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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헌의 주역과 장자 읽기
열자, 잠시 무당에게 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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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12/28 [19:57]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이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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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有神巫曰季咸, 知人之死生存亡, 禍福壽夭, 期以歲月旬日若神. 鄭人見之, 皆棄而走. 列子見之而心醉, 歸, 以告壺子, 曰: 「始吾以夫子之道爲至矣, 則又有至焉者矣.」 壺子曰: 「吾與汝?其文, 未?其實. 而固得道與? 衆雌而無雄, 而又奚卵焉! 而以道與世亢, 必信, 夫故使人得而相汝. 嘗試與來, 以予示之.」

明日, 列子與之見壺子. 出而謂列子曰: 「?! 子之先生死矣! 弗活矣! 不以旬數矣! 吾見怪焉, 見濕灰焉.」 列子入, 泣涕沾襟以告壺子. 壺子曰: 「鄕吾示之以地文, 萌乎不震不止, 是殆見吾杜德機也. 嘗又與來.」 明日, 又與之見壺子. 出而謂列子曰: 「幸矣! 子之先生遇我也, 有?矣! 全然有生矣! 吾見其杜權矣!」 列子入, 以告壺子. 壺子曰: 「鄕吾示之以天壤, 名實不入, 而機發於踵. 是殆見吾善者機也. 嘗又與來.」 明日, 又與之見壺子. 出而謂列子曰: 「子之先生不齊, 吾無得而相焉. 試齊, 且復相之.」 列子入, 以告壺子. 壺子曰: 「吾鄕示之以太沖莫勝, 是殆見吾衡氣機也. ?桓之審爲淵, 止水之審爲淵, 流水之審爲淵. 淵有九名, 此處三焉. 嘗又與來.」 明日, 又與之見壺子. 立未定, 自失而走. 壺子曰: 「追之!」 列子追之不及. 反, 以報壺子曰: 「已滅矣, 已失矣, 吾弗及已.」 壺子曰: 「鄕吾示之以未始出吾宗. 吾與之虛而委蛇, 不知其誰何, 因以爲弟靡, 因以爲波流, 故逃也.」 然後列子自以爲未始學而歸. 三年不出, 爲其妻?, 食豕如食人, 於事無與親. 雕琢復朴, 塊然獨以其形立. 紛而封哉, 一以是終.     

정나라에 미래의 일을 귀신처럼 잘 맞춘다는 계함季咸이라는 무당이 있었다. 그 무당은 사람의 운명을 정확히 알아내었다. 언제 망할지, 그리고 언제 죽을지를 날짜까지 꼭 짚어 귀신처럼 알아맞히었다. 그래서 정나라 사람들은 그를 길에서라도 우연히 만나면 겁이 나서 들고 있던 물건도 다 내동댕이치고 도망쳤다. 자기의 사망일을 예언할까봐 겁이 났던 모양이다.   

열자列子가 계함을 만나보고는 그의 예언이 영험이 있다고 믿고 금방 빠져들고 말았다. 그 길로 그의 스승인 호자壺子에게 가서 자랑을 하였다.
“처음엔 선생님의 도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더군요.”     

호자가 말했다.
“나는 너에게 도를 글로만 가르쳤을 뿐 글의 실체인 도의 깊은 내용을 가르쳐주지 못했다. 껍데기만 주었지 알맹이는 주지 않았거늘 너는 굳이 도를 터득했다고 생각하느냐? 암탉이 아무리 많아도 수탉이 없으면 어떻게 알이 생기겠는가? 너는 그렇게 미숙한 도를 내세워서 세상에 떠들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의 신임을 얻으려 하다니, 그 가벼움 때문에 남들이 네 관상을 쉽게 알아채는 것이다. 만일 하루아침이라도 네가 도를 깨달아 마음이 고요해졌다면 상相이란 본래 없는 것이니, 또한 볼 수도 없는 것이거늘, 어디 시험 삼아 그 계함이란 자를 데리고 와서 나를 보여주어라.”    

다음날 열자는 계함과 함께 호자를 만났다. 계함이 호자의 관상을 보고 나서 밖으로 나와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당신의 선생은 곧 죽을 것이오 살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아마 열흘을 넘기지 못할 것이오. 나는 그에게서 이상한 조짐을 보았는데 ‘축축한 재’를 보았소.[見濕灰] 생기라곤 없는 걸 보았단 말이오.”    

열자가 들어와 눈물로 옷섶을 적시며 그의 말을 호자에게 전했다. 호자가 말했다.
“흥분하지 마라. 아까 나는 그에게 넓은 땅의 모습[地文]을 보여 주었다. 생기의 미세한 움직임이야 있었으나 깊숙이 잠복해 있어 움직임도 없고,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멈추지도 않는 경계였으리라. 그 대지의 결은 움직이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았으니 무당은 나의 생기生機가 막혀버리는 징조로 보았을 것이다. 다시 데려 와라.”    

다음날 열자는 또 계함을 데리고 와서 호자의 관상을 보게 하였다. 그런데 그가 이번에는 열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다행이오, 그대의 선생이 나를 만난 것은 천만다행이오 나의 덕으로 쾌유되었소. 완전히 생기가 돌고 있소. 나는 그의 막힌 생기가 활동하는 모습을 분명히 보았단 말이오.”    

열자가 들어가 그 말을 호자에게 전했더니 호자가 말했다.
“아까 나는 그에게 하늘의 모습[天壤]을 보여 주었다. 그 상은 만물을 자연에 맡기어 세속의 명리에 대한 생각은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한 상태인데 나의 한 가닥 생기가 발뒤꿈치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내 생명이 돋아나는 기운을 보았을 거야. 어디 다시 데려와 보아라.”    

다음날 또 그를 데리고 와서 호자를 보게 하였다. 계함은 호자의 상을 보고 나서 밖으로 나와 열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선생의 관상은 한결같지 않아서 나는 그의 상을 점칠 수 없소. 안정된 다음에 다시 와서 그 상을 보겠소.”    

이때 호자가 말했다.
“아까 나는 차별이 없이 허무하고 흔적이라고 전혀 없는 모습[太沖莫勝]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내 근본이 전혀 나타나지 않은 상태이다. 나 자신을 텅 비우고 그에게 다 맡겼다. 이 때문에 나의 균형을 이룬 생기를 보았을 것이야.

예를 들면 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연못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고래가 이리저리 헤엄쳐 물이 깊어진 곳이 연못이 생기기도 하고, 고요히 멈추어 가라앉은 물[止水]이 깊어져 연못이 되기도 하고,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는 물[流水]도 수면 깊은 곳은 연못이 되는 것과 같은 경계이다. 연못에는 아홉 가지의 유형이 있지만 이번에 내가 계함에게 보여 준 것은 그 중 세 가지를 보였을 뿐이다.”     

다음날 계함이 다시 와서 호자를 보았는데 똑바로 서서 호자를 보기도 전에 놀라서 얼이 빠져서 도망쳤다. 호자가 그를 쫓아가라고 말하니 열자가 그를 쫓았으나 따라 잡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벌써 사라졌습니다. 종적을 감추어 쫓을 수가 없었습니다.”    

호자가 말했다.
“아까 나는 내 근본이 전혀 나타나지 않은 상태를 보여주었다. 나는 그와 함께 하면서 나 자신을 텅 비우고 욕심이 전혀 없는 모습으로 그를 따르기만 했다. 사물의 변화에 나를 그대로 맡겨 버렸으므로 그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나를 바람에 나부끼는 풀이라고 생각하고 또 바람에 파도치는 물결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도망치고 만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열자는 자기가 도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한 것이 없음을 알았다. 자신의 학문이 아직 멀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3년 동안 바깥 출입을 않고 무심히 지냈다. 아무 생각 없이 때로는 아내를 위하여 밥을 짓기도 하고, 돼지 기르기를 사람 먹이듯 정성을 다하는 동안 세상일에 좋아하고 싫어함이 없어졌다. 인위의 허식과 꾸밈이 없어지고 소박한 자연의 상태로 돌아갔다. 그리고 무심히 홀로 재 몸을 우뚝 세워 한결같음으로 지냈다.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제 본성이 흐린 적이 없었다. 열자는 이렇게 일생을 마쳤다.     

神巫(신무): 귀신처럼 잘 맞추는 무당.
季咸(계함): 인명. 巫(무)는 여자 무당이므로 계함이 여성이라는 설도 있음.
期以歲月旬日(기이세월순일): 연월과 상순, 하순 등의 날짜까지 맞춤.
皆棄而走(개기이주): 모두 가지고 있던 물건을 버리고 도망감.
壺子(호자): 인명. 列子(열자)의 스승이다.
旣其文(기기문) 未旣其實(미기기실): 껍데기는 다 전수해 주었지만 그 알맹이는 아직 전해주지 않음. 未旣(미기)는 아직 전해주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而固得道與(이고득도여): 너는 참으로 도를 터득했다고 생각하는가?
衆雌而無雄(중자이무웅) 而又奚卵焉(이우해란언): 암탉이 아무리 많아도 수탉이 없으면 또 어떻게 알을 부화할 수 있겠는가? 雌(자)는 文(문)을, 雄(웅)은 實(실)을, 卵(란)은 得道(득도)를 비유함.
而以道與世抗(이이도여세항) 必信(필신): 너는 도의 껍데기를 가지고 세상과 겨루어서 세상 사람들의 믿음을 얻으려 했다.
使人得而相女(사인득이상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너의 관상을 쉽게 알아맞히게 함.
嘗試與來(상시여래): 시험삼아 그를 데려옴.
以予示之(이여시지): 나를 그에게 보여 보라.
不以旬數矣(불이순수의): 열흘을 넘기지 못함.
濕灰(습회): 젖은 재. 생기라곤 전혀 없는 모습을 젖은 재에 비유함.
泣涕沾襟(읍체첨금): 옷섶을 적시며 눈물을 흘림.
鄕(향): 아까. 向(향) 또는 響(향)과 같이 쓰인다.
地文(지문): 대지의 무늬. 심경이 寂靜(적정)함을 형용한 것이다.
萌乎不震不止(맹호부진부지): 멍하니 움직이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음.
杜德機(두덕기): 生機(생기)가 막혀 버린 모습.
?矣(추의): 병이 나았다.
杜權(두권): 닫히고 막힌 가운데 움직임이 이미 나타났다.
天壤(천양): 하늘의 모습. 天象(천상).
機發於踵(기발어종): 生氣(생기)가 발뒤굼치에서 발생함.
善者機(선자기): 生機(생기). 善(선)은 生(생)의 뜻.
太沖莫勝(태충막승): 허무하고 흔적이라곤 전혀 없음. 太沖(태충)은 太虛(태허)이고, 莫勝(막승)은 無朕(무짐)이니 太虛(태허)하여 아무런 조짐이 없음을 비유함.
衡氣機(형기기): 氣機(기기)가 형평을 이룸. 곧 음양의 기가 치우침 없이 조화된 상태를 말함. 地文(지문)은 음기를 보여 준 것이고, 다음의 天壤(천양)은 양기를 보여 준 것이라면 여기의 太沖莫勝(태충막승)은 음양의 기가 고르게 조화된 상태를 보여 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함.
?桓之審爲淵(예환지심위연): 고래가 이리저리 헤엄치는 깊은 물이 연못이 됨. 桓(환)은 盤桓(반환)으로 이리저리 오가는 모습.
淵有九名(연유구명): 연못에는 아홉 가지 명칭이 있음.
此處三焉(차처삼언): 이번에 계함에게 보여준 것은 아홉 가지 중에 세 가지에 해당한다는 뜻. 세 개의 淵(연)이 윗 문장의 地文(지문), 天壤(천양), 太沖莫勝(태충막승)의 相(상)을 비유한 것임. ?桓(예환)은 杜氣機(두기기)[太沖莫勝(태충막승)]이고, 止水(지수)는 杜德機(두덕기)[地文(지문)]이며, 流水(유수)는 善者機(선자기)[天壤(천양)]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立未定(입미정): 선 채로 아직 앉지도 않음.
未始出吾宗(미시출오종): 일찍이 드러내지 않은 나의 근본인 대도. 근본인 도에서 떠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뜻함.
虛而委蛇(허이위사) :마음을 비우고 욕심이 전혀 없는 모습. 委蛇(위사)는 욕심이 없이 스스로 만족스러워하는 모습.
因以爲弟靡(인이위제미) 因以爲波流(인이위파류): 따라서 무엇이 무너져내린다고 생각함. ‘弟靡(제미)’와 ‘波流(파류)’는 모두 집착하는 바가 없음을 형용하는 말로, 풀이 바람 따라 흔들리고 물이 물결 따라 흐르는 것과 같이 하다.
爲其妻?(위기처찬): 아내를 위해 밥을 지음.
食豕如食人(사시여사인): 돼지 먹이기를 사람 먹이듯 함. 사람과 짐승의 구별을 잊어버림.
於事無與親(어사무여친) : 누구를 사사로이 친애하여 차별적으로 대하지 않음.
雕琢復朴(조탁복박): 겉을 다듬고 꾸미는 일을 버리고 순박한 데로 돌아감.
彫琢(조탁)은 새기고 쪼아대는 인위적인 행위. 朴(박)은 樸(박)과 같다.
塊然獨以形立(괴연독이형립): 모든 꾸밈을 버리고 일체의 편견과 차별을 넘어서 자유로운 도의 경지에 자신을 세웠음.
紛而封哉(분이봉재): 어지러이 만물과 뒤섞임. 곧 만물과 일체가 되었다는 뜻으로 일체의 대립을 모조리 싸 안는 혼돈의 세계에서 노니는 모습을 나타낸 것임.
一以是終(일이시종): 한결같이 이런 태도를 지키면서 일생을 마침.  
    

신통력을 가진 계함은 사람의 얼굴 모습에서 심기心氣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았다. 남의 운세를 점치는 면에서 보통 사람보다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득도인得道人 앞에서는 무력해지고 만다. 득도한 인물의 본바탕 마음은 아무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호자는 자유자재로 그의 심기心機를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깊은 심기를 연못에 비유했다. 깊은 연못은 사람들이 그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도인의 깊은 마음을 계함이 알아낼 수는 없는 일이다.    

자기를 주장하면 할수록 그 자기는 사라져가고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 곳에서 그 자기는 살아있는 것이다. 계함이 도망치는 것은 점을 잘 맞힌다는 자기의 고집 탓이요, 호자가 변함없이 살아서 숨을 쉬는 것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았던 까닭이 아닐까.     

‘지수止水의 못’은 전혀 움직임이 없어 지문관地文觀이 된다. 계함은 호자에게서 생기가 없는 ‘축축한 재’를 보고 곧 죽을 것을 예언하였다. 고래가 헤엄치는[?桓] 못은 고요한 가운데 출렁임[靜中微動]이 있어 천양관天壤觀이 되니, 생명의 기운이 돋아나는 모습을 예견하였다. 유수流水의 못은 수면은 흐름이 있으나 아래 깊은 물속은 고요하여 평형을 이루므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도의 묘용이 이와 같아서 천변만화千變萬化를 다 그려낼 수 없지만 이 3관三觀만을 보인 것이다.’    

이 깊은 도의 안을 어떻게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열자는 도를 글로만 공부했지만 자신의 몸으로 수행하여 알을 품은 득도의 단계가 아니었다. 어설픈 앎으로 떠들어 봤지만 계함에게 그의 속마음을 쉽게 들키고 만 셈이다. 글공부의 한계를 알고 분발하여 마음 공부에 힘쓰게 된 것이다.    

오히려 마음을 비움, 무엇을 하겠다 함을 없애는 게 필요했다. 버려서 채움이 비움이고 하지 않음으로 함이 무위다. 열자는 비우는 공부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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