미일까를 늘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그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 노래를 지은 양인자 작사가는 불교적 심성을 가지고 있었던 분인데, 어느 날 인도로 성지 순례를 가게 됐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대화하면서 빨리 빨리를 많이 쓰는 것처럼 인도에 갔더니, 가는 곳마다 타타타’ ‘타타타하는 것입니다. 그 뜻이 궁금해서 알아봤더니 타타타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있는 그대로 그러하다라는 의미였습니다. 그게 변형이 되어서 그래 그거야라는 의미로 관용어처럼 사용되게 된 것이죠. 만나는 사람마다 대화하면서 타타타’ ‘타타타하면서 그래, 그거야” “맞아이런 식으로 긍정적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양 작사가는 이를 착안해서 가사를 짓게 됐고, 그의 남편인 김희갑 작곡가가 곡을 붙여서 나온 노래가 타타타였습니다.가사를 보면 우리의 인생이 담겨 있습니다. 가진 것 없이 알몸으로 태어나서,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그냥 떠나갑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누구인가를 떠올린 것이죠.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또한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이런 의문이 이 노래에 함축돼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태어날 때는 누구나 인연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냥 오고 싶다고 오는 게 아니라 인연으로 오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서 오고 싶어서 온 것은 오직 부처님 밖에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자의로 태어나신 분입니다. 부처가 되어서 도솔천 내원궁에서 내려다보니, 중생들이 자기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 내가 직접 똑같은 인간의 몸을 가지고 태어나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하신 겁니다. 그럼 어디에서 태어나야 하는가를 보다가 인도 카필라국의 정반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그 확신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부처가 되셨습니다. 스님들이 출가해서 어려운 수행자의 길에 들어선 것도 부처님의 그 가르침을 믿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그 확신이 없다면 무슨 연유로 승복을 입었겠습니까. 신도님들 역시 부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그 길을 따라가면 언젠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들도 반드시 부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 시기가 빨리 오느냐, 조금 늦느냐 그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 “포교를 사업처럼 여기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봉선사 주지 초격 스님

  

괴로운 것은 라는 존재, ‘내 것이라는 집착에 얽히고, 분별하기 때문

 

부처님의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일상에서 집착을 버리고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괴로운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라는 존재, ‘내 것이라는 집착에 얽히고,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라고 규정지을 것이 무엇인가요. 하루에도 수십 번 변하는 라는 것에서 진짜 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렇기에 라는 것을 분별하는 것 자체가 공허한 것이지요. 분별심을 버리고 나라는 상을 버리려는 노력들이 바로 수행인 것입니다. 그런 수행을 통해 우리는 정신건강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절에 오셨으니 제가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는 팁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한번 소리를 내어보세요. 누가 옆에서 콕 찌르면 !’하게 되잖아요. ‘라는 소리는 인간이 가장 먼저 배우는 소리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부정적이고 방어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해보세요. ‘오 맞아라는 것처럼 긍정의 의미가 있습니다. 를 소리내어 보면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소리가 하나로 축약되면 이 됩니다.

 

은 불교에서 가장 위대하고 신성한 소리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하라

 

은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했는데 불교에서 가장 위대하고 신성한 소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의 많은 진언의 첫머리가 대부분 으로 시작합니다. ‘속에는 긍정, 부정,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의미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뭔가 두려움이 있거나 슬픔이 있거나, 기쁨이 있을 때도 ~’을 길게 소리를 내면 마음에 안정을 얻고 편안함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에서 나오는 소리의 울림이 주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깊은 단전에서 올라오는 울림의 소리 은 자신과 주변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하게 됩니다. 바쁜 일상이지만 잠시 모든 것을 접어두고 깊은 단전에서 올라오는 마음의 소리 을 꾸준히 하면 몸과 마음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부처님께서는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과 법을 등불로 삼고, 삿된 것에 물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있기에 세상은 존재하는 것이고, 내가 있기에 지리산도, 여기 봉선사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지요. 이런 존재의 의미 속에서 과연 나는 누구인가?’라는 숙제를 풀고 가야 합니다. 다들 각자 살아가는 방법이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을 이 세상에 나왔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이 곧 수행으로, 정진으로 이어지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나라는 것을 찾고, 수행하고 정진하는 게 불자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또 모름지기 불자라면 남들보다도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 자기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변을 돌아보고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이 곧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이겠지요. 옛말에 지족가락(知足可樂)이면 무탐즉우(務貪則憂)’라고 했습니다. 만족할 줄 알면 즐거움이 함께 할 것이요, 탐욕에만 관심을 가지면 근심만 쌓일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작은 것에서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 나보다는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삶. 그것이 이 시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삶을 살 때 행복은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입니다. 지금 생활하시는 것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수암(守岩) 문 윤 홍 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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