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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진의 '성(聖) 고독'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09/30 [19:06]
그리스도를 향한 깊이와 무게

박두진의 '성(聖) 고독'

그리스도를 향한 깊이와 무게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09/30 [19:06]

성(聖) 고독
박 두 진


모닥불 저만치 제자는 배반하고
조롱의 독설,
닭울음 멀어 가고
군중은 더 소리치고
다만 침묵
흔들리는 안의 깊이를 누가 알까


못으로 고정시켜
몸 하나 매달기에는 너무 튼튼하지만
비틀거리며
어깨에 메고 가기엔 너무 무거운


몸은 형틀에 끌려 가고
형틀은 몸에 끌려 가고
땅 모두 하늘 모두 친친 매달린


죄악 모두 죽음 모두
거기 매달린
나무 형틀 그 무게를 누가 알까


모두는 끝나고
패배의 마지막


태양 깨지고 산 웅웅 무너지고
강물들 역류하고
낮별의 우박 오고
뒤뚱대는 지축
피 흐르는 암반


마리아
그리고 막달레나 울음


모두는 돌아가고
적막 
그때 
당신의 그 울음소리를 누가 알까


그리스도를 향한 깊이와 무게
                                                                           

박두진은 경기도 안성 출생으로,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예지 <문장(文章)>에 추천되어 등단한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이다. 우리의 시문학사에서 청록파는 순수문학의 한 준령으로 자리하고 있다.
 
등단 이후 그는 한결같이 자연과 신의 영원성에 관해 노래하고 있다. 그의 작품 가운데 나타나는 자연은 단지 자연을 예찬하는 서정성이라기보다는 기독교사상을 중심으로 신앙적 체험을 형상화하고 있다.
박두진의 시에 나타나는 기독교사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창조주에 관한 예찬으로 메시아를 형상화하고 있다. 둘째는 희생정신으로, 십자가상에서 고통을 감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으며 셋째는 구원사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함으로 궁극적으로 구원을 완성하는 것으로써 이는 그의 기독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위의 인용시 <성(聖) 고독>은 결국 위의 둘째 항목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지면상 생략한 전반부는 “쫓겨서 벼랑에 홀로일 때/ 뿌리던 눈물의 푸르름/ 떨리던 풀잎의 치위를 누가 알까”로 시작하고 있는데, 쫓겨 홀로된 그리스도의 외로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해갈의 물동이/ 눈길의 그 출렁임을 누가 알까”와 “빈 하늘 우러르는/ 홀로 그때 쓸쓸함을 누가 알까”로 이어지는 2연과 3연의 종결부분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이르는 노정에서의 내면화된 외로움과 쓸쓸함을 나타내고 있다.
 
인용부위에서는 성서의 설화적 모티브로, 닭 울기 전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배반하는 제자 베드로의 불신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모닥불 저만치 제자는 배반하고/ 조롱의 독설/ 닭울음 멀어 가고”라고 묘사하고 있다. ‘모닥불 저만치 제자는 배반하고’라는 거리적 관점은 이제까지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베드로가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과는 다른, 예수 입장에서 베드로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결국 당시 예수를 주체의 입장에서 심리적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십자가 형틀을 메고 골고다를 오르는 예수의 지친 모습을 “못으로 고정시켜/ 몸 하나 매달기에는 너무 튼튼하지만/ 비틀거리며/ 어깨에 메고 가기엔 너무 무거운”이라는 무게감으로 당시의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골고다는 사형 집행장으로 오르는 험난한 골짜기로, 예수는 이미 체포되어 법정 재판을 끝내고 사형장으로 끌려가고 있는 중이다. 이는 단순히 십자가의 무게감이 아니라 ‘죄악 모두 죽음 모두’에서 드러나듯이 온통 절망과 좌절을 표상하고 있다. 희망이 이미 꺼져버린 상황에서의 “거기 매달린/ 나무 형틀 그 무게”는 그 누구도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이어 “모두는 끝나고/ 패배의 마지막”으로 치달아 드디어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게 된다. 이는 성서에서 하늘마저 돌아앉는 ‘암흑’을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위의 작품에서는 “태양 깨지고 산 웅웅 무너지고/ 강물들 역류하고/ 낮별의 우박 오고/ 뒤뚱대는 지축/ 피 흐르는 암반”이란 표현에서 보다 문학적 형상화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와 같은 역동적인 절망 뒤에 찾아오는 것은 그 누구도 감내할 수 없는 외로움이다. 마리아와 막달레나 울음 뒤에 이어지는 적막감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감내해야 할 깊이 이자 무게인 것이다.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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