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뉴스종합범종교가톨릭개신교불교민족종교해외종교이슬람생활 종교인의 성경 분석탐방 기획
전체기사 Trend & View 마음을 비춰보는 포토에세이 종교지도자 칼럼 매일종교신문 공지 사항
편집  2020.11.30 [21:55]
신앙 간증
매일종교신문 공지 사항
안내데스크
신문사소개
광고안내
저작권문의
구독신청
불편신고
독자투고
제휴안내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 보호정책
기사제보
신앙 간증
김규년(전 울산대학교 전자계산학과 교수)의 신행수기
우리가족의 불교입문 이야기
기사입력: 2015/03/02 [04:34]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이화서 기자 정리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카카오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이 이야기는 1991년 7월 16일부터 2001년 3월 7일까지 약 10년 동안 우리 가정에서 일어난 일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2001년 3월 7일 우리 집에 경사가 났다. 바로 기다리던 새 식구 중일님이 태어나셨기 때문이다. 갓난아기에게 ‘님’ 자를 붙이는 것이 우스운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이 아기가 전적으로 대행 큰스님의 뜻과 계획과 지도에 따라 태어난 아기임을 확신하기에 나는 ‘님’ 자를 붙이지 않을 수 없다. 중일님은 바로 1년 전인 2000년 2월 23일 이생을 떠난 우리 둘째아기 정여가 다시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이 아기와 그의 전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는 결혼하기 이전과 결혼 후 상당 기간 동안 아기 가지기를 거부해 왔다. 인생이 고통의 바다라는 것을 어릴 적부터 어렴풋이 느껴 왔었고, 그런 관념이 결혼 후에도 일정기간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로 집사람과는 신혼 초에 몇 번 다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아기를 갖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우리는 첫 아이 서윤이를 가졌다.
 
슬픔 안고 태어난 둘째아이
 
서윤이는 참으로 예쁘고 총명하게 자라 주었다. 당시 나는 울산대학교 전자계산학과에 근무하면서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에서 서윤이를 위한 장난감이나 책, 학용품 등을 사오는 것이 삶의 커다란 기쁨이었다. 그렇게 예쁘게 자라는 서윤이를 보면서 둘째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드디어 1991년 7월 16일 둘째 아이(정여)가 태어났다.
 
정여는 태어나기 전날부터 우리부부에게 엄청난 슬픔을 안겨 주었다. 몸의 균형이 맞지 않다는 담당 의사의 예측에 따라 밤새 울었다. 그러나 태어난 아기를 보니 정상에 가까웠다. 단지 머리만 상대적으로 좀 크고, 머리카락이 좀 더 많고, 짙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의 성장과 발육이 정상아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사는 연골 무형성증이 의심이 되니 서울에 가서 정밀 진단을 받으라고 하였다.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에게 온갖 시험용 주사약을 주사하고, 동굴 같은 촬영기에 아기가 들어가는 것을 보던 기억을 글로 쓸 수가 없다. 결과는 연골 무형성증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이 병은 머리가 앞뒤로 지나치게 크고, 손가락 발가락 등이 짧으며, 성인이 되어도 키가 120-130센티밖에 되지 않는 병으로 현재까지 개발된 치료방법은 없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망연자실하였다. 어떻게 울산으로 왔는지 모르겠다. 집사람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고, 나 역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집사람은 의욕을 잃고 모두 죽자는 말을 점점 자주 하더니 급기야 드러눕고 말았다.
 
그러던 중 한마음선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혜안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가끔 교회에 다니는 어설픈 기독교 신자였고, 집사람 역시 기독교와 관련이 깊은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스님을 모시고 집에 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집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 하에 부탁을 드렸고, 스님은 흔쾌히 응해주셨다.
 
해결의 전초- 스님과의 만남
 
승복 입은 스님을 뵌 적 없는 아이는 상 밑에 숨어 한참동안 나오지 않았다. 스님은 집사람의 손을 잡고 한동안 말씀을 나누다 가셨다. 집사람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그 후 안양에 계신 대행 큰스님을 친견하였다.
 
▲ 한마음선원 대행스님의 법어     © 매일종교신문

처음 뵈었을 때 인자하신 할머님으로 보였다. 아이가 아프다는 말씀을 드리니 “아이는 더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실망스러웠다. 며칠 후 집사람이 큰스님을 친견하러 가자고 하여 4가족 모두 안양으로 올라갔다. 몸이 아픈 정여를 스님께 보여 드리고 “이 아이가 나을 수 없다면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혀 달라”고 했다. 스님께서는 한참을 물끄러미 보시더니 “10년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집사람은 너무 오랜 기간이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큰스님은 “10년이 먼 것 같지. 금방이야!”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 말씀의 의미를 몰랐다. 10년 후가 되면 정여가 깨끗이 나을 것이라는 뜻인지, 옷을 갈아입을 것이라는 뜻인지, 아니면 적응해서 살 것이라는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집사람은 큰스님의 말씀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선원에 열심히 다녔다. 우리의 모든 재산과 대출까지 얻어 보시를 해야겠다는 집사람의 말에 나도 흔쾌히 응했다. 그때 나는 커다란 것을 깨달았다. ‘자기가 관리할 수 있는 일정액 이상의 재물은 재물이 아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4식구는 모두 절에 자주 나가게 되었고, 스님을 보고 상 밑에 숨었던 큰아이, 정여, 나 모두 절의 분위기에 익숙하게 되었다.
 
어느덧 정여가 8살이 되어 초등학교 입학 통지서가 집으로 날아오게 되었는데, 너무 고통스러웠다. 초등학교에 보내는 것을 포기하였다. 대신 엄마와 집에서 공부하도록 했다.
 
1999년 12월 방학이 되자 나는 가족이 있는 모스크바로 가서 20여 일 있다가 귀국해야 했다. 큰 아이는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콘서바토리 대공연장에서 연주계획이 잡혀 있었다. 나는 울산대학교에 미루어 둔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한국행 비행기를 타려고 새벽 3시쯤 살금살금 나오는데, 갑자기 정여가 자다 깬 얼굴로 아빠! 하고 불러서 건성으로 안아주고 뽀뽀해 줬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밀렸던 일을 처리하고 정여가 좋아하는 장난감들을 샀다. 그런데 공항에서 만난 집사람의 얼굴이 침울했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오늘 새벽 정여가 갔다는 것이었다.
 
큰스님께서는 한국으로 운구하지 말고 화장하라고 하셨다. 뼈를 큰 바다로 나가는 강에 뿌리라고 하셨다. 참으로 냉정하시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날 화장을 마친 후 모스크바에는 그런 강이 없다고 하여 상페테르 부르크로 비행기를 타고 가기로 계획을 세우고 스님께 전화했더니, 그런 강이 있으니 뿌리라고 하셨다. 다음날 지리전공자들과 의논한 결과 모스크바 강이 운하를 거쳐서 큰 바다로 나간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정여의 뼈를 모스크바 강에 뿌렸다.

세 번 거부 후 순응하다
 
큰스님께서는 “잘 모르니까 눈물이 나지, 자세히 알면 덩실덩실 춤을 출 일”이라고 하셨다. 아들을 하나 새로 낳으라고 하셨다. 나는 자신이 없다고 답했다. 사실 위험요소가 너무 많았다. 또다시 정여와 같이 건강하지 않은 아이가 태어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고, 집사람이 마흔두 살이었다. 그리고 이미 두 번이나 수술해서 아이를 낳았으니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며칠 후 큰스님을 뵈었더니 “정여가 다시 아들로 오고 싶어 하니까 아기를 가지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또 자신 없다고 말하고는 울산으로 돌아와 모든 것을 정리하였다. 머리도 짧게 깎았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정여에게 덜 미안할 것 같았다. 얼마 후 3식구가 다시 안양으로 올라가 큰스님을 뵈었을 때도 또다시 “정여가 아들로 다시 오고 싶어 하니 아기를 가지라”고 하셨다.
 
우리 가족은 매일 울었다. 밥 먹다가도 울고, 자다가도 울고, 아침에 깨어서도 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었다. 정여를 해수욕장에서 잃어버렸는데, 며칠 후 남아메리카의 바닷가에서 구조되어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와서 우리 가족과 만나는 꿈이었다. 그로부터 아기를 갖게 되었고, 스님께서는 건강한 사내아기를 낳을 것이니 몸과 마음가짐을 잘 하라고 일러주셨다.
임신 4개월에 접어든 어느 날 우연히 TV를 시청하다가 연골 무형성증을 갖고 있는 4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병원에 검사 예약해 놓았다가 곧 철회하였다. 만일 아픈 아이가 태어나도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니 무조건 잘 키우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고 배수진을 치니 두려움이 좀 사라졌다.
 
출산 1주일 전 최종 점검과 수술예약을 하러 다시 병원에 들렀다. 의사는 자세히 초음파로 살펴보더니 “딸이다.”고 말했다. 순간 머리가 굳어지는 느낌을 받아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서윤이가 “우리 큰스님께서 아들이라고 하셨어요.” 라고 말했다. 의사는 화가 잔뜩 나서 다시 한참 보더니 “어! 아들 맞네.” 라며 겸연쩍어 하였다.
 
일주일 후 드디어 온 가족의 축복 속에 중일님이 태어나셨다. 중일님이 생후 100일 되는 날 나는 꿈을 꾸었다. 정여가 나타나서 인사했다. 커다란 황소 위에 올라타서 피리를 불며 개구쟁이처럼 신나고 재미있게 노래 부르며 산 속으로 갔다. 그날 나는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아, 정여와 중일님은 한 몸이구나!’(정리: 이화서 기자)
 
ⓒ 매일종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카카오톡
주간베스트 TOP10
배너
광고
광고
  안내데스크신문사소개광고안내저작권문의구독신청불편신고독자투고제휴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 보호정책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범 종교의 진정성을 두루 살펴 보고 이해함으로써 각 종교와 사회의 화평과 상생, 조화를 이룬다.
회장 이옥용 /발행-편집인 신민형 / 양형모 상임고문 / 편집국장 이부평 / 청소년보호책임자 강은나
우) 140-846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1가 70번지 (83길 21)
대표 전화: 02-703-8267 | 팩스: 02-3211-4419 인터넷 매일종교신문
등록번호:서울 (아)01319(범종교신문 등록 2009년 9월 1일,2013년 6월 15일 제호변경)
기사제보 : minhyung-s@hanmail.net
Copyright ⓒ 2009-2013 매일종교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