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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설교/법정 스님/동안거 해제법문
기사입력: 2010/07/26 [15:46]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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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법문 명설교:법정 스님

- 동안거 해제법문(2009년 2월9일), 길상사 극락전


“가난한 절이 됐으면 좋겠다”


새해 복 많이 받으셨습니까. 수많은 말 중에서도 새해 인사로 복을 받으라고 한 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복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복이 우리를 받쳐주지 않는다면 제대로 살 수가 없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게 된 것도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복이 우리를 받쳐 주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복을 많이 받으라고 하는데 그 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복은 하나님이나 부처님 같은 절대적인 존재가 거저 주는 것은 아니다. 또 선별해서 주는 것도 아니다. 만약 절대적인 존재가 사람을 가려서, 대상을 가려서 복을 주고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편애다. 그렇다면 그는 절대적인 존재일 수 없다. 복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스스로가 지어서 받는다. 따라서 복을 받으려면 먼저 복 받을 행동을 해야 한다. 복 받을 마음씨를 지녀야 한다. 우리들의 순간순간의 삶이 과연 복을 받을 만한가. ‘내가 하는 말과 생각과 행동이 복을 받을 만한가’ 스스로 살펴야 한다. 그런데 혼자서는 복을 짓기가 어렵다. 어떤 대상을 통해서 내가 복을 짓기도 하고 감하기도 한다. 이런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새해 달력을 바꿔 건 지 어느새 한 달 하고도 아흐레가 됐다. 금년의 그 칠분의 일이 이미 지나갔다. 세월 참 덧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지나가는 세월을 두고 옛 사람들은 전광석화와 같다고 비유했다. 즉, 번갯불이나 부싯돌의 불이 번쩍이는 것처럼 몹시 짧은 시간을 이르는 말이다. 이런 표현이 나오게 된 것도 실제로 시간의 덧없음을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저는 지금까지 이런 표현을 관념적으로 건성으로 듣고 그 실체를 실감하지 못했다. 여러분도 거의 시간을 관념적으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제가 지난겨울 눈병을 앓으면서 이 시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 병원에서 안약을 처방해 주면서 한 시간 간격으로 안약을 넣으라고 지시했다. 그 한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아니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술술 빠져나갔다. 마치 모래를 한 움큼 쥐었을 때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이 시간이 그렇게 빠져나갔다.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시간마다 안약을 넣다 보니 하루가 휙 지나갔다. 보통 때는 그렇게 빨리 지나가는 시간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저 관념적으로 시간의 덧없음을 인식해 왔다. 내 몸으로 시간과 부딪쳐 보니까 그렇게 빨리 빠져나갔다. 이런 사실 앞에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내게 남은 시간의 잔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간의 덧없음은 굳이 노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하루 24시간이 주어지고, 그 시간이 쏜살같이 빠져나간다. 순간순간의 삶이 얼마나 엄숙한 것인지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귀중한 시간을 우리는 순간순간 어떻게 맞이하며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깊이깊이 살펴봐야 한다. 우리는 그 시간 속에서 살기도 하고 또한 죽기도 한다. ‘일일일야 만생만사(一日一夜 萬生萬死)’, 하루 낮 하루 밤에도 만 번 나고 만 번 죽는다.

우리는 시간에 살면서 시간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친구를 만나서 서로에게 유익하고 정다운 자리를 이루었다면 시간을 살리는 것이 되고,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남의 흉이나 보면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자리를 가졌다면 그것은 시간을 죽이는 일이 된다. 똑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잘 쓰면 시간을 살리는 것이 되고, 그토록 귀중한 시간도 무가치하게 흘러 보내면 시간을 죽이는 것이 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시간을 살리기 위해서이지 죽이기 위해서는 아니다. 추운 날씨에 절을 찾아온 것도 시간을 살리기 위해 온 것이지 시간을 죽이기 위해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를 만날 때 시간을 살리고 있는지 죽이고 있는지 안으로 살펴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정초부터 연쇄살인사건과 용산참사로 인해 새해 첫머리를 얼룩지게 하고 있다. 이런 끔찍한 뉴스를 되풀이해서 접하다 보면 우리 자신의 일상이 얼룩지게 된다. 이런 현상은 결코 시간을 살리는 일이 못 된다. 끔찍한 소식을 반복해서 보거나 들으면 우리 의식 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남게 된다. 잠재의식을 형성하게 된다. 우리는 보고 듣는 것을 가릴 수 있어야 한다. 선별해야 한다.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볼 것 보고 보지 않을 것은 보지 않아야 한다. 들을 소리도 가려서 들어야 하고, 책도 가려서 읽어야 한다. 말도 가려서 해야 한다. 그래야 덧없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보다 유익한 쪽으로 쓸 수 있다. 어둡고 끔찍한 소식 대신 밝고 아름답고 착한 소식을 접하게 되면 우리들 심성이 그만큼 밝고 아름답고 착하게 된다.

올 한 해 이 시간의 덧없음을 화두 삼아 복된 순간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 다 같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자.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고 보다 알차게 살도록 다 같이 정진하자.

오늘이 맺은 것을 푸는 해제일이라 한 가지 곁들이겠다. 평소에 마음에 두고 있던 생각을 풀어버리려고 한다. 이곳에 처음 절이 만들어질 때는 여러 가지로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그동안 여러 불자들의 신심어린 정성과 주지 스님을 비롯하여 절을 운영하는 소임자들의 피나는 노고의 덕으로 오늘날과 같은 번듯한 도량이 되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이 절을 처음 만들고 창건법회를 할 때 ‘가난한 절이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너무 절들이, 교회가 흥청망청하기 때문에 보다 좀 조촐한 절이 됐으면 싶어서 가난한 절을 표방했다. 그런데 이제는 누가 봐도 가난한 절은 결코 아니다. 넘치기 직전에 이르렀다. 내가 보기에. 자칫하면 넘치게 된다.

제가 이 자리에서 법문을 하고 나면 그 끝에 으레 불사를 내세워서 돈 이야기를 꺼내는데 그때마다 저는 몹시 곤혹스럽다. 절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부득이 사람이 많이 모였을 때 불사의 내용을 알리지 않을 수 없다. 다른 기회가 없으니까. 그러나 그 방법을 달리 해야 한다. 길상사 경우 달마다 나오는 소식지가 있고, 일주문 쪽의 게시판에 실으면 된다. 그러면 신성한 법회를 돈 이야기로 먹칠하지 않을 수 있다. 한 놈은 돈 이야기를 꺼내서 신도들에게 부담을 주지 말라고 하는데, 다른 한 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하니, 두 놈이 미리 짜고 하는 수작 같아서 듣는 쪽에서는 부담과 불쾌감을 동시에 지니게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신도도 있다. 모처럼 절에 와서 그동안 쌓인 짐을 부리고 가고 싶은데 도리어 짐을 지고 가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법회는 말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법다운 모임이 돼야 한다. 그날 들은 법문의 내용을 차분히 음미하면서 마음에 담아둬야 한다. 그런데 법문 끝에 바로 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법회와 법문에 대한 일종의 모독이다. 이런 일은 이 절 뿐이 아니다. 어느 절이나 교회 할 것 없이 상식화되고 일상화 되어 있다. 인습화되어 있다. 이건 반드시 시정돼야 한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워 못살겠다고 아우성치고 있다. 경제를 살리겠다고 나선 사람들도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고 있다. 직장에서 쫓겨나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 부지기수다. 세상이 어려울 때는 절이나 교회도 어려움을 함께 나눠가져야 한다. 세상이 어려운데 절이나 교회에서 떵떵거리고 있다면 그건 절도 교회도 아니다. 세상이 나아질 때까지 적어도 이 도량에서는 불사가 중단돼야 한다. 종에 금이 갔더라도 소리를 낼 수 있으면 종으로서 기능을 할 수 있다. 종소리가 좋고 굵고 따지기 전에 종소리에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는가, 담겨있지 않은가 이게 문제다. 종을 치는 사람이 그 종을 통해서 간절한 염원을 담는다면 그 염원이 듣는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제 나이도 있고, 건강도 그 전만 못해서 이런 자리에도 앞으로 자주 나오지 못할 것 같아서 그동안 마음에 고인 말을 오늘 쏟아놓았다. 제가 한 말을 고깝거나 서운하게 듣지 말고 또 다른 법문으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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