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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興庵 黃軫經 큰스님과의 대담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08/24 [13:37]
“성직자는 검소하고 역사를 두려워 하라”

新興庵 黃軫經 큰스님과의 대담

“성직자는 검소하고 역사를 두려워 하라”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08/24 [13:37]
▲ 신흥암의 조실(祖室)로 한국 불교의 장자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과 종회의장, 종립 동국대학교 이사장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한 불교계의 큰 어른인 진경스님과 매일종교신문 이옥용 회장이 신흥암 법당서 대담을 나누고 있다.     © 매일종교신문
 
역사는 흥미진진하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건 전진(前秦·중국의 고대 국가)의 승려순도(順道 ?~?)화상이 한반도에 입국하면서부터 비롯된다. 순도는 중국 본토인이 아닌 호승(胡僧)이 었으며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6월 전진의 왕 부견(符堅)의 어명으로 사신을 따라 불상과 불경을 갖고 고구려에 입국했다. 제17대 소수림왕(?~384)은 예를 갖추어 순도화상을 영접했고 그에게 왕자 교육을 위탁했다. 서기375년 성문사(省門寺ㆍ뒤에 興國寺로개칭함)를 창건해 순도를 주석하게 했는데 이것이 고구려 불교의 시초이다.
 
이후 고구려 불교는 백제와 신라를 거처 일본으로 전래되며 동북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고구려에는 순도의 입국 이전에 불교를 포교한 승려가 있었으니 바로 아도(阿道 ?~?)화상이다. 아도는 신라 제13대 미추왕 2년(263) 경주에 가 불교 포교를 시도했으나 왕족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수년 후 불치병에 걸린 성국공주를 아도가 치료해 주면서 그 공로로 전도를 허가 받았다. 아도는 흥륜사를 지어 신라 불교를 융성시켰다.
 
아도가 젊은 시절 한반도 전역을 구도기행 하던 중 계룡산중의 깊고 깊은 심산유곡에서 하룻밤을 노숙하게 되었다. 설핏 잠결에 주변을 환하게 비추는 불빛이 있어 눈을 떠 보니 산중턱의 기이하게 생긴 바위였다. 천신만고 끝에 올라가 바위를 살펴 본 아도는 깜짝 놀랐다. 오색 영롱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바윗속에 봉안돼 있었기 때문이다. 아도는 진시사리 앞에 108배(拜)를 올리면서 속세에 찌든 108가지의 번뇌를 남김없이 씻어 버렸다. 아도가 그 자리에 절을 지어 새 가람을 여니 오늘날의 신흥암(新興庵ㆍ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47-1)이다.
 
일찍이 종교 역사 가운데는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기적과 신비가 허다하다. 인간이 조성한 세계 도처의 성모 마리아상이 눈물을 흘리고, 천 년된 불상의 틈에서 우담바라 꽃이 피는가하면, 십자가의 치유ㆍ은사 이적이 일어나 세상을 놀라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1989년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해 대구에서 미사를 집전할 적엔 청명한 하늘에 해맑은 무지개가 떠 가톨릭 신자는 물론 국민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 계룡산중의 깊고 깊은 심산유곡에 신라시대 세워진 신흥암에 옅은 운무가 드리워졌다.     © 매일종교신문
 
천진보탑으로 불리는 신흥암의 바위사리탑은 불현듯 방광(放光)하여 한 밤 중의 계룡산을 환하게 밝힌다. 방광은 불교의 신앙대상물에서 빛을 내쏘는 신비의 현상으로 기적 같은 영험력을 수반한다. 천진보탑(국가문화재 자료 제68호 지정)의 찬란한 방광 장면은 6ㆍ25전쟁 직후 계룡산에 주둔하던 한 미군 병사의 라이카 카메라에 잡혀 국내는 물론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0여 년 전 가을 어둠이 내린 저녁에도 천진보탑이 방광해 산불이 난 줄 알고 소방차가 출동하는 소동까지 빚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인류는 인간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자연을 찾아 숭배 하고 신이 있다고 믿으며 내생(來生)을 의탁하려 했다. 신흥암은 불법(佛法)전래 이전의 사찰이란 역사성과 함께 천지보탑의 신비한 영험도량으로 소문나면서 국내 신도는 물론 외국 관광객들의 순례 행렬까지 꿈이지 않고 있다. 20여 년 전 부터는 설문(雪聞) 황진경(黃軫經)큰 스님이 신흥암에 주석하면서 인생의 길을 묻고자하는 각계 인사들이 소리소문 없이 찾고 있다. 진경스님은 신흥암의 조실(祖室)로 한국 불교의 장자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과 종회의장, 종립 동국대학교 이사장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한 불교계의 큰 어른이시다. 진경스님을 친견하러 가는 날엔 두 달 넘는 가뭄 끝에 단비가 흠뻑 내려 대지가 활기에 넘쳤고 중동호흡기 증후군인 메르스로 앓던 이 땅의 고난도 진정돼 마음이 편안했다. 스님은 법당 댓돌 마루까지 나와 친히 맞아 주었다.
 
-큰 스님을 친견코자 새벽길을 달려 왔습니다. 법체(法體) 건강은 평안하신지요?
 
“웬걸요, 나이가 80객이다 보니 온전할 리가 있나요. 어서 이 남루한 육신의 옷을 벗어버려야 할텐데…. 아직까지도 사바세계에 인연의 끝자락이 남아있나 봅니다. 역사에 보탬되는 일을하고 사회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먼저 건강해야 됩니다. 건전한 사고 능력과 판단력은 건강한 육신과 마음에서 비롯되니까요”
 
-그래도 사람은 금생에 대한 미련이 많아 100세를 목전에 앞두고도 생의 욕망을 거두지 않습니다. 산자를 끊임없이 혼돈 시키는 그 욕망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불가에서는 탐(貪) 진(瞋) 치(痴)를 삼독심(三毒心)이라 하여 가장 크게 경계합니다. 남의 것을 탐내면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눈을 부릅떠 성내게 되고 그러다보니 어리석어지는 거지요. 영(靈ㆍ마음)과 육(肉ㆍ몸)이 합쳐져 하나의 개체 동물로 형성된 것이 인간이니 모름지기 사람은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마음에 따라 몸이 움직입니다.”
 
손수 끓여낸 작설차를 권하는 스님의 시선이 운무에 휩싸인 신흥암 도량 밖으로 향했다. 요즘의 사회 풍조가 순간적 충동을 억제 못해 야기되는 불상사가 많은데 하찮은 일도 인내 못하는 그 마음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스님은 법당 밖 먼 산봉우리를 가리키더니 경허(鏡虛ㆍ1849~1912) 대선사의 일화를 담담히 소개했다. 경허는 허공을 뚫는 참선수행과 기상천외의 기행으로 구한말 한국 불교에 선풍(禪風)을 진작시킨 유ㆍ불ㆍ선가의 큰 선승이다.
 
어느 더운 여름 날 경허가 어린 동자승과 함께 먼 길을 가고 있었다. 허기와 더위에 지친 동자승이 자꾸만 쉬어가자고 졸라댔다. 경허는 대꾸도 없이 더욱 잰 걸음으로 앞서 갔다. 동자승은 더 이상 못가겠다고 털썩 주저 앉았다.
 
때마침 가까이에 아기를 업은 아낙이 새참을 머리에 이고 논매는 일꾼들에게 가고 있었다. 경허가 갑자기 달려들어 아낙을 껴안았다. 새참 그릇은 나뒹굴었고 젖먹이는 울어댔다. “사람 살려!”라는 비명을 들은 일꾼들이 낫과 호미를 들고 경허와 동자승을 뒤쫓았다. 당시는 승려들의 도성 출입이 금지됐던 때로 무례한 걸승 하나는 죽여도 죄를 묻지 않던 시기다.
 
둘은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다리 아파 못가겠다던 동자승이 경허를 앞질러 고갯 마루에 먼저 당도한 후 “큰스님! 빨리 오세요! 잘못하면 죽어요!”라며 소리 첬다. 둘은 일꾼들의 추적권에서 벗어나자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않았다. 경허가 동자승에게 물었다.
 
“네 이놈! 지금도 배가 고프고 다리 아프냐!”
동자승이 벌떡 일어나 경허에게 큰 절하며 울먹였다.
“큰 스님! 이제야 알겠습니다.”
 
한동안 법당안에 침묵이 흘렀다. 진경스님은 12살 적 어머니 손잡고 절간에 공부하러 간다고 집을 나선 것이 그대로 입산 길이 되어 동시에 출가하게 되었다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80이 넘은 세속 나이에도 속가의 부모님 생각이 날 때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취재수첩에 ‘무부무군불여금수(無父無君不如禽獸)라고 친필로 적어 주며 ’아버지도 모르고 임금도 모르면 짐승만도 못한 것이라고 부연 설명한다. 인연법과 윤회법에 관해 물으니 스님은 사람과 물의 관계를 들어 풀어냈다.
 
“인간의 몸은 70% 이상이 물로 생성돼 있어 탈수가 되면 죽습니다. 인간의 탄생 자체도 부모의 체액에서 비롯되며 죽을 때 마지막 넘기는게 물 한 모금입니다. 이 물은 배설을 통해 대자연에 머물다가 다시 인간과 만나게 됩니다. 동식물에 흡수 되었다가도 결국엔 만물의 영장인 인간과 다시 만나게 되는 거지요. 만나는 것은 인연이고 돌고 도는 것을 윤회라고 부를 따름이죠. 인간의 생로병사도 이와 같이 인연법과 윤회법에 따라 생각하면 두려울 것이 무엇이며 거칠것이 없습니다. 경허선사와 동행했던 동자승의 깨우침처럼 내 마음에서 일어나 좌지우지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아니겠습니까. 마음을 다스려야지요.”
 
▲ 20여 년 전 부터는 설문(雪聞) 황진경(黃軫經)큰 스님이 신흥암에 주석하면서 인생의 길을 묻고자하는 각계 인사들이 소리소문 없이 찾고 있다. 스님은 세상을 바로 이끄는 가장 큰 지혜는 덕(德)이라 했다.     © 매일종교신문
 
-유구한 인류 역사를 통해 지구상에는 여러 종교들이 일어났다 스러지는 명멸을 거듭했고 숱한 성인(聖人)들과 선지자도 출현해 시대마다 갈 길을 제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날이 갈수록 혼탁해지고 인심은 험악해지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세상의 등불이 되고 세인의 존경을 받아야 할 성직자들이 오히려 빈축을 사고 지탄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오늘의 시대 상황에 맞는 종교의 바른 역할은 무엇이며 올바른 성직자상은 어떻게 재조명돼아 합니까?
 
“불교에서는 길 섶의 돌 한 조각에도 불성(佛性)이 있다고 설파합니다. 수행하여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지요. 이미 세상이 달라져서 신도가 성직자의 지식을 앞지르고 가진 것도 많아졌습니다. 마치 성직자의 일거수일투족에 영험이나 능력이 부여된 것처럼 드러내려다 추락하는 현실이 안타까운 것이지요. 이런 때 일수록 신도님네들의 자각과 동참이 절실 합니다. 이 세상은 나보다 못난 사람이 없고 나보다 나은 사람도 없다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자세로 동질성과 균형감각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로 이끄는 가장 큰 지혜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덕(德)이라고 생각합니다. 옛 가르침에 조정막여작(朝廷莫如爵ㆍ조정에서 행세하려면 벼슬만한 게 없고) 향당막여치(鄕黨莫如齒ㆍ고향에선 동갑 내기처럼 친숙한 사이가 없고) 보세장민막여덕(輔世長民莫如德ㆍ세상을 건지고 백성을 돕는 데는 덕 만한 것이 없다)이라 했습니다. 동ㆍ서양의 전쟁사를 섭렵해도 지장(智將)의 후손은 귀해도 덕장(德將)은 자손이 융성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흐뭇한 축복은 뭐니 뭐니 해도 후대의 번창 아니겠습니까?”
 
해동 선필(禪筆)로 유명한 진경스님의 필적이라서 백지에 친필을 요청하니 선뜻 내려 주신다. 오후에는 부산에서 조계종이 아닌 타 종단사찰 여신도 30여명이 진경 스님을 친견하고 천진보탑을 참배하고자 빗속을 걸어 신흥암에 도착했다. 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의 말사인 갑사를 우측에 끼고 오르는 신흥암 길은 좋은 날씨에도 가파르고 험해 빠른 걸음으로도 1시간 이상 걸린다. 이런 깊은 산속의 고찰에 정계ㆍ재계ㆍ문화계는 물론 각계 각층의 국내 저명인사들이 스님의 고견을 듣고자 줄지어 면담을 신청해 놓고 있다. 필자의 인터뷰도 스님일정과 건강 관계로 3개월 만에 성사되었다.
 
80이 넘어 보이는 노(老)보살이 법문 도중 불쑥 질문을 했다.
 
-큰스님께 감히 한 말씀 여쭙고자 왔습니다. 사람이 나고 죽는 이승은 무엇이고 저승은 무엇인지요?
 
“스님은 욕지전생사(欲知前生事ㆍ전생의 일이 궁금하거든) 금생수자시(今生受者是ㆍ지금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라) 욕지내생사(欲知來生事ㆍ죽은 후 다음 생의 일이 궁금하거든) 금생작자시(今生作者是ㆍ지금 자신이 짓고 있는 행위를 돌아보라)라고 화답했다.
 
한참 불경을 읽을때 감동 받았던 가르침으로 아직도 뇌릿 속에 각인된 경구였다. 순간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 졌다. 그러면서 스님은 “부처님께서도 생사문제에 의구심을 갖고 출가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세차게 내리던 비가 잠시 멈추더니 햇살이 얼굴을 내 밀었다. 스님이 경내를 둘러보자며 법당 뒤의 산신각에 올랐다. 대웅전 뒤의 삼불봉, 좌측의 미타봉, 우측의 수정봉, 앞 쪽의 수정봉 모두가 대웅전을 향해 읍(揖)을 하는 형국으로 분지를 이루고 있다. 구름도 쉬어 넘을 이 첩첩 산중에 무슨 조화로 신흥암 자리만 멍석처럼 편안히 가라 앉았는가. 문득 나한전 뒤의 천진보탑(바위사리탑)을 보니 과연 압도적이다.
 
천진보탑과 진신사리에 얽힌 유래를 알고 나면 불법의 진수가 어디까지인지 오히려 미궁에 빠지고 만다.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든 후 인도의 아소카 왕은 쿠시나가라 국(國)에 있는 사리탑에서 8말4되(당시 인도의 도량형)의 진신사리를 발견했다. 이를 시방(十方) 세계로 나누면서 북방을 담당한 비사문천왕을 한반도 계룡산에 보내 봉안토록 한 것이다.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오기 훨씬 전의 일로 아도화상이 그 진신사리를 찾아 내 오늘에 이르고 있는것이다.
 
-흔히 불교를 말하면서는 ‘어려운 종교’라는 선입견을 갖게 되는데 쉽게 함축하면 어떤 종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팔만대장경판을 비롯한 모든 불경들이 한문으로 쓰여져 있어 어렵다고 느껴지겠지만 실상은 누구나가 접근할 수 있는 쉬운 종교입니다. 불교는 어떤 누구를 믿는게 아니라 자기 마음을 바로 세워 마음의 정체를 탐구하는 수행 종교지요. 서양 종교를 예로 들면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했다면 그 하나님은 누가 창조 했는가를 찾아가는 과정이겠지요.“
 
-일부 종교에서는 사찰에 봉안된 불상을 우상숭배라며 모욕적 발언과 파괴 행동까지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든 상징물이 없는 종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유교의 공자상, 가톨릭의 성모마리아상, 개신교의 십자가상, 원불교의 일원상 모두가 우상숭배란 말입니까?그런 논리로 비약하다가는 돌아가신 부모님이 그리워 사진을 꺼내보는 것도 우상숭배가 되고 맙니다. 자기 종교가 귀하면 남의 종교도 존중할 줄 알아야지 까닭없이 함부로 비방하고 폄하하다가는 여론의 뭇매에 쇠잔해 버리고 맙니다. 불교는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가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헛된 욕망과 명예욕을 털어버릴 수는 없을까요?
 
“역사에서 배우고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연산군ㆍ임사홍ㆍ이이첨ㆍ장녹수를 비롯해 일제 강점기의 이완용ㆍ송병준 ·배정자 등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들은 실패한 폭군이고 간신이며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들입니다. 당사자야 한 시대를 잘 누렸겠지만 그들의 후손과 가문이 어찌 되었습니까? 국민들은 다 압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충신이 누구이고 간신이 누구인지를-. 닭 벼슬만도 못한 명예를 위해 권모술수를 남발하고 위장애국하는 졸부가 누구인지도 모두 가려내는 것이지요. 역사는 무서운 교훈입니다.“
 
-작금에도 새로운 종교가 창교되며 말세를 부르짖고 자신을 따라야만 천당에 갈 수 있다고 외쳐 대고 있습니다. 인류의 전쟁사만 살펴보더라도 종교적 신념이 다른 국가 간 대립으로 숱한 인명이 살상됐고 국권마저 수탈한 사례가 허다합니다. 해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국민들이 바른 역사 교육을 받고 미래를 내다보는 거시적인 안목에서 처신해야지요. 어차피 인간은 이승에 한 번 왔다가 다시 저승으로 갑니다. 부귀빈천을 가릴 것 없이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인데 국가·민족·역사를 위해 뭔가 하나 쯤은 보탬되고 떠나야지요. 남을 괴롭히고 착취해 자신의 부(富)에만 탐닉해 본들 그도 결국 죽습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여서 감언이설로 불꽃같이 일어났다가 자취없이 사라져서야 되겠습니까?”
 
불교에서 금기시하는 살생의 한계와 의미에 관해 묻자 스님은 무학(1327~1405) 대사와 서산 간월암에 얽힌 설화를 들려 주었다. 무학은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의 왕사로서 수도를 서울로 정도(定都) 하는 등 조선 개국에 기여한 공이 지대했다.
 
어느 해 섣달 초하루. 간월암 토굴에 머물던 무학이 손수 딴 간월도 굴을 소금에 절여 저녁 공양을 하고 있는데 남루한 차림의 걸승이 찾아와 말을 걸었다.
 
“그 굴은 살았는가. 죽었는가?”
 
무학이 노승을 바라보며 맞 받았다. “세 치나 긴 손톱을 자르는게 살생인가, 몸 단장인가.”
노승이 짓푸른 바닷물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대 무학이 걸을 때 발 밑에서 밝혀 죽은 미물들은 다 무엇인고!”
 
무학이 깜짝 놀라 노승을 찾았으나 온데간데 없었고 천수만 하늘 위에 초승달만 외로이 떠 있었다.
 
-원래 사찰에서는 새벽 불공으로 일찍 기상하는데 스님께서는 수면 시간이 얼마나 되시는 지요?
 
“젊어 한창 용맹정진할 때는 많이 자야 3시간 정도였는데 육신이 쇠약해지다보니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가 깨어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금생과 내생,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것이지요. 한 순간 생각의 끈을 놓쳐 다시 잇지 못하면 그게 바로 죽음입니다. 옛 조사(祖師) 님들은 긴 잠을 물리치고 생사를 뛰어 넘어야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늘 경책해 왔습니다.”
 
사찰 풍수의 대가인 스님에게 명당 얘기를 묻지 않을 수 없어 아직도 우리나라에 명당이 남아 있느냐고 우문(愚問)을 던졌다. 1980년대 한국 불교의 수장으로 재임할 때 돈 많은 재벌과 고위층 권력자들이 동행을 원했지만 응하지 않았기로 유명하다. 풍수지리가 화제로 대두되자 스님의 목소리에 생기가 더 해 졌다.
 
“풍수는 원초적인 자연 과학의 일부입니다. 전국을 주유간산하다 보면 기가 막힌 집 터와 묘 자리가 남아 있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저 큰 자리를 누군가가 점지해 국가 위해 큰 일 할 인재를 탄생시켜아 할텐데…. ‘큰 자리’를 확인할 때는 우리나라의 국운이 아직도 뻗쳐 있음에 안도하기도 하지요. 예부터 명당의 임자는 따로 있고 욕심을 버려야 그 명당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탐관오리나 남을 해코지한 자는 설령 명당에 들어간다해도 조상 음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바르게 잘 살아야 합니다.”
 
누구나 들으면 귀가 솔깃해지고 흥미진진한 풍수 얘기를 점입가경으로 재미있게 이어 간다.
왕릉풍수·사찰풍수·일반풍수로 대별되는 한국 풍수의 3대 명맥 중 사찰 풍수는 신라 말 도선국사의 법맥을 잇는 정통 풍수이다.
 
“조선왕조 27대 왕 519년을 통해서도 겨우 28개 성씨가 28개 명당을 찾아 집 짓고 묘를 써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명당인줄 알고 써도 아닌 법이고 모르고 써도 명당 발복은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풍수 이론에만 너무 치우치지 말고 간산(看山)으로 혈터를 잘 찾아 재혈(裁穴)만 제대로 하면 복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빗줄기는 더욱 굵어지며 바람까지 거세게 몰아친다. 이 날 오후 늦게까지 들은 불법 진리와 사찰 풍수에 관한 깊은 통찰, 다비에 얽힌 장법(葬法) 내용들을 어찌 제한된 지면에 다 풀어 낼수 있겠는가. 스님이 마련해 준 사륜구동 차로 직벽에 가까운 신흥암 차로를 오르내려 하산하는 도중 나도 모를깊은 시름에 잠겼다. <정리: 이중목 매일종교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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