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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원고 100매로 재정립해보는 단군신화의 異論
삼국유사, 실록 등 고서와 남북한의 연구서, 기독교의 입장 등 정리 
기사입력: 2013/12/17 [12:39]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장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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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관광부 표준영정 전시실의 단군 영정.     ©

국조(國祖)로 받드는 단군은 최초의 임금으로 기원전 2333년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조선(檀君朝鮮)을 개국 하였다. 단군신화(檀君神話)는 『삼국유사(三國遺事)』「기이편(紀異篇)」고조선조(古朝鮮條)와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 권남의 『응제시주(應制詩註)』등에 그 기록이 보이고 있다.


단순한 창작물 아닌 건국을 신화형식으로 기록 
단군은 약 2천세는 여러왕의 세습적 통치


현존 최초의 기록인 『삼국유사(三國遺事)』「기이편(紀異篇)」에 의하면 고기 (古記)에 이렇게 전한다.


옛날에 환인(桓因)(하늘. 하느님) -제석(帝釋)을 이름-의 서자(庶子-맏아들을 제외한 둘째 이하의 아들) 환웅(桓雄)이 항상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바랐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三危太白)을 내려다 보니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만했다(우리 나라의 건국 이념인 홍익 인간). 이에 천부인(天符印-신권(神權)을 상징하는 부적과 도장)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그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지금의 묘향산)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서 이곳을 신시(神市)라 불렀다. 이 분을 환웅천왕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신화의 배경이 농경 사회임을 알 수 있음) 곡식,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고, 인간의 삼백 예순 가지나 되는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계를 다스려 교화시켰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늘 신웅(神雄- 환웅)에게 사람되기를 빌었다. 때마침 신(神-환웅)이 신령한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
곰과 범은 이것을 받아서 먹었다. 곰은 몸을 삼간 지 21일(삼칠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능히 삼가지 못했으므로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그와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항상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 배기를 축원했다. 환웅은 이에 임시로 변하여 그와 결혼해 주었더니(천상과 지상의 결합), 그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단군 왕검이라 하였다.


단군은 요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인 경인년(요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이니 50년은 정사이지 경인은 아니다. 아마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 같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또다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아침 해가 비치는 곳)로 옮겼다. 그곳을 궁(弓)-혹은 방(方) -홀산(忽山), 또는 금미달(今미達)이라 한다. 그는 1천5백 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후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1천 9백 8세였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은 인간생명이 1백세를 넘기 어려움을 예로들어 신화적 내용으로 보았다. 그러나 단군을 통치자의 지위명으로 본다면 단군은 약 2천세에 이르는 동안 여러왕이 세습적으로 통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편찬이 단순한 창작물로 단군의 이야기가 아니라 상고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전해 내려온 건국신화를 『삼국유사』에 신화형식으로 기록하여 전하는 것이다. 기록당시 몽고의 침략으로 천손(天孫)을 자부하는 민족주체의식으로 변하며 역사상 외적의 침략에 항거하는 정신적 지주가 된 것이다. 이것을 통해 민족적인 의의를 엿볼 수 있다.
 
쑥과 마늘만으로 연명하는 것은
소녀에서 여인으로 변하는 제2의 성징현상


천부인(天符印) 세 개의 물건은 무구의 일종으로 거울, 무고, 무부, 가면, 모자, 방울, 목제(혹은 철제)의 마장으로 정령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것이다. `
이 개국설화의 해석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논의가 구구하나 일차적으로 환인의 아들 환웅은 서자라는 말은 정실부인의 아들이 아닌 부인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란 식의 해석도 가능하게 하고 있다.


환웅은 신수 아래로 하늘에서 내려왔을 뿐 만 아니라 사람으로 변한 곰은 신단수 아래에서 태기 있기를 빌었다. 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도 노거수(老巨樹) 밑이며 또 웅녀가 잉태하기를 기원한 장소도 노거수(老巨樹) 밑이다. 노거수(老巨樹)가 우연히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마을 입구에는 노거수(老巨樹=당산나무)가 있어 마을 구성원들의 안녕을 비는 신앙의 대상과 같다. 신과 교통할 수 있으며 사람이 소원을 빌면 들어줄 것이란 믿음은 지금도 자식이 없는 여인들이 아들 낳기를 비는 산속(産俗)이 전승되고 있으며 명절 때 또는 길일을 잡고 제사지내는 것도 단군의 강림신앙에 한 흔적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의 점집 가운데 긴 댓가지에 태극기를 비롯 다양한 상징물을 내건다 이것은 과거 소도의 영역을 알리는 수단이었다면 현대에서는 하늘의 기운이 내려오는 통로로 이용되기도 한다. 결국 산은 하늘(천상)과 땅을 연결해주는 통로이다. 그러나 환웅은 우주산(태백산) 산정에 위치한 우주수(신단수)를 통애 지상에 내려왔다. 이것은 민속신앙에서 하강과 다르며 우주산과 우주수가 상호 결합하여 환웅이 이용한 세계축의 의리를 훨씬 강화하고 있다.
 
고조선(古朝鮮)의 어느 한 부족국가의 시조 설화였던 것이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특히 고려시대에 이르러 민족적인 통일과업이 추진됨에 따라 민족의 공동 조상으로 등장하여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의 시조로 숭상된다는 설이 일반적인 주장이다.  하늘의 아들과 인간의 결혼은 하늘과 땅과의 신성한 결합을 제의적(祭儀的)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하늘을 상징하는 환웅과 땅을 상징하는 웅녀와의 결혼은 하늘과 땅의 신성한 결합을 의미하며, 모든 인간 결혼의 원형(原型)을 제공한다.


신성결혼은 그 결과로서 인간세상에 다산(多産)과 풍요와 행복을 가져다 준다.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인간은 혁거세왕와 알령(閼英)의 결혼(신라) 김수로와 허황옥(許黃玉)의 결혼(가야), 해모수(解慕漱)와 유화(柳花)의 결혼(고구려)에서 환웅과 웅녀와의 신성결혼을 반복케 한다. 「제왕웅기」에 나타나는 단수신(檀樹神)과 환웅의 딸과의 결혼도 근본적으로 신성결혼을 의미한다.


환인의 재가를 얻어 환웅은 무리 3천명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아래 내려와 신시(神市)를 건설하였다. 신단수(神檀樹) 아래에는 이들 일행이 내려오기 전부터 사람이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익을 주기위해 내려왔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원주민에게 다가가는 한 방편의 언어다. ‘널리 너희들을 이롭게 하겠다’ 평화로운 집단에 선진문화를 가진 이방인의 등장은 공포스러움 그 자체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3천의 무리와 함께 지배자가 널리 이익을 주기 위해서왔다는 것은 모순이다. 이런 모순은 금세 자신들이 이땅에 온 이유를 말하고 있다. 풍백·우사·질병·형벌·선악을 주관한다는 통치수단에서 그 속내가 드러난 것이다. 철저하게 다스림을 위해 왔다고 말하는 것이다.


곰과 호랑이에게 28일 동안 쑥과 마늘만으로 연명할 것을 권하는 것은 소녀에서 여인으로 변하는 제2의 성징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소녀들이 성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을 환웅에게 묻고 있다. 환웅은 이들에게 성년이 될 수 있는 방법으로 햇빛을 100일간 보지 않을 것을 알려주고 있다. 금욕적인 방법으로 쑥과 마늘만을 식용할 것을 명하고 있다. 곰,호랑이 모두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음식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 음식이 초경을 겪고 쑥과 마늘의 기운에 의지해 몸(김열규, 『한국신화, 그 매혹의 스토리텔링』, 한울, p.196.) 을 맑게하는 음식으로는 권하고 있다. 여기서 또하나 28일이란 수는 새 생명이 탄생했을 때 28일 동안 금줄을 치고 사람들의 내왕을 경계하는 시간이다. 동양에서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28수의 별자리의 움직임으로 관찰하였다. 오행성이 28宿의 어느 곳에서 운행하고 어떤 색으로 변하는가를 천문(天文)관측을 통하여 인사의 길흉을 예측하고, 책력을 보정하고 농사에 이용하였다. 이들 음식에서 풍기는 냄새는 초경의 냄새를 중화 내지는 숨길 수 있을 만큼의 독성을 가지고 있다.
 
세종7년 단군묘를 건립, 명실상부한 國祖
고구려 시조 동명왕을 함께 모심


단군을 정점으로 일치된 사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근원을 따져보면 고려 고종 때 몽고와의 싸움을 통해 몽고의 가혹한 지배과정서 저절로 우러난 적개심은 우리 민족이 몽고족 보다 우수한 천손자손(天孫子孫)이며, 따라서 선민(選民)이라는 자부심이 필요로 하였던 역사적인 맥락에서 바라 보아야 할것이다.
 
▲ 북한에서 조성한 단군릉의 모습.     ©

이런 맥락에서 단군이 도읍했다는 평양을 신성한 고장으로 여기게 되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이태조가 즉위한 해에 당시의 예조전서 조박(趙璞)등에 의해 단군은 「동방시수명지주(東方始受命之主)」라 하여 평양부로 하여금 시제를 지내게 할 것을 건의하여 단군을 기자묘(箕子廟)에 합사하였다. 태종12년 하륜(河崙)의 건의를 받아 「단군은 실존 우리 동방의 시조(檀君實吾方始祖)」이니 단군은 봄․가을 마다 기자묘(箕子廟)에서 함께 제사하자고 하여 태종의 허락을 얻어 건의 대로 시행했다.


세종7년에 이르러 주부 정척(鄭陟)의 단군향사에 대한 상소에 의하여 단군묘(檀君廟)를 따로 건립한 다음 단군을 주벽으로 모시고 고구려 시조 동명왕(東明王)을 함께 모심으로써 명실상부한 국조(國祖)가 되었다. 조선시대 단군신앙은 어디까지나 개국시조인 동시에 실존인물로서의 숭배였다고 볼 수 있다. 다시 국조 단군의 숭배의식이 특별히 고조된 것은 이조 말엽의 외세의 침입과 일제의 침략을 받으면서 였다. 이 무렵에 단군을 국조로 하는 역사연표(歷史年表)가 작성되고 단군 국조를 종교적 신앙대상으로 하는 대종교(大倧敎)․단군교(檀君敎) 등이 발생하여 단군신앙의 교리를 체계화해서 민족주체의식과 자주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황당한 승려들의 이야기, 단군만 실존인물” 
단군신화를 부정하는 다른 주장들
 
조선후기의 학자 안정복은 「삼국유사」에서 환인은 제석(帝釋)을 일컫는다는 주(註)를 한 것을 놓고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제석은 『법화경(法華經)』에 나오는 말이며 나아가서는 단군신화 자체는 황당한 승려들의 이야기 정도로 치부하면서 신화성을 부정했다. 환인-환웅을 제거한 단군만이 실존인물이니 단군만을 제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결국 민간신앙적인 단군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민간신앙으로 단군>
『고려사』지리지 이후의 지리서 등에서는 강화도 마니산정(摩尼山頂)에 단군의 제천단(祭天壇)인 참성단(塹城壇)이 있는데 단의 높이는 10척으로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나다. 전등산(傳燈山)의 삼랑성(三朗城)은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은 성이라고 하여 단군의 유적이 실재함을 알려주고 있다.


이것은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가 강화도에 천도하면서 국조숭배의 필요성에서 강화일대의 고적을 단군과 관련시켜 설명하던 것을 조선시대에도 이에 준하여 강화도 단군 유적을 인정했고, 마니산 참성단에서는 세종 12년 2품이상의 재관(齋官)을 파견하여 초제(醮祭)를 행하였던 것이다. 실존인물로 국조 단군을 합리화 하기 위해 서거정은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단군이 1,000년 이상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단군자손이 세습적으로 나라를 다스린 연수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숙종 때에는 강동현의 단군묘에서 초목(樵牧)행위를 금했고 가까운 민호(民戶)를 수호군(守護軍)으로 정했다.


세종10년 유관(柳寬)의 상서에 의하면 구월산 동령(東嶺) 중턱에 신당이 있는데, 이는 단웅․단인․단군 세 천왕을 모시는 곳으로 삼성사라 불리며 삼성당 안팎에는 새들이 살지 않고 짐승들이 드나들지 않으며 가끔 비를 빌면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단종 즉위년에 황해도 일대에서 전염병이 발생하였는데 여론에 의하면 구월산에 모시던 단군사당을 평양으로 옮긴 후 괴기가 모여서 귀신 모양으로 밖에 돌아다니고 검은 기운이 진(陳)을 이루어 행동하는 소리가 들려 그것을 본 사람이 놀라서 피했더니 이때부터 병이 발생하였다고 하는가 하면, 혹은 평양사당으로 단군이 옮겨간 후 구월산에 남은 단인․단웅 이성(二聖)이 백성을 원망하여 유행병을 일으킨 것이라고 했다. 병이 점점 만연함에 따라 국가도 삼성사에 관심을 두게 되고 마침내 현관(玄關)이 가끔 기우제와 기청제(祈晴祭)를 지내던 데 불과하던 삼성사에서 성종 때에는 평양 단군사당의 예대로 해마다 국가에서 두 번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선조 때에는 한 때 중단되었던 삼성사의 제사를 다시 지내게 하여 축문(祝文)도 새로 재정하였다. 숙종 21년에는 삼성사 단군의 축문을 평양 단군사당의 예에 따라 「전조선단군」으로 썼으며, 정종 13년에는 삼성사를 수리하고 그 제품(祭品)과 제식(祭式)을 기자의 사당인 숭인전(崇仁殿)과 제체를 같이하도록 했다. 삼성사는 기우기청, 여제(勵祭)의 장소이며, 국조신으로 단군을 모신 평양 단군사당과는 달리 민간신앙과 관련된 사당으로 현존해 왔다. 
민간신앙으로는 고려시대부터 전해 오는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위토까지 마련하여 두고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의 3신을 제사하는 토속적이며 민간 중심적인 단군신앙으로 발전되고 있었다.
 
<북한에서의 단군연구>
1993년 10월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동남쪽 경사면 기슭에 있는 단군릉에서 단군과 그 부인의 뼈를 발견해 출생 연대를 측정했더니 무려 5천 년이 넘었다고 발표했다. 북한은 이를 근거로 단군이 신화 속의 인물이 아니라 실존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 측 주장에 의하면 단군릉은 고구려 양식의 석조 무덤으로 현실은 동서로 273㎝, 남북으로 276㎝이며 바닥에서 1단까지의 천장 높이는 160㎝이다. 무덤 칸의 바닥에는 3개의 관대가 남북방향으로 놓여 있고 그 위에 뚜껑돌로 덮었다. 단군의 무덤이 고구려 무덤 양식으로 되어 있는 것은 고구려 때 무덤을 개축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고구려에서는 시조인 동명왕을 단군의 아들로 여겼기 때문에 단군릉을 고구려식으로 개축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곳에서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일본시대에 도굴되었기 때문이며 부장품으로 금동관 앞면의 세움장식과 돌림대 조각이 각각 1개, 금동뼈의 패쪽이 1개, 토기조각과 관못 6개가 수습되었다.


또한 남녀 두 사람분의 86개에 달하는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넓적다리뼈, 손뼈, 갈비뼈 외에 팔다리뼈와 골반뼈도 나왔다. 이중 42개가 단군의 뼈이고 12개는 여자의 뼈이며 나머지 32개는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북한학자들의 주장이다.


이 뼈가 단군의 뼈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해 유골을 검사한 북한 과학자들은 단군에 대한 신상명세서의 일부분을 채울 수 있었는데 중요한 것은 그의 출생 연대가 5011±231(2007년 기준)이라는 점이다. 북한 학자들에 의하면 연대 측정의 정밀를 기하기 위해 두 연구기관이 전자상자성공명이란 연대 측정방법을 사용해 6개월에 걸쳐 각각 54회의 측정을 했다고 한다.


단군의 키는 다리뼈로 추정하면 171.3㎝, 팔뼈로 추정하면 173.2㎝이다. 이를 근거로 최소한 키가 171㎝ 이상은 되었을 것으로 추측 하고 있다. 이 키는 당시로는 상당히 큰 키다. 사망할 때의 나이는 70세 가량이었고 허리가 곧 바른 체형의 소유자였으며 같이 묻힌 부인은 젊은 여성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번 북한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단군릉의 유골이 단군의 것이 맞는가 하는 문제다. 아울러 북한이 사용한 뼈의 연대 측정 방법을 남북한 과학자들의 의견일치를 보았는가 하는 것이다.


현재로는 남한 측 과학자들은 동의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주장을 가감없이 두둔할 수 없는 것이다. 또 하나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부분이 미지로 남아 있다. 고조선의 영토로 알려진 상당부분의 지역이 현재 중국의 동북부 지역이므로 자료 확보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
 
<북한의 기존 단군연구>
북한의 단군연구는 이번 단군릉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단군에 관한 역사적인 인식이 별로 없었다. 북한은 단군에 대해 “반동적인 노예 소유자 계급이 노예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해 원시사회의 종교적 환상과 미신을 체계화한 관념적인 사회사상”이라고 폄하해 왔다. 1961년 김형석은 ‘고조선의 국가개념을 단군에까지 확장하는 것은 비과학적인 신양이다’라고 지적했으며 1963년에는 ‘오늘 우리는 단군조선왕국이 우리의 처음 국가였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신화나 전설을 그대로 옮겨 놓는 것 자체는 마르크스주의 사가들이 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북한의 현명호 역시 1963년 ‘단군조선 왕국이 우리의 처음 국가였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단군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북한의 역사교과서로 인정받고 있는 『조선통사(상)』(1991)조차 우리 나라 고대국가의 성립에 대해 논하면서 단군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남한 내 학자들의 견해>
이런 북한이 어느날 단군뼈를 발견하고 단군릉 성역화 작업에 나선 것에 대해 상당한 의문을 주고 있다. 초기 대한민국 내 민족단체(?)들과 교류를 위한 한 대남전략전술의 일환으로 단군을 이용했다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 강화도 마니산에서의 개천절 천제 모습.     ©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사상은 “우리민족끼리”라는 말을 생산, 남한내 진보단체들은 물론 보수세력의 이념적인 무력화 공작에 일부 성공했다. 초기 남한 내 학자들은 무시로 일관했지만 1993년 10월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1차 학술발표회>에서 발표된 논문을 검토한 일부 학자들은 북한의 주장이 완전한 허황된 것이 아니란 결론을 내리고 있다. 다만 북한 측에서 주장하고 있는 단군의 뼈라고 주장하는 인골 중에서 단군의 나이를 골반 뼈로 추정했다고 하는데 골반 뼈는 나이가 아니라 성별 추정용이므로 측정방법의 신뢰성에 문제를 제기했다.    


불교에서 남녀를 구분하는 방법으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되 ‘만일 남자이면 세상에 있을 때에 가람(伽藍=衆=절)에 들어가서 강의도 들으며 경(經)도 외우며 삼보(三寶)께 예배도 하며, 부처님의 이름도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그 사람의 뼈는 희고 또 무거운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여인은 세상에 있을 때 음욕에나 뜻을 두며, 아들을 낳고 딸을 기름에 있어 한번 아이를 낳을 때에 서 말 서 되나 되는  엉킨 피를 흘리며 어머니의 여덟 섬 너 말이나 되는 흰 젖을 먹어야 한다. 그런 까닭으로 뼈가 검고 가벼우니라. 아난이 이 말씀을 듣고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복 받쳐 마음이 마치 칼로 베는 듯 하였읍니다.(권상로 역주, 『부모은중경(목련경)』불서보급사, 1979 재판,14-15P)
한편 보수학계는 북한에서 발견되었다는 단군 능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조성된 일면이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반만년 역사>
우리 역사를 반만년의 역사로 보는 근거가 되고 있는 단군조선의 건국 연대인 기원전 2333년이다. 이 연대는 원래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紀異篇)」고조선조(古朝鮮條)에 “단군은 요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인 경인년(요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이니 50년은 정사이지 경인은 아니다. 아마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 같다)”을 근거로 요 임금 즉위 25년, 즉 무진년으로 보아 기원전 2333년으로 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2002년 10월 전설적인 하(夏) 왕조(기원전 21세기~16세기)가 실존했음을 보여주는 청동기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지금까지 중국 고대 왕조는 하 왕조의 뒤를 이었다는 상(商)왕조까지만 고증되었다. 문제는 중국이 요임금의 실재조차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사 국가가 존재했더라도 건국 연대를 기원전 160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요의 건국 연대를 기준으로 한다면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기원전 2333년이 아니라 기원전 1600년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계산대로라면 단군조선의 연대를 아무리 높이 잡는다 해도 우리나라가 반만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주장은 상징성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일부에서는 단군의 즉위 원년의 절대 연대는 사실로서의 의미가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삼국유사(三國遺事)』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단군이 요와 동시에 즉위해 나라를 건국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요와 순은 이상적인 통치시대를 펼친 인물의 대명사 격이다. 특히 요는 공자가 성군으로 추앙하던 임금이다. 바로 그러한 요임금과 단군이 동시대에 즉위해 조선을 건국하였다는 상징성 즉 우리나라가 중국을 늘 떠 받들던 민족이 아니라 당당하게 주체적으로 그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던 민족이란 자긍심을 심어주는 도구로 단군을 차용했다.


일부 학자들은 단군의 즉위 연대는 그 절대 연대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내세우고자 했던 의식세계를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견해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내용을 그대로 인정할 경우에 생기는 단군의 건국연대에 따른 모순을 다소 제거해 주지만 기원전 2333년이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느냐는 물음을 잠재우기는 여전히 미흡하다.

단군왕검이 기원전 2333년에 국가를 건설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것은 곧 바로 단군왕검이 건설한 고조선이 정말로 지금 우리가 말하는 국가체계를 갖추었는가 하는 의문을 불러 모으게 된다. 이런 의무를 잠재울 역사적인 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게 되면 기원전 3000년 경은 신석기시대이므로 고대 국가가 형성될 수 없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 더 설득력있게 다가오게 된다.
 
<단군기원을 버리고 서력기원을 쓰다>
단군기원(檀君紀元)은 시조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즉위년을 기원으로 한 연호를 줄여서 「단기(檀紀)」라고 한다. 고려 말엽 공민왕때의 백문보(白文寶)가 처음으로 단군기원을 사용하였으며, 조선 말기 대종교(大倧敎)에서도 사용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동시에 법령으로 공표, 모든 공문서에 사용했으며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는 10월3일을 개천절이라 하여 국경일로 정하였으나 단기연호 사용은 5․16혁명정부에 의해 폐지되었고, 1962년 1월 1일를 기하여 서력기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반만년 역사 가운데 얼마 안되는 독자적 연호를 쓴 짧은 시간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모든 관공서에서는 앞 다투어 단기연호 사용을 금지하게 된다. 최근 몇몇 언론기관에서 단기연호와 서력기원을 병기하고 있다. 단군 1년은 중국 요(堯)의 즉위 50년(기원전 233년)에 해당된다.
 
<巫와 檀君>
단군왕검이란 칭호중 「왕검」은 정치적 군장과 무당을 의미하는 몽고의 텡그리, 한국어 중 무당을 지칭하는 당굴, 마한에서 천신을 제사하였다는 천군(天君)등과 같은 의미로서 단군의 종교적 권능을 상징한다.(차용준, 『종교문화의 이해』제1권, 전주대 출판부, 2002, p.41)


이능화는 단군이 신시(神市)를 두고 교문(敎門)을 삼았다고 하여 무속과 신시의 교문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 옛날에는 무당이 하늘에 제사지내고 신을 섬김으로써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므로 신라에서는 왕의 칭호가 되었고. <“차차웅(次次雄) 혹은 자충(慈充)은 방언에서 巫를 말한다.> 고구려에서는 사무(師巫:스승)라는 칭호가 있었다. 이와함께 마한의 천군(天君), 예의 무천(舞天), 백제의 소도(蘇塗),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도 모두 단군신교의 유풍으로서 이른바 무축신사(巫祝神事)인 것이다. (이능화 집술, 이재곤 역주,『조선무속고』(1927년 초간),백록출판사 1976,P.10.)


그러나 박종홍(朴鍾鴻)씨는 “한국의 고유사상을 샤머니즘에서 찾는 일이 많은 듯 하나 이른바 무당을 매개로 하여 신화를 믿으려는 일부의 민속, 우매한 민속을 그대로 민족 전체의 신앙인 양 확대함은 과연 온단한 일인지 모르겠다. 천신지저에 대한 신앙이나 음양(陰陽)사상은 샤머니즘 보다 훨씬 고차적이요, 폭이 넓고 깊으며 보다 세계성을 띨 수 있는 것, 이론적으로는 많은 전개의 여유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여도 무방하겠다”라 하였으니. 이는 적어도 단군신화에 대한 철학적 모색은 샤머니즘이 아닌 다른 길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 임을 우리에게 명시해 주고 있다. 하지않을 수 없다(민병수 외 23인,『한국사상』우석출판사 2004.65P) 무속의 사제자(무속인)와 단군을 제정일치 사회에 있어 동일시 하려는 일부 연구자들을 경계하고 있다. 
 
<단군은 정확한 명칭인가>
신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오면서 우리 민족도 부족연합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부족이 모여 통일된 정치연합체를 형성한 단계가 있었다. 그 단계는 분명히 청동기시대 였으며, 청동기시대의 이러한 정치적 변화를 유도했던 영웅이 있었다. 그 영웅을 우리민족은 고대서부터 단군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아직도 이 단군이라는 말, 예를들어 박달나무 단(檀), 제단 단(壇)두 글자 중 하나를 쓰고 있는데, 이 단이 본래 우리말인지 아니면 한자의 의미를 딴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군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민족은 한 민족 최초의 정치적 연합체의 탄생을 유도했던 신화적 인물을 그리고 있다. 그러므로 단군은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었던 단일민족이라는 인식을 갖게해주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윤이흠 『한국종교연구 6권』,집문당 2004.197P)


단군이라고 쓰는 단어가 한자로 기록되기 이전 우리민족이 부르던 고유명칭에 얼마나 근접하게 표현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단군신화는 토템신앙의 유산인가>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를 섬기는 토템을 신앙의 모습으로 보기도 한다. 토템은 기본적으로 한 부족을 상징하는 동물이나 식물을 의미한다. 이러한 토템은 그 부족이 다른 부족과 결혼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 곧 족내혼이냐 족외혼이냐 하는데 어떤 기능을 하는가 그 상징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와 직결된 개념이다. 한 마디로 토템은 사회통합의 맥락 안에서 처음으로 제기된 종교기원의 이론이다.
곰과 호랑이를 자기들 부족의 조상으로 하는 부족이 이 땅에 존재하였다면 곰, 호랑이를 식용으로 살육 하지않는 부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잉어가 자신들의 시조라고 생각하는 성씨에서 잉어고기를 식용하지 않듯....그러나 우리민족은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곰을 포획하는 것은 물론 간, 쓸개에 호스를 이용 즙을 내 먹고 있다. 호랑이 역시 잡아 호피로 사용하며 최고의 진상품으로 여기고 있다. 토템 신앙적 입장에서 단군신화를 해석하는 가장 큰 모순은 그를 신앙하는 부족이 존재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기독교 입장에서 본 단군>
‘단’자는 최고사기가 되는 성경에서 야곱의 다섯째 아들이 단이요 우리나라 최고사기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에도 없는 삼국유사에 비로서 단군과 고구려 후예가 세운 발해가 처음 소개되어 있지만, 제단 단자(壇字)로 써 있는 것을 이치에 안 맞는다고 박달나무 단(檀)으로 고치게 되었다고 본다.


‘군(君)’은 제사장의 우두머리가 되니 군을 붙여서 단군으로 쓴 듯하며 또한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통일국가가 되어서 서울이 이스라엘 왕이 된후 이어서 다윗이 王 이 될 때 단지파에서도 2만 8,600명이 참가하였다. 이에앞서 가나안 12지파로 분배받을 때에 분배받은 땅이 너무 작아서 이웃에 있는 레센을 칼날로 강점하고 조상 이름을 따서 단으로 고치고 지내다가 아모리 족속으로부터 고산지대로 쫓겨서 다시는 평지로 내려오지 못하게 하니 할 수 없이 천산(天山)산맥과 알타이 산맥을 넘어서 몽골에서 유목민으로 터를 잡고 지내오다 광활한 만주벌판에 부여를 세우며 동진하여 고조선을 세우게 됐다. (오태환 장로 엮음,『단군의 뿌리』도서출판 돌다리,1999.29-30P) 
 
원본(原本)에 단군(檀君)의 군(君)은 ①제사장의 우두머리를 지칭 단군이라 했다. ②서출(庶出) 왕자는 군(君), 적자(嫡子)는 대군(大君), ‘서자 환웅’이라고 한 것은 야곱의 서자 ‘단’을 지칭한 것인데 천손(天孫)됨을 잘 표현시킨 것이다.
원본 유사에는 단군으로 기록된 것을 선인들이 ‘박달나무 단(檀)으로 인명(人名) 부합(符合)시켰다. 야곱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고 하라고 해서 개명(改名)했다.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창 35:10-13) (오태환 장로 엮음,『단군의 뿌리』도서출판 돌다리,1999.30-31P)
 
<단군신화가 현대 현대사회에 던지는 의미>
①우리 민족의 신성성과 우월성 과시
②유규한 역사
③광명을 사랑한 민족
④평화를 사랑하는 민족
⑤평등을 사랑하는 민족
⑥내세적이 아니라 현세적 민족
이와함께 원나라의 탄압속에 민족의식의 자각, 삼국유민 일체화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우리민족의 시조인 단군이 천제자(天弟子) 환웅의 아들이니 우리 민족은 천손의 민족이다. 단군의 탄생과 나라 다스린 기간과 아사달에 돌아와 산신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들은 천손의 자손이며, 어떠한 민족보다 우월한 민족이라는 자손심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민족은 유규한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 단군 개국은 중국의 성왕인 요제(堯帝)와 동시대이며 요제가 순제(舜帝)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과 같이 기자에게 물려 주었으니, 중국에 비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다는 민족의 주체서을 내 비치고 있다. 결국 정권교체가 평화적이고 민주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른 민족의 건국신화, 시조설화가 정복과 투쟁의 이야기가 그 줄거리를 이루고 있으나 단군신화에는 농경민족의 고유한 온화하고 평화적인 모습으로 소개되고 있다. 단군신화는 전생도 다음 생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현세적인 관념이 강하다. 이런 전통적 사생관은 민속종교가 이어 받았으나 불교 유입이후 민속종교에서도 내세관과 잉과적인 가르침을 신도들에게 주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생성소멸의 무한 반복의 경로를 설파한 천부경> 

『천부경』은 모두 81자로 된 짧은 성전이지만 1에서 10까지의 숫자를 가지고 천•지•인 3극(極)의 생성소멸의 무한 반복의 경로를 설파한 것이다. 이 천부경은 백두산에 강림한 환웅(桓雄)이 3개의 『천부인(天符印)』을 가지고 내려왔다고 한 그 천부3인의 성전으로 보는데서 매우 중요한 것이며 그 구성 내용 역시 1이 3으로 오고 3이 1로 가는 1•3,3•1의 원리라는 점에서 1부 3인(一符三印) 그 자체라고 보게 된다. 따라서 삼일신고가 또한 1의 3으로, 3이 1로 체용(體用)되는 것을 이야기 한데서 천부경을 1•3,3•1원리의 체(體)로 볼 수 있고 삼일신고는 1•3,3•1의 용(用)으로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천•지•인이라는 우주가 1(一神:한님•하느님•한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 1은 어디서 비롯한 데가 없는 1이기 때문에 그 1은 천•지•인의 3극을 만들어 내면서도 그 1은 대로 항상 있다. 이와같이 천•지•인은 1에서 셋으로 나온 것이므로 서로 떨어져서는 아무런 조화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1에서 10까지의 수 가운데 3이라는 수가 우주 만물의 조화를 짓는 기본수가 된다. 1의 이와같은 묘리는 무한대의 우주와 무한수의 생명을 낳고 거두어들이는 자리가 되지만 그 1이 움직여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또한 그 1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1을 자성(自性)으로 지니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다. 그러므로 그 1(本心,一 神)을 회복하면서 자성의 1이 지니고 있는 큰 광명 태양이 드러나 천•지와 더불어 하나가 되어 그 1로 돌아간(歸一,終一)그렇다고 끝난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1에는 처음도 마침도 없기(無始無終)때문이라는 것이다.
 
 삼일신고가 1905년(乙巳)에 신선 백전선사를 통하여 홍암 대종사에게 전수된 계시경전인데 비해 『천부경』은 11년 뒤인 1916년(丙辰)9월9일에 채약사 계연수(桂延壽)에게 태백산 석벽(石壁)에 계시한 계시경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대종교 중광 당시는 『천부경』을 몰랐고, 그 뒤 단애종사에 의해 종문지남(倧問指南)에 수록되었다. 이 『천부경』이 처음 인쇄된 것은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이며, 그 제목 『동한신성단군 천부경 주해서언(東韓神聖檀君 天符經 註解緖言)』에 의하면 1919년(己未)으로 되어 있다. 이 정신철학통편 상•하권은 서우(曙宇) 전병훈(全秉勳)이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발간한 것인데, 전병훈은 이 『천부경』을 계연수가 태백산에서 천부경 81자를 받은 병진년 두 해 뒤인 무오년에 이미 입수하여 주해까지 해가지고 있었다가 베이징으로 가서 출판한 것으로 보인다.
 
 대종교 간부 정훈모씨가 만든 단군교가 일제 때에 있었는데 여기서 단군교 부흥전략이라는 책을 내었다. 이 책에 천부경을 수록하고 계연수가 단군교에 보낸 매우 중요한 사료(史料)가치를 지닌 서신을 실었다. 이 서신은 천부경의 유래와 그 공효(功效)를 적었는데, 그에 의하면, 단군은 신인(神人)이며 천부 3인을 가지고 하늘로부터 강림하였으나 그 천부 3인이 무엇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병진년 가을 태백산에 약을 캐러 들어갔다가 그만 인적이 없는 깊은 산에 이르러 길을 잃고 헤매다. 우연히 이끼 낀 석벽에 이상한 글이 새겨 있는 것을 홀연히 발견하고 보니 이것이 천부신경(天符神經)이어서 무릎을 꿇고 절하며 공경히 읽었다. 이것이 단군천조의 보경(寶經)이며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의 기적이어서 무한한 기쁨을 느껴 단숨에 외워 가지고 나왔다가 다시 찾아 들어갔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서 천부경은 읽을수록 다함없는 복록을 받고 원하는 대로 소원이 이루어지는 영검을 지닌 신서라고 하였다. 전병훈씨는 정신철학통편에서 “동방 신선 최치원이 이르기를 단군 천부경 81자는 신지의 옛 글자로서 고비(古碑)에 새긴 것을 발견하고 최치원이 백산(白山:태백산)에 새겨 두었던 것을 채약사 계연수가 백산에 들어갔다가 발견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천부경』의 81자와 부합된 문헌이 적지 않다. 황제내경(黃帝內經)의 소문(素問) 81편과 영추(靈樞) 81편이 있으며, 노자의 도덕경이 81장은 천부경 81자와 일치하거나 자연의 조화에 의하여 삼위일체 생성,발전되는 원리를 밝히고 있다. 또 중화경(中化經)이 81장으로 되어있으며, 전설 속에서 신룡(神龍)의 등에 있는 비늘 수가 81개라 한다. 천부경의 81자는 구구단의 최고 숫자로서 구변구복(九變九復)에 의하여 원신반본으로 천자인 삼재(三才)가 합덕을 이루어 지상천국 선경(地上天國 仙境)이 건설됨을 선각자의 각 경전에 밝히고 있다.
 

 
<천부경 원문>
一始無始/一析三極無盡本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一積十鉅 無匱化三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大三合六生 七八九運 /三四成環五七一 /妙衍萬往萬來 用變不動本 /本心本太陽昻明 /人中天地一 /一終無終一
 
一始無始(일시무시)
하나의 시작인 “유형(有形)의 존재”는 시작이 없는 “무형(無形)의 존재와 일체다.
 
一析三極無盡本(일석삼극무진본)
무시의 하나를 분석하면 “하늘․땅․사람의 삼극(三極)이 생기나니 그 근본은 무진장하다.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천일일 지일이 인일삼)
하늘이 하나의 창조가 되니 “하늘 기본수는”1이고. 땅이 하나가 창조가 되니 “땅의 기본수는” 2이며, 사람이 하나가 창조가 되니 “사람의 기본수는” 3이다.
 
一積十鉅 無匱化三(일적십거 무궤화삼)
一를 쌓아 十까지 커져서 “부족함이 없는 단계인”무궤(無匱)가 되면 삼국(三極)으로 변화(變化)하다.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천이삼 지이삼 인이삼)
하늘이 재창조에 의하여 3수를 이루고, 다음에 땅이 재창조에 의하여 3수를 이루며, 세 번째로 사람이 재창조에 의하여 3수를 이루다.
 
大三合六生 七八九(대삼합육생 칠팔구)

大三 즉 天三 地三이 합하여 六이 되어, 七과 八과 九를 탄생이다.
 
運三四成環五七(운삼사성환오칠)
三과 四一의 “수리”를 운용(運用)하면 五와 七의 순환(循環)이 이루어진다.
 
一妙衍萬往萬來 用變不動本(일묘연만왕만래 용변불동본)
一은 오묘하기 그지없으니, 만 번 지난 과거나 만번 올 미래에도 활용에는 변화가 있으나, 근본은 움직이지 않는다.
 
本心 本太陽 昻明(본심 본태양 앙명)
“사람의”근본은 마음이요, “태양계 우주의”근본은 태양이니 “일심정도(一心正道)를” 높은 차원에서 밝힐(昻明)것이다.
 
人中天地一(인중천지일)

사람 가운데 천지가 있어 하나가 되니, “천지인은 삼위(三位)”이나 일체(一體)이다.
 
一終無終一(일종무종일)
하나의 끝으로 “무형(無形)이 되는 존재는” 끝이 없는 “영원(永遠)의 존재와” 일체(一體)이다.
 
천부경은 풀기도 어렵지만, 잘 푸는데 최종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천부경의 숨은 뜻에 부합하여 천부경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 하겠다. 그러나 올바른 풀이를 하지 못하면서 조화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풀이를 요하는 것이며, 많은 연구자에 의하여 각양각색의 해석이 시도되고 있는바, 설령 풀이는 하지 못하더라도 올바른 풀이를 한 것을 발견할 수 만 있다면 마음 자세 여하에 따라 천부경이 내포한 성과는 얻을 수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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