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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작은집 日本王室㉚백제 성왕 日에 다방면의 문화이식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6/02/29 [11:57]
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한민족의 작은집 日本王室㉚백제 성왕 日에 다방면의 문화이식

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6/02/29 [11:57]

오경박사·易·채약사 등 인간문화재 수출

전염병 창궐, 國神과 불교간 논쟁 치열
 
백제 성왕은 고구려와 신라로부터 때로는 어려움을 느끼면서 까지도 일본에 대해선 아낌없는 문화수출에 힘썼다. 그것은 단순한 수출만이 아닌 이식이었다.
 
그것은 다방면에서 이루어졌다. 즉, 계체 왕 7년에 보낸 오경박사 단양이(段揚爾)에 이은 고급 한문의 전수, 흠명 13년에 시작된 금동제 불상과 불경의 수출, 흠명 15년에 행해진 역박사(易博士), 역박사(曆博士), 채약사, 악사 등 대규모 인간문화재 수출인 것이다.
 
흠명 왕에 이어 제30세 민달(敏達: 비다쓰)왕이 등장한다. 그는 백제 외손 흠명왕의 둘째아들이므로 한민족계임이 틀림없다. 민달왕은 부왕 흠명 왕이 신라와는 숙적관계였으나 고구려와 백제에 대해선 친절을 다하는 것을 보고 배웠다.
 
민달왕은 즉위 초 물부(物部: 모노노베)의 궁삭수옥(弓削守屋: 유게노 모리야)을 대연(大連)으로, 소아마자(蘇我馬子: 소가노 우마꼬)를 대신으로 삼았다.
 
소아마자의 ‘대연’은 대신과 같은 높은 벼슬이름이다. 그는 백제목씨의 후손으로 한민족임이 분명하다. 궁삭수옥도 그 성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일본에 기술자로 건너갔던 궁삭공인(工人)의 후예라고 볼 때 그 역시 백제계 한민족이다.
 
서기 552년 4월3일 즉위한 민달왕은 5월에 이르러 그가 즉위하기 전 일본에 건너온 고구려 사신들이 여태 용무를 마치지 못하고 있는 것을 기억하고 그를 불러들였다. 왕은 여러 신하들을 고구려 사신들이 머무르고 있는 상락관(相樂館)에 보내 그들이 바치고자 하는 선물을 자기가 있는 서울(京師)로 보내라고 했다. 그리고 고구려 조정에서 보낸 국서(國書)를 여러 대신들에게 내 주며 이를 읽고 뜻을 해석케 했다.
 
그런데 3일이 지나도록 누구 한 사람 읽는 자가 없었다. 이 때 한민족계(백제인) 왕진이(王辰爾: 와신니)가 그것을 해독해 냈다고 한다. 왕은 대신들과 같이 왕진이를 크게 칭찬했다. 왕은 “이제부터 내 가까이에서 일을 하라”고 했다. 백제 출신 왕진이는 민달왕의 궁중에서 일하게 됐다.
 
민달 왕 13년(565년) 또 다시 악성전염병이 유행했다. 수옥(守屋)대연이 왕에게 “지금 유행하는 병은 소아(蘇我)대신이 불교를 일으킨 탓입니다”고 일렀다. 이 말을 들은 왕은 “불교를 처단하라”고 했다.
수옥대연이 직접 절에 들어가 법당과 불상, 불탑 등을 불사르고 비구니(여자승려)들을 잡아다가 법의(法衣)를 벗기고 매질한 다음 감금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때 전염병이 더욱 심해지니 ‘불상과 불당을 불태운 탓이다’는 유언비어가 나돌게 됐다.
 
민달 왕이 임나(任那)를 재건할 양 판전이자왕(坂田耳子王)을 사자(使者)로 삼은 것이 이때의 일인데 졸지에 왕과 대연이 종기를 앓게 됐다.
 
이 때 또다시 창(瘡)을 앓아 죽는 자 수없이 많았다. 이 병을 앓는 환자의 증세는 화상을 입은 것 같고, 심한 구타를 당한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모두가 슬피 울면서 죽어 갔다고 한다. 이런 참혹한 창병의 만연은 바로 불상을 태운 죄라는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이다.
 
이에 마자숙니(馬子宿禰)가 민달왕에게 아뢰기를 “질병이 이렇듯 나아지질 않으니 삼보(三寶)의 힘을 입지 않으면 구하기 어렵겠습니다.” 했다.
 
왕은 마자숙니에게 “너 혼자만 불법을 행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체 금단하라” 하고는 세 사람의 승려를 마자숙니에게로 되돌려 주었다.
 
민달왕은 더욱 병이 심해져 사망하고 31세 용명왕(用明王)이 즉위한다. 용명은 백제계 흠명왕의 넷째아들이다. 이름은 귤풍일(橘豊日). 어머니는 소아대신(蘇我大臣) 도목숙니(稻目宿禰)의 딸 견염원(堅鹽媛).
 
흠명왕은 즉위 2년 4월에 병을 얻었다. 군신들이 모여 병을 간호 했으나 별로 효험이 없었다.
 
용명왕은 “내가 삼보에 귀의 하겠으니 경들은 상의하라”고 했다. 군신들이 조정에 모여 의논하는데 수옥대연(守屋大連)은 그 반대의 주장을 폈다.
 
“왕은 어찌 국신(國神)을 배반하고 다른 신을 섬기려 하나이까? 그 연유를 알 수 없습니다.”
이때 소아(蘇我) 마자숙니(馬子宿禰) 대신이 “마땅히 조칙(詔勅)에 따라 받들 것이지 감히 이의를 제기 하느냐” 했다.
 
이어 왕의 아우와 왕자들이 풍국법사(豐國法師: 백제인)를 데리고 내전으로 들어갔다. 이때 수옥대연이 눈을 흘겨보고 크게 노했다고 한다. 이 후 왕이 죽었다.
 
이 같은 상황은 국신을 받드는 측과 불교를 숭배하는 측과의 싸움이 치열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결국 민달왕과 용명왕은 불교논쟁으로 인한 희생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기획특집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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