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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의 자연애물론(自然愛物論)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12/10 [08:35]
“종교 초월해 깊은 신앙의 경지에는 자연의 사랑”

단군의 자연애물론(自然愛物論)

“종교 초월해 깊은 신앙의 경지에는 자연의 사랑”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12/10 [08:35]
“종교 초월해 깊은 신앙의 경지에는 자연의 사랑”

 
철인애물필극시종(哲人愛物必克始終)
밝은이의 사물사랑은 반드시 처음과 마침을 극진히 하느니라.

처음만 사랑하고 마침을 사랑하지 않으면 사물은 종국이 없나니 사물 사랑은 반드시 극종해야 하느니라. 참전계경에 자연 사랑에 대한 말씀이다.
 
팔조대고의 가르침에도 극애물(克愛物) ‘만물을 지극히 사랑하리라’라고 가르친다. 옛 우리 조상들은 하늘을 아버지로 섬기고 땅을 어머니로 섬기며 위로 하늘을 섬기고 아래로 대지를 사랑했다.
 
농부는 추수하며 떨어진 이삭을 줍지 않고 새와 들짐승에게 먹이를 제공했다. 과일 나무에도 열매를 모두 따지 않고 까치밥을 남기어 베푸는 넉넉한 인심이 시골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엊그제 장항에 작은 사찰 도일선원을 찾았다. 첫눈이 소복이 쌓이는데 요사채 집 앞에 눈꽃과 같이 노란 감이 나무에 가득 달려있었다. 온갖 새들이 눈 속에서 감을 먹고 있었다. 스님이 일부러 감을 수확하지 않으시고 새들의 겨울 양식으로 먹이 제공을 하시는 모습이 부처님의 자비가 새들에게도 전해지는 듯 훈훈했다.
 
대지의 작가 펄 벅 여사가 한국에서 신기한 모습을 보았다고 기록했다.
 
서양에서는 달구지에 짐을 가득 싣고 주인은 안장에서 채찍으로 소를 부리는 것이 평범한 모습인데 한국의 농부들은 소달구지에 추수한 볏단을 가득 싣고 소 주인도 함께 지게에 짐을 지고는 같이 걸으며 채찍은 보이지 않고 ‘이랴, 이랴’하며 소와 눈 맞추고 동행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 민족의 정(情)을 느끼고 보석 같은 민족이라고 극찬했다.
 
우리 민족이 갖은 순박한 정경이다. 아버님이 농사짓던 모습이 그립다. 아침 일찍 논, 밭에 나가시어 이야기 하신다. 벼 이삭을 만지며 중얼거리신다. 좀 더 여물어야겠다. 너는 키가 좀 더 커야겠다. 콩의 알이 너무 작다는 등 노랗게 익은 과일에겐 너는 참으로 빛깔이 곱다. 잘 컸다.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늘 중얼중얼 대화를 하신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논에는 농약을 안쳐도 도열병이 번지지 않았다. 아버님의 특별한 농사 비법이었다. 늘 자연과 함께 사랑하고 대화라는 모습이 선연히 그려진다. 부처님도 범강경에 온갖 중생이 다 나의 아버지요, 어머니거늘 죽이거나 해치는 짓은 나의 옛 몸을 먹는 것이다. 모든 땅과 물은 다 나의 옛 몸이고 다 나의 본래 몸이라 했다.
 
이슬람의 무함마드도 땅위를 기는 동물도 날개로 나는 새들도 너희와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일부이니라. 하나님은 성서에도 하나도 빠트리지 않으셨으니 그들 모두는 종말에 그들의 주님께 모여들 것이니라, 라고 했다.
 
성 프란시스는 나의 주님 당신은 형제인 바람과 공기 흐리거나 맑은 모든 날씨를 통해 찬양 맡으소서. 당신의 자매인 물과 어머니인 땅을 통해 찬양 받으소서. 당신의 자매인 물과 어머니인 땅을 통해 찬양 받으소서 하고 자연을 형제로 기도했다.
 
일찌기 단군 성조께서 우리 민족 경전을 통해 교육하신 놀라운 애물 사상의 철학이 우리 조상들의 생활 속에 녹아 있었다. 또한 종교를 초월해 깊은 신앙의 경지에서는 자연의 사랑이 극히 하나 됨을 느낄 수 있다. 온갖 만물과 자연의 풍요함 속에서도 오히려 부족함을 느끼고 만족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는 현대인들의 삶이 어리석어만 보인다. 대자연이 주는 신비한 향내를 즐길 줄 모르는 무지가 오히려 자연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내게 처해진 자연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행복을 만끽해야 한다. 풍류(風流)를 즐기던 우리 조상들처럼 이것이 단군성조의 자연사랑 순리이다. (단군정신선양회장·전 대종교 총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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