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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달자의 간증
그래, 다 안다
기사입력: 2015/01/31 [23:08]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이화서 기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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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5월 11일 낮 12시 30분, 그가 쓰러졌다. 점심으로 국수를 먹던 중이었다. 으윽…. 뭐 그런 소리였는지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그는 옆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찰나를 받아 안았다. 그래 그것은 찰나였다. 아마도 본능이었을까. 옆으로 기우는 그 순간 그의 머리를 받아 안은 것은 본능적 행동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운명을 안아 버린 것이다.

대학교수이던 남편은 혼인한 지 9년 만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23일 만에 깨어나긴 했지만, 24년간 수발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서른다섯 나이에 딸 셋, 팔순이 다 된 시어머니 삶까지 짊어졌다. 시어머니마저 1981년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쓰러져 그 자리에서 9년을 살았다. 이어 친정어머니도 타계했고, 나도 암 투병을 해야 했다.

정말 막막했다.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나 혼자의 몸이었다면 자유로웠을 것이다. 굶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고. 그런데 이제 일곱 살, 여섯 살, 두 살 된 아이들이 옆에 있으니 무엇이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아이들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절망의 문턱에서 잡은 건 문학
 
내가 기댄 다른 한 가지는 문학이다. ‘꼭 다시 글을 쓰리라. 세상을 놀라게 하는 시를 써서 다시 태어나야지. 지금 나는 죽어 있지만 반드시 부활할 거야’ 그런 꿈을 많이 꾸었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꿈이 없었으면 절대 그 삶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이부자리를 제대로 깔고 잠을 자 본 적이 없다. 시간이 나고 일자리만 있으면 돈을 벌러 나갔고, 집으로 돌아오면 시어머니와 남편 간호를 하고 아이들을 챙겼다. 그리고 나면 해가 저물었다. 집안일을 다 한 후에야 비로소 책상 앞에 앉았다. 늦은 새벽까지 공부하다 책상에 엎드려서 잠들곤 했다. 그렇게 노력을 하니 나에게도 행운이 왔다. 대학원 시험을 본 뒤 기업의 사보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왔다. 그 원고를 쓰다가 비로소 제대로 된 작품을 쓰게 됐다.

그리고 나를 믿어줬던 어머니가 계셨다. 누구도 내가 교수가 되고, 시인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때도 ‘그래도 마, 니는 될 기다’라고 포기하지 않게 붙들어주셨던 어머니가 내가 가장 불행할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 ‘달자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불쌍하더라’라 말씀하고 떠나셨는데, 내가 지금 죽으면 가장 불쌍한 모습으로 어머니를 만날 텐데 여기서 그만둘 순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종교도 큰 힘이 되어주었다.

가족마다 아픈 이를 두지 않은 가족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나처럼 고난을 통해 시댁, 친정까지 온 가족이 거의 다 세례를 받고 가톨릭 집안이 되는 큰 구원을 얻은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그 어두운 터널에서 신앙이 얼마나 위안이 됐는지 모른다. 새벽 두세 시가 돼도 힘들면 성당(역촌동성당)으로 달려가 성모님께 눈물로 기도하며 위안을 얻곤 했다.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와중에서 문학과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대학원에 진학, 마흔에 석사학위를, 쉰에 박사학위를 받고 평택대 교수로 임용돼 명지전문대로 옮겨 강의하며 우리 문학에서 여성시의 영역을 개척하고 베스트셀러 작가의 꿈도 이뤘다. 특히 ‘죽을 때까지 공부하고 돈을 벌어 행복한 여자가 되라’던 어머니에게 용돈조차 제대로 쥐어드리지 못했다. 1988년 산문집 ‘백치애인’(자유문학사)를 발간하고서야 어머니 묘소 앞에 용돈으로 10만 원짜리 수표 두 매를 묻었다.
 
교수되어도 패배감 벗어나지 못해
 
1992년 처음으로 대학 교수가 된 그 시절, 내 인생 자체는 서울에서 등 떠밀려 나온 패배감에 사로 잡혀 있었다. 서울의 모 대학을 노크했지만 냉혹하게 거절당했고, 경기도의 어느 대학에 자리를 잡았을 때에도 그 질긴 패배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습관처럼 학교에 갔고, 교실에서 시를 가르쳤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이상은 내게 없었다. 이제야 내가 얼마나 대책 없는 이기주의자인지를 서서히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늘 세상에 대한 분노만 가득했다. ‘세상이여, 왜 나를 이렇게 대접하느냐. 내가 지금 아파도 말하지 않느냐.’ 그렇게 나 자신을 위해서만 외치고 살았다. 반성한다.

내가 최초로 성당 문을 두드렸을 때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따뜻한 손길을 만날 수 없는 절망 그 자체에 놓여 있을 때였다. 세상은 온통 캄캄했고, 짙은 어둠은 손톱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딱딱했다. 남편은 중환자실에 누워 20여 일을 혼수상태로 지냈고, 나는 더 이상은 낮아질 수 없는 가난과 초라한 몰골로 중환자실을 지키며 가슴을 떨었다. 이제 막 세 살이 된 막내와 그 언니들은 똑같이 수두를 앓고 있었다. 이런 잔인한 비극 속에서 나로 하여금 성당 문을 열게 한 분은 누구일까.

누가 불렀다고 하면 ‘오만’이고, 내가 직접 찾아갔다고 하면 ‘착각’일 것이다. 그즈음의 나는 세상의 질긴 외로움에 몸을 떨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무서웠다. 그 현실을 극복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 찰나였다. 누구에게도 내 아픔을 털어놓고 의논할 수가 없었다.

외롭고 무섭고, 또 외롭고 무서웠던 그 시절. 나는 성당 문을 처음으로 열고 들어선 그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성모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던 그 백지상태의 종교적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성당을 찾아가게 된 걸까. 아직도 예수님은 말씀이 없으시고, 나도 정확하게 그 이유를 모르겠다.

난생 처음으로 성당 문을 열었을 때, 저 벽에 분명한 모습으로 계셨던 예수님의 고상과 눈이 마주쳤을 때, 내 심장은 왜 그렇게 빨리 뛰었으며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을까. 나는 분명 자서전「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에 그 기록을 몇 줄 기록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온전한 해답을 찾을 수가 없다.
 
그분이 나를 수렁에서 건져주셨다
 
벽에 걸린 예수님과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그래 나는 분명 지금도 기억한다. ‘덜덜덜’ 온 몸이 떨렸던 그 순간을. 그리고 나는 들었다. 예수님의 목소리는 지금도 분명하게 들린다. ‘그래, 다 안다.’

‘오! 예수님. 어찌하여 저를 아십니까? 어찌하여 제 마음을 다 아십니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시기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초라하고 불쌍한 여자의 마음을 다 안다고 하십니까?’ 나는 ‘으악!’ 소리치며 울기 시작했고, 내 입에서 처음으로 ‘주님!’이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를 안다는 그 분의 옷자락을 붙들고 통곡하고 싶었다.

‘아무도 제 마음을 몰라주는데요. 그 누구도 제 마음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데요. 이미 제 마음은 저 차가운 얼음 바닥에 떨어져 으깨지고 박살났는데요. 주님이 안다니요…’ 나는 온 몸으로 울부짖었다. 내 몸의 물이란 물은 모두 흘러나왔다. 두세 시간의 통곡 끝에 무거웠던 내 몸은 가벼워졌다. 아, 그날의 예수님…. 그 시절 내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돈이 아닌, 절실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슬픔의 공유자였던 것이다.

당시 나는 사람들의 위로가 나를 더 초라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위로하는 그들의 눈은 나를 아래로 보고 있었고, 때로는 나를 비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 마음은 이미 어긋난 상태였고, 누군가의 위로는 곧 나를 멸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마음의 질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흔히 사람이 약해지면 그렇게 된다. 남의 진심을 받아낼 줄을 모른다. 그리하여 더욱 외로워지는 것이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다.

나는 울었고, 눈물의 홍수 잔치를 이뤘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 하나 ‘그래, 다 안다’를 가슴에 비밀처럼 움켜쥐고 그 어려운 시기를 이겨냈다. 넘어질 때도 그 말씀을 부여잡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 말씀을 부둥켜안았다. 죽을 정도로 외로울 때도, 그 말씀 하나를 온 몸으로 안고 살았다. 그 눈물, 그 말씀 덕분이었을까. 남편은 오랜 혼수상태에서 깨어났고, 나는 예수님 그분의 발끝을 따르는 신자가 됐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분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도,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따르는 동지도 되어 드리지 못하고 있다. 은혜를 갚아야 할 사람인데도 언제나 내 일에 분주하느라 그분을 알지 못하고, 그분을 외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수렁 속에서 건져 주신 분을 모른척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주님. 저는 압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지금도 듣고 있고, 당시 가슴 철렁 내려앉던 당신의 크신 위로를 압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변하지 않았고, 주님도 그대로이십니다. 이렇게 감히 말하는 것이 제 신앙입니다.(정리: 이화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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