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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장 스님의 법문
나를 모르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기사입력: 2015/02/26 [12:02]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장유진 기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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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화엄경>에서 말씀하시길 “고요하게 살아라. 그 속에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화엄경>에 보면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만나러 갈 때 제일 먼저 만난 것이 문수보살이고, 53번째 만난 보살이 보현보살입니다. 문수보살의 지혜와 보현보살의 자비,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불교의 핵심이 자비와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재동자는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가장 위대한 법문을 문수보살에게서 듣습니다. 왜 그 법문이 위대한가 하면,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이라고 하는 거울 속에 자신의 지나온 일생을 비춰 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대단히 교만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탐진치(貪瞋痴)’를 문수보살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였다는 겁니다.
 
불교의 핵심은 자비와 지혜
 
오늘 여기 앉은 분들도 법사의 말을 듣지 말고 부처님 앞에서 자신을 바로 아세요. 그리고 부처님이라는 거울로 자신을 비춰 보기 바랍니다. 불교를 공부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을 바로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불교는 믿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의 종교며, 지혜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그런 고귀한 법문을 듣고 실천하면 확실히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수행하는 것이지, 어떤 절대적 존재인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는 겁니다. 맹목적으로 부처님 앞에서 소원을 빌어서 행복해지는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지금 나이가 50~60대인 사람들은 상당히 통제된 사회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일 겁니다. 그러나 여기 앉은 젊은 대학생들이라면 좀 더 개방된 사회를 경험하며 자랐을 겁니다. 통제된 사회에 살던 사람들은 개방된 사회에 적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요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뭔가 위태롭고 무질서해 보인다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개방된 사회에서 생활해온 젊은이들은 어른들을 보면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리타분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 서로를 갈등하고 하나로 융합되지 못하면 사회는 더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것을 살펴봐야 할까요? 그 방편이나 도구가 필요하다면, 어떤 것이 그에 맞는 도구가 될까요? 종이를 자르는 데는 가위가 필요하고, 마당에 서있는 나무를 베어내기 위해서는 도끼가 필요합니다. 또한 통나무를 자르는 데는 톱이 필요하지요. 스님의 머리를 깎는 데는 삭도가 필요합니다.
 
동양에서 유교사상을 경험하지 않은 나라는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유교의 핵심사상이 될 수 있는 ‘중용’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동양에서 불교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불교의 ‘중도’를 모르는 이가 적지 않습니다. 불교의 중도는 연기(緣起)를 말하지요. 다시 말하자면 오늘 여기 앉은 분들 가운데서도 ‘나’라는 존재가 어떤 연관 관계 속에 살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나를 모르고는 절대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여러분들이 앉은 이 자리에서 행복해 질수 있는 방법을 일러 드리겠습니다. <금강경>에서는 ‘나 외에 모든 이들을 공양하라’고 가르칩니다. 공양이란 불교식으로 나 말고 다른 이들을 공경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행복해 진다는 겁니다. 나만 위해 살면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자존심을 놓아버리라는 거지요. 지금 여러분 가슴에 있는 자존심이라는 것은 백년을 삶아도 향기가 나지 않는 놈입니다. 그런 것에 집착하는 한 절대 우리는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지혜와 인격을 갖추는 것을 ‘성불(成佛)’이라고 합니다.
 
나를 모르면 절대 행복할 수 없어
 
성불이란 인격을 완성하는 거라 했는데 그럼, 인격의 완성은 불교인들만이 독점 가능한 것인가요? 모두들 대단히 착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스스로 교만하고 자존심을 세우며, 영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 것은 부처님을 닮기 위해 불교를 믿는 겁니다. 내가 따로 있고 부처님이 따로 있어 내가 부처님을 따르면 부처님이 내게 무엇인가를 해줄 것이라 착각하지 말라는 거지요.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런 노력하지 않고, 내 불행을 부처, 예수, 노자, 공자가 해결해 줄 거라 믿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창조적 인격상을 만들어 부처님과 같은 이상적 인격을 갖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입으로만 진리를 말해서는 만겁의 세월이 지나도 견성(見性)은 불가능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입으로만 말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입으로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처음 이 법당 안으로 들어와 보니 어둡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흔히 세속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 법당 안을 환하게 밝힐까 논리적·학문적 연구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스님들은 이 깜깜한 방안에서 스위치를 눌러 단박에 어둠을 밝히는 ‘선(禪)’ 공부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신구의(身口意)’ 삼업으로 짓는 ‘사특한 지혜’를 가지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한 생각을 바꿀 때라야만 가능하며, 그런 면에서 ‘선’ 이라는 것이 대단히 위대하다는 겁니다. 일평생 고민해도 해결되지 않는데 손가락 하나로 스위치만 누르면 법당 안이 환하게 밝아지는 이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선을 닦는데 어떤 자격이나 차별이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 닦는 데는 아무것도 필요한 게 없어요. ‘선’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오직 한 생각 바꾸는 데 그 핵심이 있는 겁니다.
 
일체의 반야지혜가 다 자기 자신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반야지혜의 출발점은 여러분의 마음 한가운데 있어요.
 


착각 속에 살지 말고 자기 성찰해야
 
지금 여기 앉은 이들 모두 한분도 빠짐없이 다 부처입니다. 그런데 다들 자신이 중생이라는 생각에 집착해 있습니다. 부처님이 성도하고 가장 놀라웠던 것이 일체중생이 부처인데 왜 중생의 탈을 쓰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우주만물이 연기법에 의해 다 얽혀 있는데, 오직 나밖에 모르는 중생심만 앞세워서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오늘 제가 말한 모든 것이 비단 불교만의 진리는 아닙니다. 혹시, 오늘 법회 나오기 전에 나는 불교를 안 믿으니 법회 안 간다 했던 분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류가 살아있는 동안 그 어느 누구도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고민하는 인생의 문제가 없다면 종교가 왜 필요하겠어요? 중요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인생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입니다. 나는 불교 믿으니 기독교는 안 되고, 나는 기독교 믿으니 불교는 안 된다는 식의 사소한 집착에서 벗어나세요.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두꺼비 얘기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나는 스님이 된 후에 만행을 많이 했어요.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성지를 순례했습니다. 그런데 두꺼비란 놈 한 마리가 그런 만행을 즐겼나 봅니다. 어느 날 서울 두꺼비가 부산 구경을 가는데 중간지점이 추풍령이라고 합니다.
 
한참을 기어서 추풍령에 도착한 이 어리석은 두꺼비는 자신이 어디쯤 왔는지 확인 하고 싶어 환장을 합니다. 그래서 가던 길을 멈추고 앞다리를 번쩍 들고 벌떡 일어나 기지개를 한껏 켜서 부산을 쳐다봅니다. 그런데 이 두꺼비가 보니 서울이나 부산이나 별로 다를 게 없더란 말입니다. 짐짓 “부산이라고 뭐 별거 아니네.” 하면서 가던 길을 포기하고 서울로 되돌아 가버리더란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놈의 눈은 앞으로 나있지 않고 위로 있으니, 벌떡 일어서면 부산이 아니라, 자신이 지나왔던 서울이 다시 보였던 것이죠.
 
여러분이나 저나 이 어리석은 두꺼비처럼 뒤집어진 눈으로 ‘전도몽상(顚倒夢想)’속에 살아가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모두 착각 속에 살지 말고 모두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살아가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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