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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형식 목사의 창세기 산책⓽가인과 그의 유산(3)

주형식 목사 | 기사입력 2022/09/20 [06:47]
지상설교

주형식 목사의 창세기 산책⓽가인과 그의 유산(3)

지상설교

주형식 목사 | 입력 : 2022/09/20 [06:47]

(4:23,24)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이 말씀을 보면 죄의 급격한 확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벌에 굴복했던데 반해, 라멕은 오히려 의기양양해 합니다. 가인이 보호를 구했던 곳에서 라멕은 두리번거리며 도발행위를 찾습니다. 단순히 상처를 입었다고 소년을 죽이는 포악성을 자랑합니다. 아마도 아들 두발가인을 통해 개발된 날카로운 기계가 아버지에게 살인무기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허세의 기사를 끝으로 가인 가문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종지부를 찍습니다.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에서 라멕의 자기중심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해 라멕은 조금의 용서도 베풀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기적이고 왜곡된 자기사랑은 언제든지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소년을 죽였도다” - 라멕이 죽인 대상은 어른에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여기 소년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옐레드아이”, 또는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싸울 수 없는 나이의 어린 소년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라멕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일과 관련하여 당사자뿐만 아니라 어린아이, 곧 그 아들의 생명까지 잔인하게 빼앗는 포악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3절은 죽였고...죽였도다라는 두 동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말은 시제가 과거시제인데, 동시에 미래시제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과거시제로 볼 때는 나에게 상처를 입혔기에 그를 죽였다라는 말이 되고, 미래시제는 나에게 앞으로도 상처를 주는 자들이 있다면 누구든지 가차없이 죽이겠다라는 선언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인의 살인과 비교해 볼 때 인류의 죄악의 속도와 타락의 깊이가 얼마나 급속도로 악화되는가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잔인한 살인을 아내들에게 뽐내고 있습니다. 나아가 라멕은 어떤 도전과 복수도 자신이 용인하지 않겠다는 강인한 의지를 가인의 예를 들어 선언합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 사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 벌을 칠 배나 더하게 하리라는 것은 가인의 생명을 보호하고자 하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보살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라멕은 하나님의 이 말씀을 자신의 비정한 살인을 적법화시키는데 끌어다 쓰고 있습니다. , 하나님도 살인자인 가인을 위해 일곱배로 갚으시는데, 하물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자들에게 복수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이러한 라멕의 말을 반박하시기 위하여 일흔 번의 일곱 번이라도용서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으로 모든 허물을 덮으라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편 이 말씀은 동생을 처참하게 살인한 가인을 마치 조상들 가운데 최고의 영웅처럼 떠받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가인보다 더 악한 행동을 통해 가인을 능가하는 영웅으로 자신을 과시하려는 듯한 모습도 보여줍니다.

 

우리는 본 연재를 통해 아담과 하와의 인류 최초의 범죄부터 가인의 범죄, 그리고 그 후손의 범죄를 계속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범죄의 역사를 보면서 죄의 어떠한 특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아담의 범죄에서 시작하여 가인의 살인, 그리고 라멕의 잔혹함으로 이어지기까지 죄는 아담 한 사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가인을 비롯한 가인의 후예와 결국 인류 전체를 오염시키는 무서운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4: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아담은 다시 아내와 동침을 합니다. 가인을 통한 구원의 소망이 상실되었을 때 성경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아담과 하와가 얼마나 상심이 크고 고통스러웠을까요? 이제 아담과 하와의 대도 끊어질 위기였습니다. 그들은 무척 실망했지만,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동침하여 을 낳고 다른 씨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낳고 이름을 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름의 뜻은 지명된 자”, 아벨에 대한 보상”, 또는 아벨의 대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셋이라는 이름의 역사는 아벨을 앞선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셋이라는 이름은 내가 둘 것이다”(3:15)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아쉬트(’ashit)에서 파생됐는데, 이는 메시아 예언을 소개하는 곳에서 나타납니다. 셋 족속의 계보를 통해 메시아가 탄생할 자손이 이어질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라는 이름은 창세기 315절의 예언에 기초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425절의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라는 말씀에서 라는 말의 히브리어 제라는 창세기 315절의 여자의 후손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를 통해 장차 사탄의 세력을 깨뜨릴 것에 대한 소망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 죽인이라는 말을 통해 동생을 죽인 가인에 대한 하와의 원망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음을 우리는 어렴풋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아벨 대신에라는 말을 통해 잃은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아픔과 그리움도 읽을 수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을 통해 하와는 연약한 한 여인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큰 고통을 견뎌야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 태어난 은 그녀에게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셋은 가인처럼 분명 부모의 타락한 성질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구속주에 관한 지식과 의에 대한 교훈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하나님을 섬기며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그는 아벨이 살았더라면 행하였을 바로 그 일 즉, 죄인들의 마음을 그들의 창조주를 공경하고 순종하도록 돌이키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세기 4장은 26절의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창세기 4장은 가인과 아벨의 사건으로 시작해서 가인의 가문과 셋의 가문을 대조하면서 마무리합니다.

 

가인의 족보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가인의 족보의 대표자가 오만하고 자신만만한 라멕이었다면, 셋의 족보는 여호와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출발점이 된 에노스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에노스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의 시작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셋의 자손들은 가인의 자손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삶을 유지하였습니다.

 

17절부터 22절을 보시면 가인의 후손들이 세속문화의 발달에 기여합니다. 야발은 목축치는 자였고, 유발은 악기의 조상이며, 두발가인은 기계를 만드는 자가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셋의 후손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의 성경역사에서 두 계열은 계속해서 대조적인 모습으로 충돌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5:21-24)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성경에 나오는 에녹에 관한 기록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더니라는 기록을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300년 동안 동행했습니다. 죄악이 관영하던 당시에 에녹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날마다 신실하고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에녹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300년간 동행한 후에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1:14-15)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유다서 기자는 에녹을 가리켜 예언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에녹은 예언자로서 당시 죄악이 관영한 땅에서 경건치 않은 사람들에게 심판의 기별을 전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에녹은 하나님으로부터 죄악이 관영한 이 땅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기별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에녹이 얼마나 두렵고 놀랐을까요? 예언자 에녹은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별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에녹은 아들을 낳자 그 이름을 므두셀라”,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라는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이름에까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담아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전함으로 세상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심판의 날이 더디오기를 얼마나 열망했을까요? 마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앞두고 아브라함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께 탄원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구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악은 더욱 극심해졌고, 하나님의 심판은 에녹의 증손자 노아 때에 이르러 실현되게 된 것입니다.

 

(5:25-29) “므두셀라는 일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라멕은 일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7:11-12)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위의 두 말씀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므두셀라가 187세에 라멕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홍수가 시작되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모두 더해 보겠습니다. 187 + 182 + 600 = 969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일어난 해는 정확히 므두셀라가 969세가 되던 해였습니다. 그렇다면 므두셀라가 969세로 죽었을 때에, 하나님은 에녹에게 예언하신 바로 그 말씀처럼 죄악이 관영한 이 땅에 대홍수의 심판을 내리신 것입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는 의미 그대로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심판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정말 깜짝 놀랄만한 일입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비밀이 노아홍수를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므두셀라를 왜 그토록 오랫동안 살도록 하셨을까요? 므두셀라의 오랜 수명은 바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보여주는 가장 명확한 증거입니다. 이 땅에 죄악이 너무나 극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실 정도로 죄악이 만연했습니다. 이 땅을 불가불 심판하실 수 밖에 없으셨지만, 즉시로 그렇게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엄중한 심판의 기별을 전하고 회개를 촉구하고자 하셨습니다.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 -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산 사람입니다. 그가 왜 그렇게 오래 살았습니까? 므두셀라의 이토록 긴 수명은 결국 세상을 심판하고 싶지 않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의 방주에 태우고 싶은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녹아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에녹은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창세기 522절에 동행하다라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과 함께 생활했다”, “동고동락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동사는 7가지 형태가 있는데, 동행했다라는 말은 강조재귀형 동사입니다. 그 뜻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그 뒤를 따라 걷게 만들다, 생활하게 하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에녹의 뜻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그가 싫어하는 것이 되었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그가 좋아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예전에 학교에서 도덕시간에 효도의 종류에 대해서 배운 것이 생각납니다. 효도에는 부모님을 극진하게 잘 모시는 것 봉양’(奉養), 부모의 뜻을 잘 헤아려 실천하는 것 양지’(養志), 학문을 닦아 세상에 이름을 떨쳐 부모를 영광되게 하는 것 입신양명’(立身揚名)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효도가 무엇입니까? 도덕시험문제에도 나왔던 기억이 있는데, 바로 양지(養志)입니다. 효도 중에서 으뜸은 부모님의 뜻을 잘 헤아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양지(養志)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양지(養志)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에녹은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이 땅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으로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믿음, 하나님의 뜻을 잘 살피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어떠한 때입니까? 노아의 때와 같이 지금도 이 땅에 죄악이 관영합니다. 이러한 오늘날,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형식 목사는 다수의 교회와 교단행정직에서 봉사를 하다가 미국 미시간주에 위치한 Andrews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octor of Ministry)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현재 묵동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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