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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작은집 일본왕실㊱진명여왕의 연호 ‘대화’에 따라 국호를 ‘大和國’으로

김주호 기획특집본부장 | 기사입력 2016/06/28 [06:01]
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한민족의 작은집 일본왕실㊱진명여왕의 연호 ‘대화’에 따라 국호를 ‘大和國’으로

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김주호 기획특집본부장 | 입력 : 2016/06/28 [06:01]
효덕왕 신라 연호 따라 ‘大和國 ’국호 정해
김춘추 문물이식에 자문역할, 국호제정에 영향
 
왜 왕조는 백제계에서 다시 신라계가 자리를 잡게 된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상황변화에 따라 정세변화를 같이해온 왜 왕조 역시 황극(皇極)-효덕(孝德: 고오도꾸) 왕조에서도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평양성과 요동성을 에워쌌다. 그러니 요동과 한반도, 왜지는 완전히 나·당 연합군의 제압 하에 들어가고 만다.
 
이러한 주변국가 세력의 변화에 따라서 왜 왕조에 신 정권이 들어섰으니 바로 신라 계 효덕왕조인 것이다. 효덕왕은 황극여왕의 동모제(同母弟)라고 전해진다. 그는 일본유사이래 처음으로 연호를 정했는데 바로 대화(大和)이다. 효덕왕은 법제, 관제 기타 여러 가지 문물제도를 신라와 당의 것을 모방하고 이식했으니 이런 사실을 대화개혁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라는 법흥왕 7년(서기 520년)법령을 정하고 백관들에게 공복(公服)을 제정했는데 이는 생겨나기 98년 전의 일이다. 이때 신라에선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돌아가시고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즉위했다. 진덕여왕은 그 연호를 대화(大和)라 했고, 김춘추(金春秋)가 실권을 잡을 때이다.
 
김춘추는 볼모로 잡아온 고향현리(高向玄理: 다까무꾸 구에무리)를 대동하고 왜국에 들어가 진행 중인 대화개혁에 박차를 가한다. 그는 또 당시에까지 불리어 오던 왜라는 이름의 국명을 바꿔준다. 진명여왕의 연호 ‘대화’에 따라 국호를 ‘대화국(大和國)’으로 정한 것이다. 이것이 일본 열도 내에 대화국이 생겨난 연유인 것이다.
 
일본 상고 문헌에는 왜가 대화국으로 바뀌어 진 역사사실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름은 그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는 것이며, 그 나라의 국호를 제정한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다. 반듯이 그럴만한 명백하고도 뚜렷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일본 사가들이 이 역사적인 대사건의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공개하지 못할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다.
 
어쨌든 신라 계 효덕왕이 진덕여왕의 연호 ‘대화’를 따라 그 새 나라의 국호를 ‘대화국’이라 정했다고 본다.
 
제36대 효덕왕은 연호를 대화로 제정한 다음 소아입록(蘇我入鹿) 부자(父子)를 제가하는데 공이 컸던 아부내마려(阿部內麻呂: 아베노 우찌마로)와 소아창산전석천마려(蘇我倉山田石川麻呂: 소가노구라야 마다이시 가와마루), 중신겸자(中臣鎌子: 나까도미노 가마꼬)를 좌우 대신으로 삼았다.
 
또 중대형(中大兄: 나까노 오에)을 왕태자로 봉하고 민법사(旼法師: 미무호오시)스님과 고향사현리(高向史玄理: 다까무꾸노 후비도 구에무리)를 나라의 박사로 삼고 난파(難波: 나니와)에다 도읍을 옮겼다. 그리고 646년 1월 과감한 대화개혁을 단행했다.
 
⓵호적을 편성하며, 밭두둑을 검사하고 고쳐서 국가행정의 기본을 정리 했으며 ⓶전국의 토지와 백성을 국유지, 국민으로 하고 ⓷역마제를 설치, 국가공무의 교통을 원활히 하고 ⓸전국을 국·군·리의 획일적인 행정구획제로 했으며 ⓹묘제와 장례법을 설치, 후장의 폐해를 지양하고 순장을 금지하여 그 악습을 없앴다.
 
일본은 애써 사실기록 감추며 왜곡 날조로 우롱
 
이런 등의 대화개혁으로 왜국을 봉건중앙집권제 국가의 체제로 개편했다. 이는 일찍이 성덕태자(聖德太子)가 백제의 문물을 받아들여 헌법 17조를 제정한 이래 일대 개혁인 것이다.
 
신라가 율령을 제정하고 백관의 공직자들에게 공복(公服)을 착용하게 한 것이 법흥왕 7년인데 이는 이미 앞에 언급했듯이 당나라가 생겨나기 거의 1세기나 앞선 시기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 보다 율령제도가 빨랐다. 그래서 성덕태자 이래로 왕권의 확립과 중앙집권제의 확립을 위해 고구려, 백제로부터 각종 문물제도를 수입 모방해 가지고 시행 했던 것이다.
 
물론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가 중원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왜에서도 유학생들을 통해 그들의 제도를 도입한 것도 간혹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그들의 제도는 대부분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율령을 수입해 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항상 중국으로부터 직수입해 간 것으로 애써 변명하고 있다.
 
서기 648년 신라 진덕여왕 2년(효덕왕 4년) 신라의 김춘추가 신라 계 효덕왕을 예방했다. 이때는 효덕왕이 대화개혁을 단행하던 때라 김춘추의 자문이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하여 진덕여왕의 연호를 따 국호를 ‘대화국’으로 통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김춘추가 적극 독려 주장한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사가들은 김춘추의 이 같은 조언을 기록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를 인질로 삼았다는 등의 터무니없는 왜곡날조로 우롱하고 있는 것이다. (김주호 기획특집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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