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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작은집 일본왕실㊶(마지막 회)

김주호 기획특집본부장 | 기사입력 2016/07/30 [08:02]
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한민족의 작은집 일본왕실㊶(마지막 회)

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김주호 기획특집본부장 | 입력 : 2016/07/30 [08:02]
 
제왕의 딸’불린 지통여왕은 백제계

역사 왜곡하며 은인의 모국에 약탈·침략 일관
일본왕실의 핏줄 역사 바로잡아 선린우호를
 
 
제40대 왕위에 오른 지통(持統)여왕의 이름은 천고원 광야희(天高原 廣野姬). 『일본서기』에는 천지왕의 둘째딸이라고 했다.
 
그는 제명여왕 3년에 천무왕의 왕비가 되었다. 그는 비록 제왕(帝王)의 딸이나 예절을 좋아하고 검소하며 모의(母儀)와 덕이 있다고 했다.
 
『일본서기』상에 다섯 여왕 중 신공(神功)여왕에게는 시호에 ‘왕’이라는 글자조차 없으며, 따라서 신공을 빼면 지통 까지 40대 왕이 된다. 또 백제 목씨(木氏)의 딸인 추고(推古)여왕에게는 왕자(王字)는 넣어 주었으나 천자(天字)를 넣진 않았다.
 
그런데 백제 무왕의 딸인 황극·제명여왕에게 천자(字)를 붙인바 있는데 이제 지통여왕에게도 이 같은 ‘천(天)’자를 붙인 것이다. 이는 그가 백제왕계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특히 지통여왕에게는 전례 없이 ‘비록 제왕의 딸’이라고 했는데 지금까지 역대 일본 왕 가운데 많은 왕녀를 두었으나 일체 ‘제왕의 딸’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오직 지통여왕에게만 그렇게 기록해 놓고 있는 것이다. 그는 천무 왕이 죽자 재빠르게 태자 초벽(草壁)을 제쳐 놓고 임시로 조정을 맡아 왕권을 대행한다. 그리하여 모반을 꾀한 천무왕의 셋째아들 대진(大津)왕자를 살해하고 그 세력을 제거한다.
 
천무조의 실력자와 정적들을 제거한 지통은 명실 공히 조정(朝政)의 전권을 쥐게 되는 것이다. 그 3년 후 초벽태자가 죽자 비로소 왕위에 올랐다.
 
사실 초벽태자는 천무 10년 2월 태자로 책봉 되어 부왕을 도와 조정 일을 보았다. 또 천무 12년 2월 왕자 대진 역시 이에 개입한다. 그리하여 천무 15년 공동 집권자가 되어 연호를 주조(朱鳥)로 고친다. 초벽태자는 죽을 때까지 연호를 ‘주조’로 사용했다. 그러한 초벽태자가 대진왕자에 이어 사실상 제거당한 것이다.
 
대진 역시 지통의 소생은 아니지만 인물이 우수 했던 것 같다. 용모가 단정하고 능변가이고, 다재 했으며, 특히 시문(詩文)을 좋아하여 시와 부(賦)를 일으켰으니 일본 내에서 시부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부’는 시의 일종으로 풍(風), 아(雅), 송(頌), 지(地), 부(賦), 흥(興) 등 여섯 종류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부’는 고시(古詩)의 한 종류로서 이것을 잘 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부’는 감상을 느낀 그대로 적는 한시 체(漢詩 體)의 하나이며, 글귀 끝에 운을 달고 대(對)를 맞추어 짓는 글이다.
 
지통여왕은 이 시부에 능한 대진을 죽인 것이다. 왕위 찬탈 전으로 아까운 인물을 잃은 셈이다. 이때 그의 나이는 34세였다.
 
『일본서기』에는 후세의 사가들이 곳곳에 가필 내지 왜곡한 부분이 많지만 이 지통기에도 예외는 아니다.
 
지통 원년 9월23일 신라가 왕자 김상림(金霜林) 등 4명을 보내어 ‘국정을 주청(奏請)하다’ 한 대목에서도 이를 볼 수 있다.
 
주청은 국정을 위에 올려 재가를 청한다는 말인데 그러한 일은 종주국과 종속국 간에서만 행해지는 일이다.
 
통일국가 신라는 이때 당나라와의 8년 싸움에서 당나라 세력을 모두 몰아냄으로써 강성하던 때이다. 그러한 신라세력이 일본국가에 영향을 주어 천무왕조가 생겨나게 했던 것은 이미 아는 사실이다. 결국 천무가 백제계 천지 왕을 제거하고 집권하게 되어 신라를 그 상국으로 받들어 오고 있는 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신라의 신문왕이 자기나라의 국정을 일본여왕 지통에게 주청을 올려 재가를 받았다 하는 이 기록은 그야말로 언어도단이고 왜곡날조이다.
 
즉위한지 2~3년 밖에 되지 않아 아직 왕정에 경륜도 없는 그에게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 세력까지 몰아내는 등 강성을 자랑하는 신라가 과연 국정을 주청하여 재가를 받아가는 따위의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역시 『일본서기』를 집필한 당시의 집권층과 사가들이 백제계 출신으로서 신라에 대한 감정이 컸기 때문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지금까지 일본의 신대(神代) 상·하, 신무왕부터 지통여왕(40대)까지의 왕실사를 중심한 일본역사를 살펴보았다. 일본의 왕실계통은 부여, 신라, 고구려, 백제계의 혈통으로 이지고 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그리고 일본역사의 출발과 전개과정 역시 삼한삼국의 영향 하에서 이루어졌음을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삼한 삼국이 없다면 일본의 상고역사도 없는 것이다. 일본상고사는 한국사의 연장선상에서만이 설명 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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