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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조 神武王은 신라국왕 祖令의 후예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05/29 [11:25]
한민족의 작은집 日本王室⑥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일본시조 神武王은 신라국왕 祖令의 후예

한민족의 작은집 日本王室⑥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05/29 [11:25]
성씨록 고사기 일본서기가 입증, 박혁거세의 동생

 
이미 살핀바와 같이 히꼬호호데미(彦火火出見)와 용녀(龍女)라는 도요다마히메(豊玉姬)와의 사이에 신무왕(神武王)의 생부(生父)인 히꼬나미 사다께 우가야 후까아에즈노 미꼬도(彦波瀲武 鸕鷀草葦不合命)를 낳는다. 이 아이가 나중에 이모인 다마요리 히메(玉依姬: 도요다마히메의 동생)와 결혼하여 네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그 넷째 아들이 신무왕이 된다.
 
일본의『일본서기(日本書紀)』,『고사기(古事記)』에 이어 서기 815년(弘仁 6년) 만다친왕(萬多親王)이 편찬한『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보면 신무왕의 출생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즉, 우경황별하(右京皇別下) 시라기(新良貴=신라<新羅>)조에 ‘彦波瀲武鸕鷀草葦不合尊男 稻飯命之後也. 是出於 新良國王 稻飯命. 出於 新羅國王者 祖令’이라고 한 것이다.
 
이 기록을 간단히 풀이하면 신라국왕 조령(祖令)의 후손이 ‘彦波(히꼬나미)…’ 이고, 이 ‘히
꼬나미…’의 아들이 신무왕(神武王)이다. 또 ‘히꼬나미…’는 ‘도반명(稻飯命)’의 후손이라고 했고, 신라국왕이 ‘도반명’이라고 했다. 이 기록은 또 신무왕은 신라국왕 조령(祖令)의 후예라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같은『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을 인용, 풀이해 놓은 또 다른 글(안동준<安東濬> 저『한족과 고대일본왕실(韓族과 古代日本王室)』23쪽)을 위의 원문과 중복을 피하고 보면 이렇다.
 
‘… 稻飮命之後也, 是於新羅國, 卽爲國王. 稻飮命者, 新羅國王之祖也’. 이 기록은 이나히노미꼬도(稻飮命)가 신라국왕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신라의 시조왕은 박혁거세(朴赫居世)이다. 따라서 ‘도반명’, ‘도음명(稻飮命)’은 신라의 시조 왕이라는 점에서 같은 인물 박혁거세를 말한 것이라 본다.
 
여기서 또 『고사기(古事記)』상권을 보자. 우가야후끼아에즈(𪁩茸草茸不合命 ) 조에는 “우가야후끼아에즈가 이모 왕의비고매명(王依毘古賣名)을 취해서 낳은 자식의 이름은 이쓰세노미꼬도(五瀨命), 이나히노미꼬도(稻氷命), 미께누노미꼬도(御毛沼命), 와까미께누노미꼬도(若御毛沼命)이다. …와까미께누노미꼬도는 파도를 밟고 도꼬요니구니(常世國)에 건너가고 이나히노미꼬도는 어머니의 나라라고 하여 바닷가로 가버렸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에 이나히노미꼬도(稻氷命)는『일본서기』나 『성씨록』의 ‘이나히노미꼬도(稻飮命)’를 말하는 것이다. 그 ‘氷’과 ‘飮’은 다같이 ‘이나히노미꼬도’로서 같은 사람인 박혁거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일본서기』‘신무기(神武記)’편은 다음과 말했다. “해궁유행(海宮遊幸)에서 용녀(龍女) ‘도요다마히메’가 신무왕을 낳은 후 바다로 들어갔다고 했으며, 신황승운(神皇承運)에서 ‘히꼬나미…’가 그의 이모 ‘다마요리이메’와 결혼하여 언오뢰(彦五瀨), 도반(稻飯), 삼모입야(三毛入野), 신무왕(神武王)을 낳다”고 했다.(이 신무왕 대목을 ‘가무야마도이와레히꼬<神日本磐余彦>’라고도 표현했음)
 
여기서 해궁유행은 히꼬히꼬데미의 형 호노스소리(火闌降命)이하를 말하고, 그 다음을 신황승운이라 한다.
 
『고사기』가 일본 내에서 후세에 쓰여 진 것이긴 하지만 신무왕의 아버지 ‘우가야…’가 신라에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것은 이모를 취해서 낳은 4형제 중 넷째아들이 바다를 건너가 신무왕이 되었다는 것을 “큰 이삭(穗)처럼 보이는 흰 파도를 타고 상세국(常世國= 일본을 지칭)으로 건넜다”고 한 기록을 보아도 그렇다. 두 형제는 물론 그의 아버지어머니도 한국(신라)에 있었다는 것이 이젠 확실해 지는 것이다.
 
여기서 4남 와까미께누미꼬도와 맏형 이쓰세노미꼬도 둘이서만 바다를 건너간 것으로 되어 있고, 다른 형제 2남(稻氷命= 朴赫居世)과 3남 미께누노미꼬도(御毛沼命)는 바다를 건너가지 않고 부모와 더불어 한국(신라)에 남아 있었다고 봐야겠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신라 건국 초 경주지방에 6촌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중턱에 있는 나정(蘿井) 곁 숲속에서 말 울음소리가 나기에 찾아가 보니 말은 없고 큰 알이 있어 그 속에서 한 아이가 나왔다. 이 아이를 양육하였는데 10여세에 이르러 기골이 준수하고 대인의 기품이 있어 6부락의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추대 했다고 한다.
 
일본의 사서는 ‘바닷가로 갔다’고 했고, 『삼국사기』는 ‘숲속에서 나왔다’고 했는데 난생설화 과정이 다를 뿐 별 차이가 없다. 신라는 바닷가에 있는 나라이고 바닷가에는 숲이 많은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양국의 시조탄생 설화가 자연스러움이 있다.
 
둘째아들 되는 ‘이나히노미꼬도(稻飮<氷>命=朴赫居世)’가 어머니의 나라이기 때문에 ‘바닷가로 가버렸다’고 한 것은 일본에서 있었던 행동을 말한 것이 아니라 신라에서의 행동을 말한 것이다. 만일 이것이 일본에서 있었던 일을 기술한 것이라면 ‘바다를 건너서 어머니의 나라로 가기 위해 배를 탔다’고 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신라와 일본 가운데 신라시조 왕이 2남 이나히노미꼬도(稻氷<飮>命)이고 일본의 시조 왕이 4남 와까미께누노미꼬도(若御毛沼命)라는 점에서 신라시조왕은 형이고 일본시조왕은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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