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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란 박사의 종교가 산책●내가 만난 달라이 라마③

이치란 | 기사입력 2014/12/22 [17:19]

이치란 박사의 종교가 산책●내가 만난 달라이 라마③

이치란 | 입력 : 2014/12/22 [17:19]
▲ 인도 북부 히마찰 프라데시 주의 다람살라, 달라이 라마 주석 궁(宮)에서 우리 일행을 접견하는 제 14세 달라이 라마(텐진 갸쵸) 聖下. 강대관 금강경독송회장(우측), 이치란 박사(중앙)와 故 박동기 회장. 1992년 5월.     © 매일종교신문
 
달라이 라마는 항상 세계 뉴스의 초점이 된다. 그의 동정(動靜)은 세계인들의 관심사이다. 그가 티베트 불교 지도자이기만 했다면 아마도 관심은 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크게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것은 히말라야의 티베트 고원에서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던 종교적 순수성과 나라를 잃었다는 망명 지도자에 대한 동정(同情),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화주의자로서의 세계평화운동가로서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기에 관심과 인기가 증폭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사실은 이런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그의 덕목은 자비와 지혜를 겸비한 히말라야의 성자(聖者) 같은 모습이 아닌가한다. 


역사적으로 한국과 티베트는 고려이전 시대에는 직접적인 외교관계나 교류가 거의 없었다. 다만 고려시대에는 원(元)나라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티베트 불교인 장전불교(藏傳佛敎)와 티베트 라마들과의 접촉이 있었고, 청나라 때는 티베트의 장전불교와 몽골불교와의 접촉과 교류가 있었다. 조선시대 연암 박지원의『열하일기』에 몽골불교와 장전불교가 소개되고 있다. 청나라 때는 장전불교가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전회(前回)에서 살펴봤던 알탄 칸의 달라이 라마 칭호 부여에 의한 몽지(蒙地)에 티베트 불교가 뿌리내렸고, 여진족(女眞族)인 만주족이 명(明)을 무너뜨리고 청(淸)을 세워, 장전불교와 몽골불교를 거의 국교(國敎) 수준으로 신봉(信奉)했기 때문이다. 티베트 족은 만주족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몽골족과는 사촌정도의 종족(種族)으로 여겼기에 몽골인들의 종교가 된 장전불교를 자신들의 종교로 수용했던 것이다.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는 산중으로 가 있어야 했다. 그나마 있던 여러 종파(宗派)들을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시켜, 중국의 한전불교(漢傳佛敎)와 선종불교(禪宗佛敎)에 경도(傾倒)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도 한국불교에는 인도의 금강승(金剛乘) 불교가 장전불교를 통하여 우리 불교에 용해된 밀교적 요소가 깊이 스며있다. 각설하고, 달라이 라마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다람살라 방문에서 돌아온 우리는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1992년 8월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했지만, 이미 노태우 대통령 시절부터 북방외교정책으로 러시아와 중국과의 관계모색을 하고 있었다. 다람살라에서 귀국하자마자, 우리는 큰 기대를 갖고 달라이 라마 방한 추진을 본격화하기 위해서 막 기지개를 켜려고 하던 차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달라이 라마를 만나고, 그의 방한을 추진한다는 언론보도가 나가자 외무부에서 난색을 표하자, 고 박 회장과 나는 외무부를 방문, 상황 설명을 했지만, 국가의 외교 정책을 반(反)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총무원과 동국대에서도 소극적이었다. 일단 우리는 조용히 방한을 추진하기로 작전을 변경 했다. 94년 세계불교도우의회대회(WFB 19차)를 한국에 유치해서 개최한다는 방침을 세웠고, 이 대회 때 달라이 라마를 기조 연사(keynote speaker)로 모신다는 계획아래, 수면 아래서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계획은 94년 조계종 개혁사태 때까지 추진되었고, 이와 관련된 스토리 또한 많지만, 일단 이 정도에서 달라이 라마 방한 추진문제는 일단락을 짓고자 한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해 보자.    

전회에서 소개했듯이, 제5세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본토에 있는 포탈라 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더 전개해보고자 한다. 제5세 달라이 라마인 롭장 갸쵸(Lobsang Gyatso, 1617-1682)는 실질적으로 티베트 고원을 통치했던 정교일치(政敎一致)의 신정(神政) 왕으로서 역할을 했다. 그는 내전에 휩싸인 중앙 티베트 지역인 티베트 고원을 통일하고 실권(實權)을 장악하여 종교적 세속적 권력을 행사했고, 이후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의 신정 왕으로 환생하여 세습(世習)할 수 있도록 초석을 마련한 분이다. 그는 24권에 달하는 불교와 다양한 주제의 학술서적을 직접 써서 간행할 정도로 학구적이기도 했다. 제5세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쿵가 링포라는 귀족가문에서 태어났고, 이 가문은 일찍부터 닝마파. 가규파와의 밀접한 관련 속에 있었다.

어린 쿵가 링포는 환생을 확인하기 위한 어려운 테스트 과정인 모(mo)란 직관적(直觀的) 관찰(觀察) 의식을 거쳐서 제4세 달라이 라마의 환생(還生)임을 관찰자들에 의해서 인정받았다. 그리고 제4세 달라이 라마의 시봉(侍奉)이었던 소남 쵸펠(Sonam Choephel,1595-1657)의 마지막 인증(認證)으로, 제4세로부터의 환생임을 확정했다. 이후 사원대학(寺院大學)에서 제4대 판첸 라마인 롭장 쵸기 갈첸Lobsang Chökyi Gyaltsen,1570-1662)으로부터 롭장 갸쵸란 법명(法名)을 부여받고 그의 지도하에 타쉬룬포 사원(Tashilhunpo Monastery)에서 겔륵파의 전통에 따른 정교하게 체계화된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그리고 인도 날란다 대학 학풍을 전수받은 닝마파와 가규파의 교과과정을 이수하고 특별 수행과정까지 완수했다. 학행일치의 과정을 마스터한 것이다. 게다가 세속적 통치를 위한 제왕학(帝王學)까지 연수했다.


그의 스승인 롭장 쵸기 갈첸은 제4대 판첸라마로써 아미타불의 화신이라고 인정된 분이었다. 이후 차기 판첸라마는 대대로 타쉬룬포의 주지(住持)로 계승해 가게 된다. 이 사원은 라싸의 3대사원인 간덴, 세라, 드레 펑 사원과 함께 겔륵파 4대 사원으로 불리며, 여기에 칭하이 성(省)의 쿰붐 사원과 간쑤 성 라브랑 사원과 함께 겔륵파 6대(大) 사원이라고 불린다. 4대 판첸 라마 부터는 이곳에서 정치와 종교 활동의 중심지로 삼았다. 시가체 시 거리의 서쪽에 있는 니세리 산(尼色日山)의 산허리에 지어져 50개 이상의 경당(經堂)과 200개가 넘는 객방(客房)을 가진 유명한 사원이다. 1959년 제14세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했지만, 제10대 판첸라마는 그대로 티베트에 눌러있었다. 1989년 입적 이후, 11대 판첸 라마는 두 명으로 공표(公表)되었다. 한 명은 제14세 달라이 라마에 의해서, 또 한 명은 중국 정부가 발표한 분이다. 달라이 라마가 인정한 제11대 판첸 라마는 6세 때인 1995년부터 공중(公衆)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중국 정부에서 발표한 11대 판첸 라마가 공식 석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제5세 달라이 라마의 정치적 종교적 사건과 역사는 너무 많고 또한 알탄 칸의 후계자와의 정치적 관련 속에, 지금의 신강(新彊) 지역인 중가르에서의 역할 등이 있지만, 다음은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 궁을 소개하고자 한다. 제5세 달라이 라마는 송챈 감포 왕 시대의 티베트 수도였던 라싸로 다시 수도를 옮긴다고 선포하고, 라싸에 그의 정부를 설치하고, 1645년 포탈라 궁을 짓기 시작했다. 드레 펑 사원과 세라 사원 중간쯤에 위치한 그리 높지 않은 산 정상인데, 이 언덕 산의 포탈라 궁에서 라싸 시내를 내려다보이는 아주 전망 좋은 위치이다. 1649년 제5세 달라이 라마는 그의 각료들과 함께 포탈라 궁인 정치 행정 담당인 백궁(白宮)으로 옮겼다. 이 포탈라 궁은 관세음보살이 항상 계신다는 의미에서 보타낙가산을 상징한다. 우리나라에도 강원도 양양 낙산사 홍련암을 보타낙가산으로 부르는데, 이곳에는 관세음보살이 상주하기 때문이다.   
제5세 달라이 라마는 1682년 65세로 입적하지만, 정치 행정담당 수상(首相)은 이 사실을 일반에게 공표하지 않고, 포탈라 궁의 공사를 계속 진행했다. 포탈라 궁을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는 3천여 개의  금.은.동 불상과 각종 보물들이 즐비하다. 이 포탈라 궁에는 제5세 달라이 라마로부터 제13세 달라이 라마의 부도(무덤)가 봉안(奉安)되어 있고, 다만 제6세 달라이 라마의 부도는 이곳에 없다.       
 
▲ 제5세 달라이 라마 때 건축을 시작하여 사후에도 계속해서 공사를 하여 13층 높이에 1천개의 방이 있는 포탈라 궁, 왼쪽은 홍궁(종교). 오른 쪽은 백궁(정치.행정)이다. 왼쪽에서 두 번째 이치란 박사. 2001년 12월.     © 매일종교신문

▲ 티베트 동부 지역 암도에서 수개월이 걸려서 이곳 포탈라 궁을 순례하고 있는 한 티베트 불자와 이치란 박사, 뒤의 건물은 제14세 달라이 라마가 집무실 겸 접견실로 사용하던 건물과 방문객들에게 법문을 하던 강당 건물이 보인다. 2001년 12월 촬영.     © 매일종교신문
▲ 수 백리 길을 걸어 온 티베트 불자들이 조캉 사원 앞 광장에서 오체투지로 기도 정진하고 있다. 이 사원은 7세기 송챈 감포 왕에게 시집온 당나라 문성공주를 위하여 지어진 대소사로서 라싸 최초의 사원이다. 이 사원은 라싸 시내 중앙 팔각가(八角街)에 위치하고 있다.     © 매일종교신문



제6세 달라이 라마는 창양 갸쵸(Tsangyang Gyatso(1683–1706)이다. 창양 갸쵸는 지금의 인도 아루란찰 프라데시 주의 몬족 지역인 타왕 사원 근처에서 태어났다. 티베트와 인도 국경지역으로서 해발 3천 미터나 되는 곳이다. 1697년 제6세 달라이 라마로 등극해서 1706년 북경으로 가는 도중, 지금의 칭하이 성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는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시(詩)도 짓고 낭만적인 분으로 여자도 기꺼이 마다하지 않은 분이었다고 하는데, 역대 달라이 라마 가운데 미스터리한 분이다. 제7세 달라이 라마부터 제12세 달라이 라마까지의 소개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더 소개하기로 하고, 현재 제14세 달라이 라마의 전생인 제13세 달라이 라마를 소개하고 제14세 달라이 라마의 생애와 평화운동 등을 소개하려고 한다.


▲ 제13세 달라이 라마 툽텐 갸쵸Thubten Gyatso (1876-1933).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티베트를 둘러싸고 러시아, 영국과 중국이 각축을 벌인 빅 게임시기에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티베트의 독립과 주권을 지켰던 제 14세 달라이 라마의 전생.     © 매일종교신문

▲ 알렉스 멕케이의 《티베트와 브리티시 통치》옥스포드대학 1997년     © 매일종교신문

 
제13세 달라이 라마는 툽텐 갸쵸Thubten Gyatso(1876-1933)이다. 1878년에 제12세의 환생으로 인정되어 등극했으나, 1895년까지 정치적 파워를 행사하지 않았다. 그는 제정러시아와 대영제국의 빅게임 사이의 전당표(典當票) 같은 존재가 되었을 때,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던 분이다. 1904년 영국 원정대가 침입하자, 13세 달라이 라마는 지금의 몽골 국의 수도 울란바토르(당시에는 우르가,Urga)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2400km 떨어진 몽골의 우루가의 왕 후레 사원에서 1년간 머물렀으며, 몽골인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지내고, 몽골 불교의 정신적 수장으로서 티베트-몽골 불교전통 서열 3위인 제8대 복드 게겐(칸, 왕) 젭춘담바 쿠툭투와 수차례 회동(會同)하기도 했다. 제8대 복드 칸은 제12세 달라이 라마가 공인하여 등극한 몽골 불교의 정신적 수장(首長)이었다. 복드 칸은 티베트 출신이었다. 여기서 티베트 불교의 서열 3위인 복드 칸은 누구인가 알아보자.      
    
티베트-몽골 불교의 서열 3위인 복드 칸(몽골불교최고지도자)의 탄생을 추적해보자. 제1대 복드 칸은 활불(活佛)인 젭춘담바(活佛)로 추앙하는 자나바자르(Zanabazar1635-1723)이다. 자나바자르는 티베트 불교의 조낭파(Jonang school)의 대학승(大學僧)이었던 타라나타(Taranatha 1575-1634)의 화신(化身)으로 여긴, 할하 몽골의 통치자였던 투친 칸 곰보도르지의 아들이다. 12세기에 티베트에서 성립한 조낭파는 유가파(唯識)였는데 나중에는 티베트 불교의 다른 파들에 의해서 견제를 받은 바 있다. 제2대 활불(젭춘담바)로서의 복드 칸은 칭기즈칸 후손에서 출현했다. 청나라 건륭황제의 1758년 칙령 발표 이후에는 몽골인이 아닌 티베트인 가운데서 젭춘담바의 화신(化身)이 발견되었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는 복드 칸은 1911년 청조의 멸망과 몽골국의 독립과 맞물려서 제8대 복드 칸으로 불리는 젭춘담바(1869–1924)가 티베트처럼 신정(神政)의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제8대 젭춘담바는 실제는 티베트 정부 고위층 아들로 태어난 티베트출신이다. 그는 소년시기에 티베트에서 제7대 젭춘 담바의 화신으로 발견되어, 라싸의 포탈라 궁에서 제12세 달라이 라마와 판첸라마가 입회한 자리에서 제8대 젭춘담바로서 복드 칸으로 의식(儀式)을 치루고 공인되었다. 그는 1874년 우르가(Urga)라고 불렀던 외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로 옮겨와서 살게 되었다. 제8대 젭춘담바인 복드 칸은 바로 몽골의 근대역사 그 자체로서 국외자(局外者)에게는 흥미진진한 소설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가본 분들은 시내 남쪽에 위치한 자이산 가는 길 옆 우측에 복드 칸의 겨울 궁(冬宮)과 사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1911년부터 1924년까지 몽골의 왕으로 재위했던 역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다시 제13세 달라이 라마 이야기로 돌아가자. 상황이 이렇게 되자 청나라는 제13세 달라이 라마를 면직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티베트가 청 소유라고 주장했다. 제13세 달라이 라마는 칭하이 성 등 중국 영토에서 전전하다가 1908년 티베트 라싸로 돌아와서 내각을 다시 구성하는 등, 주권을 되찾으려 했다. 청나라는 다시 군대를 라싸에 파견했고, 제13세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하였다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이 무너지고 1912년 청 군대는 티베트에서 철수했다.


제13세 달라이 라마는 1913년 인도 다르질링(현재는 부탄)으로부터 라싸로 돌아왔고, 중국정부는 청나라의 행위에 대해서 사과했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의 지위를 복권한다고 하자, 제13세 달라이 라마는 중국 정부의 지위 복권에 관심이 없다고 대답하고, 그는 자신의 티베트의 신정의 지위를 확인시켰다. 제13세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내각인 카샤그(議會)에만 맡기지 않고 주변국인 인도의 마하라자(대왕)와 시킴의 브리티시 정치 관료와 네팔 왕과 직접 외교문제를 논의하는 친정(親政)에 나섰다. 그리고는 1913년 2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다. 티베트 국기를 새로 제정하고 우표와 은행 수표 등을 발행했다.    
 
제13세 달라이 라마는 신정 왕으로서의 왕권 강화와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고 그동안 무질서와 부패를 척결하고 납세를 의무화 하는 등 쇄신책을 펴서 간신히 정부를 정상화 시켰다. 신(新) 교육제도를 도입하고 4명의 유학생을 영국에 파견했다. 영국 미국 일본인들의 외국인의 티베트 방문을 환영했다. 그는 세계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전기를 설치하고 전화를 가설했으며 자동차를 수입했다. 그러나 그는 1933년 임종하기 전 티베트는 겉잡을 수없는 어두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목도하면서 입적하게 된다.


1932년 칭하이 성 무슬림과 사천 성 한족 군인들은 제13세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영토인 칭하이 성과 티베트 캄 지방에 있던 시캉 성을 지키려하자, 중국-티베트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제13세 달라이 라마는 인도에 있는 브리티시 정부에 긴급 전통(電通)을 보내자, 브리티시 정부는 남경(南京)의 중국 정부에 항의하여 전쟁이 중단되었다. 제13세 달라이 라마는, 앞으로 티베트의 운명이 간단치 않을 것이며, 위대한 후계 달라이 라마의 출현을 기대하면서 입적(入寂)에 들었다. 이로써 제13세 달라이 라마의 시대는 가고, 제14세 달라이 라마인 텐진 갸쵸의 시대가 도래 하게 된다.


제14세 달라이 라마를 소개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 길을 돌아와야 했다. 그만큼 티베트 불교와 달라이 라마 제도는 간단히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이제 제14세 달라이 라마 聖下에 대해서 본격적인 탐색에 들어가겠다. 이제 우리나라에도 달라이 라마 추종자가 많이 생겼고, 또한 친중파(親中派)도 많아졌다. 내가 처음 성하(聖下)를 친견하고 방한(訪韓)을 추진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상황이 이렇게 변하다니 제행무상(諸行無常) 인생무상(人生無常)이란 격세지감을 통감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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