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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범 미국 워싱턴 상원부의장의 간증
“나는 恨을 다 풀었다”
기사입력: 2014/11/01 [07:44]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김정호 기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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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제13차 세계한인경제인대회 개회식’에서 기조연설하는 신호범 미 워싱턴주 상원부의장.     ©
6세 때부터 거리를 헤매던 소년이 미국에 입양돼 박사, 대학교수가 되고, 동양인 최초 워싱턴 상원의원 부의장이 되었다. 심 박사의 드라마틱한 삶은 인생의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이복동생들을 공부시켜 자리 잡게 하고, 자신을 버린 아버지와의 50년 만의 화해는 진한 감동을 준다. 자서전으로《사랑하며 섬기며》가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동영상에서 녹취, 정리했다.(편집자주)
 
나는 이 나라에서 고생 많이 했다. 경기도 파주 금촌에서 출생하여 4살 때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돌아가시자 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됐다. 외할머니 댁에 맡겨져 2년간 살았다. 6살 때 외숙모가 조카들에게 엿을 나누어 주어서 나도 달라고 하자 없다고 안 줬다. 엿이 너무 먹고 싶어 조카 것을 뺏어 먹다가 외숙모에게 방망이로 맞아 머리에 피가 나서 도망쳤다. 밤 12시가 넘도록 ‘엿이 그렇게 중요한가. 인생이 무엇인가’ 생각하다 새벽에 몰래 기차를 탔는데 서울행이었다.
 
기차에서 ‘짐승도 집이 있는데 왜 나는 갈 곳이 없는가’ 서러워 울었다. ‘언젠가 나는 엿을 많이 사서 이웃사람들과 나누어 먹을 것이다. 엿을 사려면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울역에서 거지들과 어울려 얻어먹고, 밤에는 남대문 지하도나 시장에서 잤다. 겨울이면 무척 추웠다. 9살 때 재원이란 11살 친구를 만났다. 추울 때는 서로 안고 잤다. 한 번은 밥을 얻어 재원이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재원이는 철도 옆에 싸늘한 시체로 누워 있었다. 나의 하나 밖에 친구인데 나 혼자 어떻게 살라고 죽었느냐며 통곡했다. 그 때 마음속으로 ‘나는 절대 죽지 않겠다. 열심히 두 몫을 살아 한 몫은 내가 갖고 한 몫은 너에게 주겠다’고 다짐했다. 두 번째 결심이다.
 
따뜻한 옷을 입고 가방을 메고 학교 가는 아이들을 보고 학교 밖에서 선생이 가르치는 것을 필기하고 있는데 누가 불렀다. 순경이었다. 무서워서 도망가다 잡혔다. 순경은 나의 따귀를 때리며 뭐 훔쳤냐고 다그쳤다. 울면서 훔친 게 없다고 하자, 내 손에 든 것을 빼앗아 보더니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을 사줬다. ‘내일 아침에 또 맞고 국수를 얻어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언젠가는 선생님이 될 것이다’고 결심했다.
 
어느 해 겨울 외할머니 집에 가니 아버지가 찾아왔다. 아버지는 재혼해서 살았는데 너무 가난해서 할머니 집에 간다고 집을 나왔다. 할머니 집에서 나올 때는 아버지 집에 간다고 하며 서울에서 구걸하며 살았다.
 
1950년 6.25사변 때 아버지와 이복동생 5명과 같이 남쪽으로 피난 갔으나 나는 거리에서 구걸하며 살았다. 하루는 미군에게 구걸하였는데 미군이 손을 내밀어 잡자 트럭으로 끌어올렸다. 미군은 나를 용산에 데리고 가서 목욕 시키고 군복을 입히더니 하우스보이를 시켰다. 그 일을 장단까지 가서 3년간 했다. 밤이면 잘 곳이 있고 따뜻한 밥을 먹고 살았으나 내 집이 아니라는 생각에 슬펐다. 가을날 언덕에 올라가 통곡을 하다 눈을 뜨니 어느 미군이 서 있었다. 왜 우느냐고 물었으나 가라고 했다. 미군은 나를 따뜻하게 포옹했다. 미국에 세 아이가 있는데 내가 우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 분이 나의 양아버지가 됐다. 레이 폴이다. 치과의사다. 16살 때 나를 입양했다.
 
3년 만에 여권을 받았다. 1955년 19살에 미국에 갔다. 부산에서 침을 뱉고 떠났다. 이 나라 다시 안 보겠다고 했다. 새 나라에 가서 새 사람이 되어 새롭게 꿈을 찾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나의 심정을 3년 전에 쓴 책에 올렸다. “배가 고파서 별을 세었고, 엄마가 보고파서 별을 세었다. 잠이 안 와서 별을 세었고, 하도 외로워서 별을 세었으며, 희망이 없어서 별을 세었고, 장래가 너무 막연하여 별을 세다 보니 희망과 꿈이 보였고, 그 희망과 꿈속에서 별을 찾았다.”
 
양부모님이 뭐 하고 싶냐고 하여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가자고 하였으나 공부 못했다고 했다. 초등학교 가니 나이 많아 받아줄 수 없다 하였고, 중학교에서도 그랬다. 고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통곡하자, 학교 측에서는 검정고시제도가 있다며 여선생을 붙여주어 낮에는 영어와 역사와 사회를 가르쳐 주었고, 밤에는 아버지에게 수학, 물리, 화학을 가르쳐 주었다.
 
하나님께 의지 많이 했다. 한국에서 얻어먹고 사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했다. 양아버지가 어깨들 두드리며 어렵지 할 때마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하나님께 어린애 같은 기도를 했다. ‘하나님, 안녕하세요. 저도 괜찮습니다. 무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검정고시 공부가 너무 어려우니 도와주시면 나중에 저도 도와 드리겠습니다’고 기도했다. 기도하며 큰 힘을 얻었다. 1년 2개월 만에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고통 받을 때마다 꿈꾸며 결심
인내․기도․준비․노력으로 꿈이뤄
아버지와 이복동생들 恨풀어줘
 
대학교에 들어가니 더 어려웠다. 죽으라고 공부하여 워싱턴 주립대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74년도에 학위를 받고나니 너무 감사했고, 대학교 조교수가 되었다. 언젠가 선생이 되겠다고 했는데 미국에 가서 박사가 되고, 대학교수가 되었다. 위에서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다.
 
교수가 되자 첫 번째 꿈이 생각났다. 1974년 신촌에서 봉고트럭을 빌려 엿을 잔뜩 사가지고 고향 동네 애들에게 실컷 먹였다. 애들이 배탈 나서 끙끙거렸지만 나는 행복의 미소를 지었다. 꿈을 꾸니 꿈에 당선된 것이다. 친구 재원이에게도 ‘나 죽지 않고 살았다. 네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나와 같이 기뻐하자’고 말했다.
 
양부모 사랑을 많이 받았다. 1950년도 미국은 인종차별이 심했다. 1958년 미국 군인이 되어 텍사스 주에서 근무했다. 한 번은 백인 군인 4명과 으리으리한 식당에 들어가 앉아있으니 지배인이 나를 들어 식당 밖에 내던졌다. 부대에 와서 밤새도록 울었다. 한국도 차별이 많다. 한국은 인종차별은 없으나 인간차별이 있다. 돈 없고, 가족 없고, 공부 못한 나 같은 사람은 얼마나 차별 받았는지 모른다. 같은 핏줄에게 차별 받는 게 더 슬펐다. 밤새도록 울다가 새벽에 결심했다. ‘언젠가는 여기서 정치인이 되겠다.’며 또 꿈을 꾸었다. 나는 아무 것도 없어서 꿈을 많이 꾸었다. 나는 하늘을 보며 잤다. 언젠가는 정치인이 되어 이런 부정한 법을 바꾸겠다는 꿈을 꿨다.
 
1950~1980년대에는 미국 사회에서 동양인이 정계로 나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우리가 하는 것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인내하고, 준비하고, 기도하고, 노력하면 좋은 시간이 온다. 미국사람과 영어발음이 똑같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정계는 상상도 못했다.
 
부대에서 차별을 받고 울다가 내 뿌리를 찾아야겠다고 느꼈다.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 나의 한국말은 거리에서 쓰는 나쁜 말들이다. 글도 못 읽었다. 유학생들로부터 한국말과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면서 나를 발견했다. ‘이 문화 안에 내가 있구나. 내가 왜 나를 부정했는가. 그래도 나의 나라가 아닌가.’ 나중에 부산바닷가에서 침 뱉고 떠나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한국말을 배우고 내 자신을 찾으니 미국사회에 적응하기 쉬웠고, 차별에도 적응하기 쉬웠다.
 
준비하고 기다리면 찬스는 온다. 내가 대학교수이고, 한국어와 일어와 중국어도 좀 하여 주지사의 무역고문이 되었다. 86년도에 중국서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주지사가 미국과 동양을 잘 아니 의원으로 출마하라고 권했다. 35년간 기다리던 말이었지만 거절했다. 인종차별이 심하니 정계에 나갈 수 있겠는가 했더니 준비되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두려웠으나 기도했다. 4년이 걸렸다. 92년도에 워싱턴 주 하원의원에 출마해 한 집 한 집 방문하며 ‘이 나라에서 축복 많이 받았으니 이제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상원의원 되기는 더 어려웠다. 출마를 결심했으나 모두 반대했다. 10개월 동안 하루 10시간씩 집집마다 방문했다. 기자가 나와 같이 다니다가 좋게 기사를 써줬다. 결과는 58대 42로 이겼다. 주님 모시고 최선의 노력을 하면 누구나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이사야서 41장 10절을 읽겠다. “두려워 말라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나는 한을 다 풀었다. 그동안 나는 아버지를 거부했다. 50년 동안 한을 품고 살았다. 아버지는 재혼해서 이복동생이 다섯 명이다. 이복동생들이 학교를 못가 미국에 데려다 공부시켜 지금은 자리 잡고 잘 살고 있다. 셋방살이 하는 아버지도 고향에 집을 사드렸다. 아버지는 내가 한국에 오기 전에 꼭 전화하라고 했다. 그런데 갈 때마다 술에 취해 계셨다. 새어머니께 물으니 너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연락 안하고 가서 저녁 먹고 난 후 ‘내가 다섯 살 때 나를 두고 어디 가셨습니까.”고 물으니 밖으로 뛰쳐나가 밤 1시가 넘어 술에 취해 들어오셨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핏줄을 버릴 수 있겠느냐. 너를 먹여 살릴 수 없어 외할머니 댁에 맡기고 머슴으로 팔려갔다”고 했다. 대학교수가 아버지를 오해했다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큰 절을 올리고 잘못했다 용서를 빌고 포옹했다.
 
부모님은 미국에서 잘 사셨다. 아버지는 93년도에 돌아가시기 한 달 전 “나 간다. 이제 여한이 없다. 네 동생들을 데려다 공부시켜 잘 되게 해줘서 고맙다.”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주님을 믿고 노력하면 이런 한도 풀어진다.(정리: 김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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