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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나서리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11/17 [08:12]
-위대한 선각자 이암, 홍암선생을 기리며

지금 내가 나서리

-위대한 선각자 이암, 홍암선생을 기리며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11/17 [08:12]
情겨워 절로 나는 단군님 세운 참성단 위
선풍(仙風)이 휘몰아 쳐오네
산천은 의구하지만 우리 동방의 미풍(美風)은 어디가고
해달은 언제나 새로워지는데
와글거리는 외국관사(몽고병)가 웬 말인가!
부모님 그리워 산(山)에 올라갔다가
그 옛날 태산에 오른 공자님처럼 나도 큰 파도를 쳐다본다.
어두운 동방의 거리에 누가 밝은 등불을 비출 것인가
우리 동방세계의 평안을 위해 지금 내가 나서리.
 
행촌 이암선생의 시이다.
 
행촌 이암선생이 열 살의 나이에 마니산에 올라 “내가 이 국난을 위하여 내가 나서리.” 라는 다짐을 하며 2천 병사를 모아 적들과 맞서 싸웠다. 그는 서북면 도원수가 되어 홍건적이 경성을 핍박하여 왕을 따라 남행하였고 적이 평정됨에 공민왕은 그의 공적을 치하하며 철성부원군에 봉하였다. 그 후 이암 선생은 마니산 기슭에서 역사서인 단군세기를 기록하신다.
 
북한에서 목함 지뢰 사건으로 준 전시상태를 선포하고 전쟁의 힘이 고조될 때, 정기휴가를 반납하고 제대를 미루던 장병들이 오늘의 애국 장병이다. SK그룹에서 그들의 충성심과 애국심을 칭찬하여 기업에서 특채한다는 소식 또한 아름다운 소식이다.
 
국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지금 내가 나서리”하고 나서시던 수많은 애국의 순국선열이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역사 속에 970여 번의 침략을 받았음에도 그 많은 순간순간마다 “내가 나서리”하고 희생 순국했던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이 오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다.
 
독립운동의 아버지라고 일컬은 나철 홍암선생님 99주기 추모가(10월8일) 보성군민의 정성으로 거행됐다. 선생은 1863년 12월 2일 전남 보성군 벌교의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탄생하셨다. 유학의 대가인 왕석보 선생에게 한학을 수학하시고 29살에 대과에 급제하셨다.
 
승정원과 승문원 요직을 거치면서 고종황제의 사랑을 받았지만 1905년 을사늑약을 수치로 생각하시고 “내가 나서리”마음을 정하시고 45세에 을사오적(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을 처단하기 위해 암살단을 조직하여 실행했으나 실패하고 10년형을 선고받고 전남 신안군 지도로 유배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사면되셨다.
 
1909년 민족의 국교 대종교를 중광(重光)하시고 민족의 얼을 바로세우고 민족의 혼을 일으키는 것이 꺼져가는 나라를 세우는 길이라 생각하셨다. ‘나라 잃은 죄인이 어찌 세끼 밥을 먹을 수 있는가’ 하시며 하루 한 끼 식사에 한 가지 반찬으로 일생을 실천하셨고 추운 겨울에는 삼베옷으로 나라 잃은 아픔을 생각하시며 애국의 삶을 사시다가 한얼과 우리 국교와 인류를 위하여 라는 순명삼조를 남기시고 한울 길로 귀천하시었다. 이암선생이나 홍암선생이 지금 내가 나서리. 하고 애국애족의 본을 보이셨던 위대한 선각자시다.
 
나라의 환란이나 사회와 가정에서도 「지금 내가 나서리」 라는 교훈으로 오늘 국민의 심정에 하나 되길 기원해본다. (단군정신선양회장·전 대종교 총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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