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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스님(경국사 주지․ 철학박사)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3/10/05 [17:52]
‘’종교와 믿음보다 신뢰가 중요 신뢰할 수 있는 종교인이 돼야“

정산 스님(경국사 주지․ 철학박사)

‘’종교와 믿음보다 신뢰가 중요 신뢰할 수 있는 종교인이 돼야“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3/10/05 [17:52]

정산 스님(경국사 주지․ 철학박사)
 
대담: 이옥용(인터넷 매일종교신문 ․ 범종교신문 발행인)
진행 및 사회: 장정태(본지 논설위원․ 삼국유사문화원장)
일시 및 장소: 9월 27일 정릉 경국사

사진=황광현 사진전문기자
 
‘’종교와 믿음보다 신뢰가 중요, 신뢰할 수 있는 종교인이 돼야“
-병 없으면 의사 필요없듯, 고통없으면 종교 필요없다

 

▲ 정산 스님     © 황광현 기자

 
불교계가 10월 11일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한창 어수선할 때인 9월 27일 오후, 1325년(고려 충숙왕 12) 창건된 700년 고찰 정릉 경국사의 정산(定山) 스님을 찾았다. 번잡한 북한산 등반로에 위치해 있지만 잠깐 비켜 들어간 사찰은 별천지였다.
 
고요하고 아늑했으며 쾌적했다. 도덕성과 권력싸움으로 점철된 듯한 선거판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정산 스님이 건네 준 명함도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의 것이었으며 속명 원영만(元永晩)이 ‘定山’을 괄호로 하고 적혀 있었다. 직함은 ‘연구전임’.
 
36년전 해인사에서 지관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한 스님이 아직 젊어 보인다고 하자 ‘생일밥을 안 먹어서 그렇다"는 농담으로 답했다. '불교신문 주간' 경험은 어떠했냐는 말에는 ’야간보다 주간이 낫다‘고 하는 등 대담 내내 유머를 잃지 않았으며 거침이 없었다. ‘깐깐한 학승(學僧)’이란 선입견이 사라졌다. 그러고보니 그의 얼굴엔 부드러움과 여유가 잔뜩 묻어 있었다. ‘이판사판(理判事判)’으로 몰입하고 투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1600여년 전인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에 한국에 전파된 이래 한국불교문화는 이렇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통 선거전에 휩싸여 불교가 세간의 걱정거리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는 무관하게 더 많은 사찰과 스님들이 조용히 대중들에게 불심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어느 세상, 어느 시절이나 분란과 소용돌이가 있기 마련이며 불교의 긴 역사와 그 시대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반복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꾸준히 대중의 고통을 감싸주는 역할은 면면히 이어져왔다.
 
▲ 정산 스님(사진 오른쪽)과 대담을 나누는 이옥용 발행인(가운데)과 사회를 보는 장정태 박사.     © 황광현 기자
 
“종교의 역할은 예방(豫防),
힘들 때 미리 찾는 곳”

 
“종교는 마음의 병을 고치는 역할을 합니다. 중생이 고통이 없다면 종교가 필요없어요. 병이 없으면 의사가 필요없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스님은 종교의 역할에 대한 대답을 쉽고도 명확히 했다.
 
“절에 초와 향, 쌀과 돈을 갖고 오는 것은 마음 속 고통을 치유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교리는 잘 모르지만 괴롭고 힘들 때 찾아와서 위로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종교의 역할을 다 하는 것 아니겠냐는 것이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게 될 때 종교를 찾아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다면 훌륭한 종교라는 것이다. 등산길에 등산복 차림으로 절에 들러 합장하며 마음을 편히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절과 불교의 사명이라고 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미국에 있을 때 만난 기독교인이 스스로 기독교인을 자처하면서도 태어날 때와 죽을 때, 그리고 결혼식 참석 때와 마음의 갈등이 생기면 교회를 찾는다고 하더군요. 언제 교리를 공부하겠냐고 묻자 기회되면 하겠다고 해요. 착하게 살면 좋은 거 아니겠냐면서요.”
그는 그러한 기독교인의 마음자세를 높이 샀다. ‘불교적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경찰이 죄인을 잡아들이고, 검찰이 기소하고, 사법부가 시비를 가린다면 종교는 죄를 예방하는 일을 합니다.”
형사사법연구회의 연구원이며 교도소에서 교화를 하기도 하는 그는 온갖 범죄의 근원적 해결방법으로 예방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경찰, 검사, 판사 앞에 서는 사람들에게 “진작에 마음을 제대로 가져야 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종교가 그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고통으로 인해 범죄를 저지르기 마련인데 그 고통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 종교라는 것이다.
 
경국사에서는 성북경찰서와 함께 한두달에 한번 청소년을 대상으로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힐링 템플(Healing Temple)'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경내산책과 법문, 그리고 “Who am I”를 생각하는 명상시간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게 한다고 한다. 범죄예방을 위한 사회적 참여에 종교가 동참하는 것이다.
 
그는 종교인 같지 않게, 더욱이 선문답을 떠올리게 하는 스님답지 않게 현실적, 실질적이었다. 그래서 더욱 거침없이 보였고 신뢰감이 생겼다.
 
죄의 문제에 대한 대담을 나누면서 ‘사탄, 마귀, 악귀’ 등의 종교적 용어를 꺼내자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범죄의 분석과 대응방안을 이야기했다. ‘사탄, 마귀, 악귀에 씌었다’는 말조차 허무맹랑한 미신으로 부정하는 듯 했다.
 
“가정교육이 그르면 예방이 안 되는 겁니다. 성장기가 불안하거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사랑을 주지 못하고 비뚤어지지요.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베풀 줄 알고 표리가 부동하지 않아요. 스님들 세상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 그런 모습을 보게 되죠. 기본교육이 안된 스님은 아무리 수행해도 이기적이고 속 좁은 행실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스님은 ‘사랑은 신뢰’, ‘종교는 믿음’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종교와 믿음보다 신뢰가 중요하다’고 했다.
 
“마음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형성되고, 습관이 업(業)이 되는 것이며 이로써 팔자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는 예의 종교인처럼 사람의 운명이 신의 섭리나 사주팔자, 관상 등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 환경과 교육에 의해 형성된 마음과 습관, 성격에서 이루어진다는 과학적, 현실적 해석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종교인’이 가장 중요하다고 설했다. 수행자 아닌 철학자의 자세로 보였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베풀 줄 안다.”
 

그는 은사 스님인 32대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한없이 신뢰한다.
 
그는 “지관 스님은 불자로서의 삶의 지표는 인간이 기본되는 것이라고 가르쳤고 인간이 기본된다는 것은 나태하지 않고 항상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라고 했다. 또한 "단순히 학문적으로 공부하는 학승(學僧)으로 알려졌지만, 남다른 수행, 근면함, 부지런함을 모두 갖추고 살아온 분"이라며 기리고 있다.(지관 스님 추모비 건립 발원문 참조)
 
그러나 그가 은사 스님을 신뢰하는 것은 무엇보다 인간적인 기본적인 모습이랄 수 있다.
그는 우선 “지관 스님은 중학교 1학년 때 출가하셨지만 가정교육을 잘 받으셨다”고 전제했다.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을 나눌 수 있었고 때론 가차없이 엄하기도 했지만 표리가 부동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내가 군대에 입대해 팀 스피리트 훈련(한ㆍ미 합동군사훈련)을 할 때 부대 옆 다방으로 소액환을 보내 주셔 부대원들과 막걸리 회식을 하게 하신 것을 잊을 수 없다.”
 
스님은 “그러한 정 때문에 스님 입적 후 힘들었고 꿈에서도 자주 뵜다”고 했다.
그는 지관 스님의 “종단에서나 사회적으로 권력 내지 명예에 경쟁적으로 사는 것을 가까이하지 말라”는 말씀을 늘 가슴에 담고 있다.
 
그러나 막상 지관 스님이 총무원장 선거에 나섰을 때는 3주간 밤을 새가며 상좌 스님으로서의 선거운동에 최선을 다했다.
 
“당시 31대 법장 총무원장께서 급작스럽게 입적하시고 지관 스님이 동국대 총장을 비롯한 학승, 종교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신 분이라 자연스럽게 총무원장 추대의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그러나 선거 상대가 나타나니 역시 선거는 선거이고, 현실은 현실이더군요.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거에요.”
 
‘이권과 패거리’의 선거싸움이라 멀리하고 몰아 부치기보다는 상대와 부닥쳐보는 것이 현명한 현실대응이었다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래서인지 ‘이판사판’ 다툼이라던가 교리 연구파 이판승과 절의 행정을 맡는 사판승의 구별을 인정하지 않았다. 모두 다 자연스런 인간과 종교계 세상으로 보고 있는 듯했다.
스님은 자본주의에 편승해가는 종교의 현실과 안타까움도 그대로 인정하고 있었다.
 
“돈으로 사람 구실, 선배 구실, 종교인 구실의 척도가 됩니다. 돈이 있어야 좋은 일, 봉사활동도 하죠. 커다란 돈은 아예 포기하면 돼요. 큰 돈 없다고 무시당하지는 않습니다. 작은 돈으로 제 구실을 못할 때 아쉽습니다.”
 
스님은 “종교와 돈의 아이러니한 관계를 어떻게 해결하냐”고 묻자 “안 나갑니다.”라고 했다. 솔직했다. 직설적인 대답이 농담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었고 현답(賢答)이었다.
 
스님의 스스럼없는 태도와 발언은 그의 박사학위 과정에서도 나왔다.
“나도 할 수 있는데…”하며 들어간 동국대 박사과정서 그가 쓴 논문은 ‘고려시대 승관제 연구’였다. 무슨 큰 뜻이 있었는가 해서 질문했더니 “가장 간단하고 쉽게 쓸 논문이 뭔가?”였다는 즉답이 돌아왔다.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적인 선택을 기반으로 점점 외연을 확대해가는 현실도 되고 있다. 고려시대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3국시대와 통일시대까지 다루게 되며 한반도에서 벗어나 중앙아시아, 서역, 인도까지 넓혀가게 되는 것이다. 돈황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법현과 석가모니의 발자취를 섭렵할 수 밖에 없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드러난 ‘불교와 민속종교와의 융합’ 과정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불교문화의 뿌리를 찾는 여정이다.
 
스님이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전임으로서 책임을 맡고 있는 ‘실크로드문화와 한국불교문화’ 국제학술회의 공동사업도 그 일환이다.
 
실크로드로의 문화 전파과정 연구는 불교문화의 이동경로와 우리 민족문화의 기원을 찾는 것으로 미술사적 접근을 넘어 역사학적 접근을 새로 시도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또한 서역지역의 연구단체와 공공연구를 통해 ‘왕오천축국전’의 소실부분을 복원하고 한국불교문화의 원형을 재점검하는 계기가 된다.
이 공동연구사업은 2022년까지 10년동안 진행된다.
 
스님의 이러한 활동은 지관 스님 뿐만 아니라 속가 부친의 영향도 크다. 그는 부친이 임종 전까지 누누이 하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
 
“출세, 명예, 돈은 스님과는 거리가 멀다. 스님으로서 잘 살아가기 바란다.”는 간곡한 부탁이자 유언이었다.
 
그는 “기왕에 스승의 뒤를 이어 총무원장을 하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에 “나는 종단을 대표할 의지와 비전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했다.
 
▲ 인터뷰 후 극락보전 앞에서의 기념 촬영. 경국사는 특이하게 대웅전 대신 극락보전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그 오른편에 명부전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황광현 기자


“'I love me'가
갈등과 業을 해소시킨다”

 

스님은 “냉정하게 봐서 차라리 종교가 없었더라면…”하는 생각도 했었다고 했다.
 
지역과 계층 갈등처럼 종교 때문에 갈등이 생겨난다. 가정과 사회, 그리고 종교간 갈등이 증폭되는 것에 종교 자체가 관여하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종교가 말그대로 ‘으뜸의 가르침’ 역할을 못하고,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기는 커녕 마음의 고통을 키우며 갈등을 부추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종교간 경쟁과 ‘내 종교만이 길이다’라는 편협함이 사회의 갈등을 조장하며 ‘사회의 등불’ 역할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보았다.
 
각 종교 군종장교가 선교와 포교를 하다보면 ‘떡이 쵸코파이로, 쵸코파이가 햄버거로, 햄버거가 통닭과 피자로’ 선물공세가 이어지는데 이는 종교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고 했다. ‘1,000원 미만으로 조율하며 경쟁을 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미워하지 않을 대상을 미워하는 것에서 갈등이 생긴다”고 했다. 고부 간의 갈등이 그것이고 종교간 갈등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종교가 미워하지 말아야 할 타종교를 미워하니까 갈등이 생긴다.
 
스님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선 ‘I love me’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했다. ‘I love me'하면 ’I love you‘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운동하면 건강이 따라오듯 나와 내 종교를 사랑하면 남과 타 종교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면 마음의 고통이 사라지며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일으키는 범죄도 사라진다. 업(業)도 해소시킨다.
 
그는 자기 종교 때문에 타 종교를 폄훼하고 피해를 보게 하는 것은 진정한 자기사랑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한 종교적 갈등을 참느라고 마음의 병이 생기는 것도 마음의 병과 고통을 치유하는 진정한 종교의 모습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세상사람과 모든 종교에 ‘I love me’를 설파하고 있었다.
 
<가산당 지관대종사 추모비 건립 발원문>
 

▲ 20여년전 종로에 있었던 허바허바사장에서 찍은 기념사진. 정산 스님이 애지중지해 벽면에 걸어 놓았다. 앞줄 가운데가 지관 스님, 중간줄 왼쪽이 정산스님.     © 매일종교신문


은사이신 가산당 지관대종사를 모시고 경국사에 온 인연이 30여 성상을 지났습니다. 1979년 5월 14일 은사스님의 부름을 받고, 경국사에서 지내다가 개인적인 여러 인연 덕에 해인사에서 수행자로서 삶의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중간에 간간히 스님을 곁에서 모신 경우도 있었고, 멀리서 스님을 생각하며 지내온 시간도 있었습니다만, 2006년 11월부터 경국사 주지 소임으로 지내온 7년간의 세월은 수행에 매진하는 출가자의 인연을 넘어 은상좌간의 애틋한 시간이었음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경국사에서 소임을 보는 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30여년전 스님을 모시고 경국사에 오게 된 인연을 지중히 생각해 도량 면모를 일신하고자 했던 관음전 복원 불사와 도량 정비 불사는 제가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부분입니다.
 
그러나 모든 불사가 마무리되기 전인 2012년 1월 2일 저의 신심과 노력이 부족한 탓에 스님께서는 영원한 적멸에 들어가시고 말았습니다.
 
다시 한번, 고등학교 재학시절 당신 곁에 와서 공부하겠다고 다짐하며 찾아뵐 때를 생각하면 목이 메이고 가슴이 저려 옵니다. 아울러 도량 정비 불사를 완성하고 그 성취를 은사 스님께 자랑스럽게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스님께서는 기다려주시지 않고 사바 인연을 끊고 떠나가셨음이 비탄스럽습니다. 지금도 무우정사를 청소하며 스님의 진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 ‘스님 너무 빨리 가셨습니다. 잘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라는 생각이 맴돕니다. 더 이상 은사 스님께 해 들리 것이 없습니다.
 
외국에 가셨다가 밤늦게 돌어오실 때면 극락교 외등 밑에서 스님을 기다리던 때가 저에겐 커다란 행복이었습니다.
 
이제 상좌이자 경국사 주지로서 잘 모시지 못한 죄스러움을 부도와 추모비 건립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저와 같이 큰 스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는 분들의 정성과 신심을 모아 가산당 지관대종사 부도와 추모비를 건립하고자 발원하오며 인연 있는 분들의 동참을 권해 드립니다.
 
열반에 드신 스님을 앙모하며
경국사 주지 정산 화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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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mryel 2013/12/05 [15:48] 수정 | 삭제
  • 참으로 귀하신 대담 잘읽었습니다. I love me 잘 새기겠습니다.
  • 법연 2013/10/15 [13:28] 수정 | 삭제
  • 정산스님의 맑은 영혼의 소리는 저자거리에 큰 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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