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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수의 일상에서 찾는 삶의 구원과 행복●"白髮三千丈 百尺竿頭 進一步"

박길수 | 기사입력 2022/02/23 [07:46]
백척간두에서 한 발 더 걸어나와 고요히 깨달은 그윽한 행복

박길수의 일상에서 찾는 삶의 구원과 행복●"白髮三千丈 百尺竿頭 進一步"

백척간두에서 한 발 더 걸어나와 고요히 깨달은 그윽한 행복

박길수 | 입력 : 2022/02/23 [07:46]

"하얗게 센 백발 지긋한 노인에게 닥친 백척간두 위기는 이승 삶 마지막을 재촉하는 한겨울밤 소낙비 같았지만, 한 발 더 내딛으니 그윽하고 아름다운 새 세상으로 이어지는 오묘하고 아기자기한 노년 삶의 길목이었네"

 

어느날 고희(古稀)를 넘긴 노년 부부에게 닥친 거친 삶의 변화가, 당시에는 마치 이승의 마지막을 예고하는 고난의 좌절스러운 공포처럼 보였지만, 그저 모르는 척 한밤 그대로 자고났더니, 오히려 여유롭고 편안하게 눈앞에 펼쳐진 깊이있는 노년 삶의 아련함이었다. 아롱거리며 피어오르는 백발삼천장 백척간두(白髮三千丈 百尺竿頭)에서 한 발 더 걸어나와 고요히 깨달은 그윽한 행복 그 자체였다.

 

내 아내는 평생 일밖에 모르고 살았다. 돈을 벌 줄만 알았지, 쓸 줄은 몰랐다. 남들이 다 다닌 학교도 남편이 사정사정해서 겨우 야간에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공기업을 퇴직한 남편이 이제 우리 일 그만하고 쉬면서 살자고 애걸복걸했지만, 아내는 숨어 일하면서 돈 벌 줄만 알았다. 그러다가 우리 부부는 그만 백발이 다 되어버렸고, 어느날 내 가련한 아내는 과로로 쓰러지고 말았다.

 

내 생명보다 더 귀한 아내는 지옥 같은 병원에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그대로 죽는 날만 기다리며 생기없는 회색 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병실에 의식 없이, 보호자 남편과 함께 감금당하고 말았다. 죽도록 일만 하다가 쓰러져, 이제는 깨어날 아무런 방법이 없어, 초라한 내 아내는 죽는 날만 기다리는 가엾은 노인이 되고 말았다. 죄없는 그녀가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남편과 함께 병원에 갇힌 채, 아무런 대책 없이 그대로 붙들려 죽을 날만 기다릴 처지가 되고 말다니! 세상에!

 

처음 일 년 내내, 남편은 불쌍한 아내 옆에 붙어 함께 잘 죽을 방법만 궁리하다가, 일 년이 지난 어느 초여름날 집에가서 죽는 게 더 낫겠다는 현명한 생각을 불현듯 하게 되었다. 참 다행이었다. 바로 아내를 들쳐업고 집으로 도망치듯 그 지옥을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의식 없이도 잘 살아갈 새 삶을 부부는 새롭게 생각해낸 것이다. 오묘하고 아늑한 노년의 고요하고 행복한 삶은 둘이 한 몸으로 살아갈 일임을 새롭게 깨달은 것이다. 백척간두 진일보 (百尺竿頭 進一步)한 것이다. 이대로 더 아프지만 말고, 말없이 껴안고 치료하며, 사랑만 하고 살아가면 되는 일이다.

 

모처럼 중노동에서 해방된 고집세고 어여뿐 아내는 비로소 따뜻하고 쾌적한 천국 같은 조용한 안방에서 거리낌없이 편하게 쉬고있다. 아늑한 십 층 산골 같은 안방은 남쪽으로 널찍하기만 하고, 시원한 조망이 대형 창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곳에는 하루 24시간 베토벤, 모차르트, 시벨리우스, 바하, 하이든의 교향곡과 협주곡이 늘 낮게 연주되고 있다. 우리 가곡 현제명의 "고향생각"도 아련하지만, 아내와 나는 베토벤 "전원"교향곡이 흐를 때 잔잔한 행복함을 느낀다. 진정 우리 둘은 "白髮三千丈 百尺竿頭 進一步" 했다.

 

필자 박길수는 이 시대를 성실하게 살아온 평범한 인물이다. 43년 결혼생활 중 6년여 전 느닷없는 아내의 뇌출혈로 불행이 시작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의식없는 아내를 편안한 집에서 보살피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을 땄다. 치료비와 생활비, 그리고 자신의 건강관리를 위해 장애인 도우미 자격증도 따서 출퇴근한다. 항상 아내 곁을 지키는 아버지를 위해 딸과 사위, 그리고 누구보다 예쁜 손녀가 합류했다. 그는 불행한 생활일 듯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고 구원도 받는다. 그리고 개인 블로그 박길수의 일기’(https://m.blog.naver.com/gsp0513)에서 그러한 일상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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