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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작은집 日本王室㊴백제계 천지왕 죽자 近江朝 후계 싸움 돌입

김주호 기획특집본부장 | 기사입력 2016/07/21 [09:24]
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한민족의 작은집 日本王室㊴백제계 천지왕 죽자 近江朝 후계 싸움 돌입

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김주호 기획특집본부장 | 입력 : 2016/07/21 [09:24]
신라계 사위 大海人 임신란 일으켜 왕위쟁취
39대 天武王에 즉위, 신라와 사절교환 상국예우
 
일본 땅에 새로이 건설된 근강조(近江朝)는 달리 표현하면 ‘신백제국’과 같다고 본다. 왜냐하면 근강조정은 백제계 일색이기 때문이다.
이 천지왕(天智王)이 671년 근강궁(近江宮)에서 눈을 감고 만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천지왕이 죽자 후계싸움이 벌어졌다. 천지왕은 병상에서 소아신(蘇我臣)인 안마려(安麻呂)를 보내어 황자 대해인(大海人:오호아마)을 불러들여 뒤를 이어 줄 것을 상의 했다. ‘짐의 병이 심하여 후사 홍업(鴻業)을 너에게 부탁 하노라’했다.
 
그런데 안마려가 대해인에게 ‘훗날을 위하여 신중히 처리할 것’을 미리 말해주었다. 그가 이를 알아차리고 대우(大友)왕자를 후계자로 세울 것을 권하고 자신은 출가수도 할 것을 원하니 천지왕이 이를 허락하였으므로 승복을 입고 길야산(吉野山)으로 출가했다.
 
당시 대해인은 일본의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천지왕이 그를 부른 것은 그의 속셈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만약 그가 왕위를 이어받겠다고 하면 그를 살해해 버릴 생각이었을 것이다.
 
천지왕은 딸 우노왕녀(菟野王女)를 정략적으로 대해인과 결혼 시킨 바 있다. 그러니 대해인은 천지왕의 사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왕과 이하(伊賀)의 채녀(采女)와의 사이에 태어난 대우(大友)왕자를 태자로 삼았다. 천지왕이 12월3일 죽자 근강조정은 대해인을 두려워하여 그를 토벌하려 계획을 짰다. 그러나 대해인이 그냥 앉아서 당할 위인이 아니었다.
 
대해인은 고시(高市)왕과 박정연웅(朴井連雄) 등 측근들과 여러 추종자들, 미농국(美濃國), 길비국(吉備國), 대왜국(大倭國)의 일부 세력을 규합, 3개월간의 전투 끝에 근강조의 제2대왕 대우의 목을 베고 승리하고 만다. 이것이 일본 상고사상 유명한 임신란(壬申亂)인 것이다.
 
이처럼 백제계 천지왕이 후사를 요구하자 이를 거절하고 길야산에 들어가 때를 기다렸다가 마침내 임신란을 일으켜 근강조를 무너뜨린 것이다.
 
이 대해인이 제39대 천무(天武)왕에 즉위한다. 『일본서기』에는 그는 용자가 준수하고, 지각이 있고, 천문에 밝고, 둔갑술에도 능하다고 했다. 또 신라계 중신 등원(藤原)대신(藤原鎌足)의 딸 빙상랑(氷上娘)을 부인으로 삼았다. 또한 등원씨와의 관계도 각별했다. 이 천무왕은 신라계 사람이다.
 
왕위에 오른 대해인은 근강 조에 가담했던 소아신 적형(蘇我臣 赤兄), 소하신 과안(果安), 중신금연(中臣金連) 등을 참하고 만다. 그밖에 다수의 근강 조 관계자들을 유형에 처한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도 그는 백제계가 아님은 사실이다. 즉위 후의 모든 조치들에 대해서도 이 같은 사실은 더욱 드러난다.
 
천무왕은 즉위 후 임신란의 공신들을 표창하고, 특히 근강 조에 가담하여 그에게 반항을 계속하였던 대화국의 백제인 들에게 조서를 내렸다.
 
‘너희 당족(黨族)이 일곱 가지의 불법을 범하였다. 추고·근강 조에 이르기까지 항상 너희들이 모의하고 일을 만들었다. 이제 짐의 세상에 이르러 너희들의 불가를 책하여 범한 바 죄에 따라 벌할 것이다. …지금 이후 범하는 자 있으면 용서하지 아니할 것이다.’
 
천무왕은 여러 문물제도를 개혁 했는데 특히 천지왕이 친왕, 제왕(諸王), 제신과 모든 사찰에 하사하였던 토지와 산림을 회수하고 공민과 공직에 관한 제도를 확립하여 중앙집권제 국가체제를 확립하였다.
 
‘조신과 백료들은 그 손위의 친족과 씨족의 장 이외의 자들에게는 세배하지 못한다. 무릇 제왕(諸王)은 친모라 할지라도 왕성(王姓)이 아닌 여인에게는 절하지 못한다. 모든 벼슬아치들은 천모(賤母)에게는 절하지 못한다.’
 
이 같은 제도의 확립은 신라계 효덕왕이 단행한 대화개혁 그것과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다.
천무왕은 또한 신라와의 사절 교환을 빈번히 가졌다. 신라 사절들을 상국의 사신 격으로 예우했다. 천무정권으로서는 신라국이 웅진도독 부여융의 세력을 제거해 준 것에 연유한 것이 아닌가 한다.
 
천무왕조에서는 신라왕자들이 자주 방문하게 되는데 이는 일찍 백제계의 왜국을 백제왕자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천무왕의 혈육은 신라왕실과 연결되고 있다 할 것이다. (김주호 기획특집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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