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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부의 ‘영혼학개론, 그 표준이론㉒자아에 대하여(3)

정영부 | 기사입력 2022/08/12 [09:02]
표준이론의 자아의 발전단계와 자아의 수준

정영부의 ‘영혼학개론, 그 표준이론㉒자아에 대하여(3)

표준이론의 자아의 발전단계와 자아의 수준

정영부 | 입력 : 2022/08/12 [09:02]

이번 호에서는 영혼학 그 표준이론4자아(自我)에 대하여표준이론의 자아의 발전단계와 자아의 수준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자아의 수준이 4단계인 자아

 

정신과 양심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아로서 참자아, 진아, 참나, 진여, 무심, 참마음, 본심, 본각, 여래장, 불성이라고 하며 성인(聖人)의 자아라고 불린다. 이 수준이 되면 은 자아의 방에서 하인들의 거처인 행랑채로 완전히 옮아가서 주인이 지시에 따라,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간다. 영이 집안의 온전한 주인이 되는 것이다. 생활하는 중 깨어 있는 시간의 비율이 51% 이상으로 전혀 혼침(昏沈)하지 않는다. 지구인구의 0.001%10만 명 정도다. 이들은 불교의 수행계위로 따지면 십지1)와 등각(等覺) 수준에 이른다. 불가에서는 이 수준의 혼을 유여열반을 이룬 아라한이라고 한다.2)표준이론에서도 4단계 이상 자아의 혼은 명종 후 100% 혼영이 된다고 본다. 성인, 아라한, 초인이 이들 자아의 사람을 부르는 용어이다.

 

4단계 이상을 살다간 혼들은 명종 후 모두 영이 된다. 최고급 스승과 한 생을 사는 만큼 영계 합격은 당연하다. 그러니 4단계 이상의 혼들은 천국행 보증수표를 가지고 이승에 환생하는 셈이다. 이 단계의 단계 간 자아의 차이는 4단계 미만의 경우처럼 혼의 수준 차이가 아니라 영의 수준 차이에 의한다.3)영과 양심이 자아를 완전히 장악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3단계 현인급 이상의 자아는 중급영에 고급혼의 사람들이라서 그 수준 차이는 영의 수준차이다.

 

4단계 이상 자아의 영들은 중급영 중에서도 상위급이다. 이들은 필요에 의해 지구에 태어난다. 그러면 이런 영들에게 이승이 왜 필요할까? 이는 이승에서의 삶이 고급영들에게 합일을 향한 유력한 공부 방법 중 하나라서 그렇다. 이분들은 이승에 와서 성인(聖人)의 삶을 살며 중생을 제도하고 사람들의 영적 수준을 고양시키는 일을 한다. 물론 이승에 부임하지 않고 혼계에서 스승령 일을 하거나 영계에서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종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단계의 영은 명종 후 어찌 될까? 혼을 영화시키는 한편 성인으로 중생을 제도한 공로가 지대하고 본인 스스로도 부임 전 이미 중급영4)이니 곧 해탈하여 고급영이 되고 이어서 합일을 성취하여 5단계 신인(神人)이 될 것인가? 아니다. 지혼이 태어나 합일에까지 도달하려면 평균 400생이 필요하다. 이중 300생은 혼으로서의 전생이고 나머지 100생은 영으로서의 전생(轉生)이다. 人生은 짧으나 轉生은 길다. 人生은 물거품 같지만 轉生은 한이 없다.

 

자아의 수준이 4.5단계 이상인 자아

 

4.5단계의 자아는 불교로 치면 묘각(妙覺)5)을 얻어 윤회를 그치고 해탈한 영의 자아로 무아(無我)의 자아라고 한다. 영은 고급영으로 보살이며 혼도 300생 이상의 고급혼이다. 이 단계가 되면 4단계 영의 깊숙한 곳에 품은 하느님의 횃불은 이제 5단계의 봉화불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횃불을 봉홧불로 키우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일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영은 혼영이든 신영이든 하느님으로부터 나와 스스로를 진화 발전시키고 성장하여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참여한 뒤 5단계에 이르면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돌아간다. 4.5단계의 자아는 생활하는 중 깨어 있는 시간의 비율이 100%이며 신인(神人)이라고 부른다. 보살님 수준으로 현 인구 중 10명 미만이다.6)이들 중 20% 정도는 혼영 출신일 것이다.

 

5단계 자아는 신과 합일한 자아로 예수님이나 부처님 같은 최고급영들이 화신(化身)하신 것이다. 이런 영들은 하느님의 특별한 역사 없이는 부임하시지 않는다.

 

자아실현과 자아의 단계

 

영이 혼과 몸을 장악하고 삶의 전면에 드러나서 반 이상 깨어 있는 생활을 하는 것을 자아실현이라고 하는데 자아실현은 자아의 단계가 3단계 이상 초자아는 되어야 자아실현의 문턱에 겨우 들고 4단계에 들어야 깨어 있는 시간이 반을 넘어 비로소 자아실현을 완성한다.(4.3.3.2. ‘사랑방 이야기와 같은 생각들’, 4.3.5. ‘참자아의 개념참조) 그러니 자아실현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나아가 신과의 합일이라는 자아초월(自我超越)은 또 얼마나 지난(至難)한 일인가.

 

신지학자 리즈비터는 자아의 실현을 코잘계(준영계)에 거주하는 영적자아()의 의식이 이승의 저급자아(인성, )가 발전해 감에 따라 지상에 현현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표준이론에 다신체론과 다층적저승관 그리고 분할환생의 개념이 더해진 생각이다.7) 

 

자아의 수준(水準)

 

표준이론은 1단계자아를 가진 사람을 표현하기 위해 초생인(初生人)이라는 말을 쓴다. 이는 짐승의 혼인 각혼에서 진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지혼이 된 지금도 주로 동물적 본능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다. 또한 이 수준의 자아는 혼의 하위 부분인 생기체의 지배를 받는 수준이므로 생기체 자아라는 용어로 그 자아의 수준을 표현한다.

 

또한 표준이론은 사람의 정신체를 하위정신체와 상위정신체로 나누고 하위정신체는 감성과 욕망을 담당하는 이유로 프로이트의 구조이론에서 이드를 채용하여 이를 이드체로 부르며 이러한 이드체가 자아를 장악한 수준의 사람 또한 이드이라고 칭하고 그 자아를 이드자아또는 원초자아라 부르는데 1.5~1.6단계의 자아가 여기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한 단계 진화한 혼이 1.8단계로 역시 이드인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지만 욕구와 감정과 지성을 담당하는 상위정신체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므로 프로이트의 에고를 좇아 이를 에고체라고 이름하고 이드인과 에고인을 더하여 이드에고인 또는 필부(匹夫,匹婦)라고 부른다. 또한 2단계 자아에 도달하게 되면 에고가 이드를 극복한 것으로 보아 이를 에고인 또는 가장 일반적인 수준의 자아수준이므로 범부(凡夫)라고 부른다.

 

이후 혼의 정신체의 상위기능인 지성이 자아를 주도하게 되면 2.5단계에 이르고 이 수준의 자아를 가진 사람을 인격자또는 紳士로 부르며 혼의 최고위 부분인 양심체가 자아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여 자아의 수준이 더욱 높아지면 2.75단계의 良心家 또는 君子라고 칭한다.

 

이후 3단계의 자아는 프로이트의 초자아를 달성한 것으로 보며, 이 수준의 사람을 賢人으로 부른다.

 

표준이론에서는 이후 예지기능을 담당하는 상위양심이 자아를 주도하는 수준의 사람을 3.5단계의 자아인 偉人으로 하여 별도로 두었으며 이 수준의 자아는 아직 영이 자아를 완전히 장악한 것은 아니나 그 수준이 영적(靈的)이라 하여 영적자아라고 이름한다.

 

이윽고 영이 자아를 거의 장악하면 소위 자아를 실현한 사람이 되며 이들을 聖人이라고 부르고 그 자아를 참자아라 칭한다. 표준이론에서 자아의 실현이란 자아의 방을 영으로 채우는 것인 동시에 혼이 영으로 진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과의 합일단계인 4.5단계 이상의 자아는 가 자아의 방에서 행랑으로 사라졌으니 無我의 자아라고 하고 합일을 의미하여 神人으로 부른다.

 

자아과 기억 그리고 클론

 

표준이론은 자아의 방 주인이 영일 수도, 혼일 수도 있으며 주인이 정해지더라도 주인과 종 또는 주인과 주인이 항상 같이 있는 혼영일체를 말하고 있다. 또한 혼과 영은 이번 생만 같이할 뿐 명종 후 서로 갈 길을 따로 간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영이 있는 사람의 자아는 사후 반드시 영과 혼으로 분열하게 된다. 결국 현재의 자아는 개체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심각한 주장으로 영혼의 영속성에도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도대체 내가 둘이란 말인가? 그럼 죽은 후 나는 누구란 말이냐. 내 자의식은 영에게로 가느냐 혼에게로 가느냐. 죽어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나를 쳐다본다는 것인가? 우리의 세계는 도플갱어(미주 자아의식의 장애참조)의 세계냐? 도플갱어라 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나이고 다른 나는 대상인데 표준이론은 동시에 나라고 하니 그렇다면 자아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여기에서 표준이론은 자아는 존재가 아니라 방이고 장소다. 도플갱어 같은 이상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명종 후 자아의 방이 비워지면 혼영일체가 풀어지면서 혼과 영은 두 존재가 된다. 다만 둘은 이번 생의 동일한 기억을 가지고 헤어지게 되므로 영화 오블리비언(Oblivion)’의 복제인간(clone)처럼 같은 기억에 다른 자아를 갖는 존재가 둘 생기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물론 기억은 자아가 아니다.(미주 치매에 대하여’, 미주 생각에 대한 생각들 참조) 컴퓨터가 사람과 CPU 없이 메모리만 가지고 작동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기억을 클론에 이식(transportation)한다고 클론이 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클론이 전기적으로 움직이거나 생기체가 달라붙어 생물학적으로 움직여 강시나 좀비가 만들어질 수 있을지 몰라도 그 강시에게 자아()이 스며들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영화 오블리비언의 톰 크루즈처럼 자아가 있는 클론은 있을 수 없다.

 

불교의 無我論과 표준이론의 空我論

 

위 문제는 다른 사람은 다른 형태로 나타난 내 자신이라는 틱낫한 스님의 말씀으로 이해하여도 좋다. 결국 모든 존재는 一元에서 나온 너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편 위 담론은 영이 있는 경우에 대한 것이나 영이 없는 경우에도 비슷한 담론이 가능하다. 즉 혼은 과거 복합혼 시절이 있었거나 현재 복합이기 때문에 누구나 주혼과 종혼이 있고 이 에 문제가 생기면 다중인격이라는 정신병이 나타나고 病的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은 이중인격이니 결국 자아의 방주인은 여럿이라는 주장은 어느 경우나 성립한다.

이러한 고찰은 불교의 無我論과도 연결된다. 불교의 무아는 제행이 無常하니 諸法이 무아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이자면 는 방이니 방 자체는 공한 것이므로 空我라는 공아론(空我論)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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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釋>
 

1) 십지(十地) 

1. 화엄경에서 천명한 52위 중 제41에서 제50까지의 계위다. 

2. 보살은 이 10지위(十地位)에 오르게 될 때 비로소 무루지(無漏智)를 내어 불성(佛性)을 보고, 성자(聖者)가 되어 불지(佛智)를 보존함과 아울러 널리 중생을 지키고 육성하기 때문에 이 수행계위를 지위(地位)의 십성(十聖)’이라 한다. 

3. 또 이들을 지상(地上)의 보살이라 하며, 초지인 환희지(歡喜地)에 오른 보살을 등지(登地)의 보살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이전의 보살을 지전(地前)의 보살이라고 하고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을 지전의 30()이라고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4. 십지는 성문사과의 아나함(阿那含) 수준으로 36도 중 무색계에 가당한 수행수준이다. 따라서 명종하면 준영계의 해당 저승으로 간다. 표준이론의 3.5단계 이상의 자아로 영계에 입성하기 직전의 수승한 자아이다. 

 

2) 아라한 

아라한의 별칭은 다시 이승에 태어나지 않아도 되는 영이라 하여 불생과(不生果)라 한다. 그렇다면 자아의 수준을 태어날 당시 혼의 상태를 기준으로 하던 것을 4단계에서는 명종 후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3) 4단계 이상의 혼 

4단계 영은 上位 중급영, 4.5단계 이상은 모두 고급영이다. 4.5단계는 해탈의 경지는 성취하여 완전히 도피안 하였으나 합일에 이르지는 못한 단계이다. 합일에 걸리는 총 400생 중 300생은 혼으로서의 轉生이고 나머지 100생은 영으로서의 전생이다. 

 

4) 중급영 

그러나 중급영도 아직 이승 부임을 그치고 해탈한 고급영은 아니다. 그들 중 일부는 혼계에서 스승으로 일하거나 이승의 2단계 자아들의 스승령이 되지만 이승에 부임하여 3단계 현인급 이상 자아의 영이 되기도 한다. 

 

5) 묘각 

묘각(妙覺)究竟覺, 無上正等覺 등으로도 표현되며 보살이 수행하는 오십이위(五十二位) 단계 가운데 가장 높은 단계로 온갖 번뇌를 끊어 버린 부처의 경지에 해당한다. 

 

6) 부처님과 예수님 

부처님과 예수님은 자기()중심적 삶에서 초월적 실재() 중심의 삶으로 전환함으로써 자기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분들이다. (길희성, 보살예수, 118)

  

7) 자아의 단계별 성장 방법 

올바른 방향으로 노력해 가고 있는 사람의 경우 자아는 아주 생생하게 의식적(깨어 있는 상태)이 된다. 그는 자신의 껍질을 깨뜨려 활기차고 힘 있는 인생을 살게 된다. 계속 전진해 나아감에 따라 우리는 개인적 의식을 영적자아와 합일시킬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오로지 하나의 의식만을 갖게 될 것이다. 심지어 이 지상에서도 우리는 영적자아의 의식을 소유하여 현상계의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영적자아와 인성 사이에 상당한 대립이 있다. (리드비터, 신지학대의5장 자아와 그 매체들 중에서)

 

8) 믿음에 대하여 

1. 오강남 교수는 그의 저서(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 190) 등에서 믿음의 종류를 미국의 성공회 신학자인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 1942~2015)를 인용하여 구분하였다. (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 190쪽 등 참조) 그는 믿음은 다음 중 네 번째 확신(conviction)으로서의 믿음이어야 하며 삶은 이런 믿음의 추구로 채워져야 한다고 한다. 깨달은 자의 말이 아닐 수 없다.

1) 승인으로서의 믿음(faith as assensus)

남의 말을 정말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남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한 다리 건넌 지식’(second-hand knowledge)이며 현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믿음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후대에 와서야 믿음으로 나타나고 강조되기 시작하다가 근래에 와서는 이것이 믿음인 것처럼 생각되고 있다.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남이 믿으니 믿는 믿음이요 서로를 믿는 믿음이다.

2) 맡김으로서의 믿음(faith as fiduncia)

믿고 맡기는 믿음으로 곤경에 처했을 때 친구를 보고 자네만 믿네할 때의 믿음 같은 것으로 상대방의 신의와 능력을 믿는 것이다. 불안과 초조, 근심과 걱정, 스트레스와 긴장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믿음이다.

3) 믿음직스러움으로서의 믿음(faith as fidelitas)

내가 신과 맺은 관계에서 믿음직스러움, 믿을 만함, 성실함, 충성스러움을 견지한다는 뜻이다. 이 믿음은 신에 대한 교리나 신조에 대해 그렇게 한다는 뜻이 아니어서 신에 대한 생각이나 개념은 시대와 개인의 신앙 성숙도에 따라 바뀔 수 있다.

4) 봄으로서의 믿음(faith as visio)

직관, 통찰, 예지, 깨달음, 깨침, 의식의 변화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일종의 확신(conviction) 같은 것으로 믿음과 깨달음이 일치하는 경지의 믿음이다. 확신 또한 우리 세계를 위험하고 위협적인 것으로 보는 相剋의 확신이 아니라 세상을 아름다운 것, 좋은 것으로 보는 상생(相生)의 확신이어야 한다.

 

2. 칼 융도 봄으로서의 믿음을 이야기한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 너는 항상 생각하려고만 하는구나. 사람은 생각해서는 안 되고 믿어야 해.” 나는 생각했다. ‘아니다. 사람은 체험을 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말로는 나에게 그런 믿음을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고는 체념한 듯 몸을 돌렸다. (칼 융,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87)

 

3. ‘봄으로서의 믿음(확신)’은 표준이론이 말하는 세계관이나 우주관, 가치관 등과 같은 ()으로서의 앎과 같은 것이다. ‘으로서의 앎에 의해 수용된 앎으로써 믿음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봄으로서의 믿음은 다음과 같은 의 속성을 따를 것이다.

1) 은 자아의 수준을 보여 준다.

2) 은 앎을 믿음으로 만들며 믿음은 행동의 전제조건이 된다.

3) 은 쉽게 변화하고 발전하지 않는다.

4) 수승한 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2.3.2. ‘앎과 과 믿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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