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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형식 목사의 창세기 산책●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③

주형식 목사 | 기사입력 2022/06/27 [13:49]
지상설교

주형식 목사의 창세기 산책●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③

지상설교

주형식 목사 | 입력 : 2022/06/27 [13:49]

다윗은 시편 8편에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에 감격하여 이렇게 찬양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8:4)

 

다윗은 창세기 126~27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감동을 받아 이 말씀을 기록하지 않았다 생각됩니다.

 

(1:26-27)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여섯째날 온갖 짐승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작업이 남았는데, 바로 사람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왜 사람을 제일 나중에 만드셨을까요? 귀찮은 일을 제일 마지막으로 미뤄놓으신 것일까요?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모든 환경을 갖춰놓고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에는 창조의 의사, 목적, 모양 등을 밝히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이 점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또한 다른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에는 “~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는 “~하자라는 권유형을 쓰고 있습니다. 다른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에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나와 있지만, 사람을 창조한 다음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심히라는 말을 덧붙여 하나님의 기쁨을 강조하였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는 과정을 설명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형상이라는 단어와 모양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형상은 히브리어로 첼렘“(tselem)인데 신체의 아름다움이나 지적인 모습, 자세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모양을 나타내는 단어 데무트“(demut)영적이나 지적인 것, 또는 도덕적 본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형상“(첼렘)은 구체적인 것을 의미하고, ”모양“(데무트)추상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전인격이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의 영향 아래에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먼저 창조된 어떤 피조물과 다르게 창조되었으며, 오직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닮도록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진화론은 단세포동물로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를 거듭하여 지적인 생명체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에 근거하여 진화론의 이러한 주장을 거부합니다. 인간은 동물이 아닙니다. 인간은 동물과 같은 육체도 가지고 있지만, 성경은 더불어서 하나님의 형상하나님의 모양이 부여된 존재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2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영과 육의 요소가 결합된 존재로 창조하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숨이 단지 흙에 불과한 사람을 진정한 사람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이 사람을 인격적인 존재로, 전인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을 소유한 존재로 만들어준 것입니다. 따라서 126~29절에 하나님의 형상모양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27절에서 다시 한번 흙으로 빚은 인간에게 숨을 불어 넣으셔서 전인적인 존재로 창조된 사람으로 한번 더 강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를 낳으면 자기와 동일하게 생긴 아기를 낳습니다. 아이가 자라가면서 외모나 성격이나 특징이 아빠나 엄마의 어떤 부분을 닮아가는 것을 보는 것은 참 즐겁고 행복한 일입니다. 부모의 형상이 아이에게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형상은 사진이 찍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사진을 찍어놓은 것이 바로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나는 나의 전인적인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얼굴을 보면 아버지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얼굴에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주신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15-17)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위하여 거처를 준비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몇 가지의 의무를 주십니다. 첫번째는 경작하여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예전에 한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출근할 곳 있다면 부러운 일, 아침에 눈뜨고 싶지 않아요.”(2015. 7. 2. 조선일보) 한 몰락한 재벌 회장의 인터뷰 기사입니다.

 

사람이 삶을 사는 행복 중의 하나는 일하는 행복입니다. 안식일이 왜 중요하고 행복합니까? 엿새 동안 힘써 일하기 때문에 안식일이 행복하고 즐거운 것입니다. 엿새 내내 일도 하지 않고 펑펑 논다면 안식일의 그 소중함이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인간이 오랜 세월동안 물어온 질문 가운데 하나는 동물에게도 노동이 있는가?’입니다. 동물에게도 노동이 있을까요? 동물도 수고로운 노동을 합니다. 비버는 댐을 만들기 위해 수고로이 노동을 하고, 연어는 고향을 찾아 산란하기 위해 수고로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개미도 이렇게 거대한 탑을 쌓고, 벌들도 집을 짓는 노동을 합니다. 하지만 많은 인류학자들의 대답은 동물에게 생존을 위한 노동은 존재하지만, 의미를 느끼기 위한 노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에 노동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경작하다의 히브리어는 아바드인데, 이 말은 땀을 흘려 수고하다”, “애써 봉사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덴 동산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며 지내는 그런 곳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경작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수고하고 애를 쓰며 서로에게 봉사하는 삶이 에덴의 주된 삶이었습니다. 흔히들 잘못 성경을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노동을 하는 형벌이 주어졌다는 인식입니다.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 말씀을 단순하게 이해하면 노동이 형벌의 대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인간이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수고로이 일하는 노동을 명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타락 이전에도 노동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타락 이전의 노동과 타락 이후의 노동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것은 즐겁고 행복해야 할 노동이 괴로운 노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과 범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다스리라는 분명한 사명과 함께 그를 에덴에 두시고, 또한 그것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키는 것은 돌보는 일을 가리키지만, 또한 자신의 의지를 유지하는 일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의지의 부분이 유혹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키기 위해서는 무언가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 기준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의무에 있어서 자유의지를 활용할 기회를 하나님께 부여받은 것입니다.

 

두번째 인간의 의무는 음식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에덴을 경작하여 지키라고 명령하신 다음에 주어진 의무는 동산 안에 각종 나무의 모든 열매는 자유롭게 먹되, 다만 한 그루의 나무 열매는 먹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사실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선악과를 만들어서 이렇게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도대체 정체가 무엇일까요? 왜 선악과라고 할까요? 선악과는 그 열매 자체에 어떤 독이 들어 있거나 성분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먹지 말라 그 실과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을 하셨기에 의미가 부여된 것입니다. 그 나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하는 것은 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먹지 않으면 선이 되고, 불순종하여 먹으면 악이 되는 것이기에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이 열매는 인간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존재임을 항상 인식시켜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금지의 명령은 오히려 사람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도록 안내해 주는 것입니다. 금지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금지를 통해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서 사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천연계에도 법칙이 있듯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법칙이 있습니다. 이것이 태초에 인간에게 주어진 선악과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것은 십계명으로 다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악과나 십계명 모두 그 본질은 단순히 지키냐? 지키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전적으로 그분을 의지하고 순종하느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천연계라는 책과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은 둘 다 같은 창조주의 마음을 담고 있으므로 서로 일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방법들과 다른 언어들을 가지고 동일한 위대한 진리를 증거합니다. 과학은 끊임없이 새로운 경이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탐구로 발견되는 것은 그것이 바르게 이해되는 한 거룩한 계시인 성경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천연계의 책과 성경은 서로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창세기 11절을 진실로 믿는 사람이라면 나머지 성경의 어떤 부분이든 다 믿을 수 밖에 없다.”

 

창세기는 처음의 책이면서, 시작의 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삶을 기대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과거의 모습이지만, 현재 우리가 살아가야 할 모습이며, 미래에 우리가 이루어야 할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심으로써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우리 삶은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온 우주의 왕이심을 기억하고, 또한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그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며, 우리와 함께 하심을 기억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형식 목사는 다수의 교회와 교단행정직에서 봉사를 하다가 미국 미시간주에 위치한 Andrews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octor of Ministry)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현재 묵동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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