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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다케시마) 논란을 보며 -상대방 입장 조금이라도 알아보자

편집장 | 기사입력 2013/07/01 [12:51]
일본에서 ‘독도’, ‘한․일’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독도(다케시마) 논란을 보며 -상대방 입장 조금이라도 알아보자

일본에서 ‘독도’, ‘한․일’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편집장 | 입력 : 2013/07/01 [12:51]


 
▲ 이시바시 본지 일본 특파원     © 편집장
 
 
‘다케시마(독도)’ 영토문제를 놓고 ‘일․한’간의 정치적인 마찰이 커지고 있다. 한쪽에서 강력하게 나가면, 또 한쪽이 더 강력하게 응징해야 되기 때문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는 서로 냉정하게 대화하면서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외교를 담당하는 관료들은 국민들의 눈치를 보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면 바로 반발이 커지지 마련이니,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릴 여유가 없다. 외교라는 것은 서로 입장, 의견을 달리하는 국가간에 있어서 타협점을 찾아 내고 협상을 성사시키는 일이다.


 
그 타협점을 찾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사정을 잘 파악한 토대 위에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양보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배려가 있어야 한다. 의견일치가 된 부분이 생기면, 이 부분을 조금이라도 넓혀 가려고 해야 한다. 타협점을 찾는다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꼭 찾아 내야만 할 작업이다.


 
만약 대화나 협상을 이루지 못하고 각각 자기 주장만을 하게 되면, 최종적으로는 전쟁을 치르게 될 수밖에 없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외교적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하나 서로에게 막대한 희생이 따른다. 그러니 전쟁까지 이르지 않도록 서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기사 첫머리에서 ‘다케시마’, ‘일․한’이라는 단어를 일부러 썼는데, 일본측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는 것을 알리려는 의도가 있어서다. 일본에서 ‘독도’, ‘한․일’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것 자체가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종교 사이의 화합도 역시 국가 사이의 외교문제를 해결하는 방법과 비슷하다고 생각이 든다. 타종교와 화합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믿는 종단의 교리만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상대방의 교리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이 믿는 종교와의 공통점을 상대방의 종교 교리에 발견하게 되면, 서로 통하는 길이 열린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들 종단 간의 알력, 갈등만 증폭시킬 뿐이니 차라리 공통점을 강조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여기서 일본 에도(江戸)시대,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맺기 위해 인생을 바친 일본 문관이자 유학자를 소개해 본다. 바로 雨森芳洲(아메노모리 호슈․ 이하 ‘호슈’.사진)라는 주자학 계열의 유학자이다. 임진왜란 이후 정권을 잡은 사람은 에도시대를 연 德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그는 임진왜란 때에 조선으로 자기 군대들을 출정시킨 바가 없었고 조선과 우호관계를 맺으려고 조선 조정에 ‘조선통신사’ 사절 파견을 요청한 인물이었다. 이 에도시대는 250년 동안 조선과 좋은 관계를 맺은 시대였다.


호슈는 유학자인 스승의 권유로 對馬藩(쯔시마한)이라고 대마도 지방 정부에 출사하였다. 그는 먼저 중국어를 습득한 후에 부산에 있는 왜관(倭館)으로 건너가 3년 동안 체류하면서 조선어를 습득하였다. 조선에서 발행한 일본어사전인 ‘왜어유해(倭語類解)’의 편집을 협조하였고, 일본에서 처음으로 조선어 입문책인  ‘交隣須知(고우린수치)’를 집필한 다국어에 능통한 인물이었다. 전문 통역양성학교도 설립하였다. 호슈는 이런 우수한 어학력으로 높이 평가를 받으면서 조선통신사 사절을 에도(현재의 동경)까지 수행․안내하는 직책을 두 번이나 맡게 되었다.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는 데 있어서, 일본 정권인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와 조선통신사 사이에서 기 싸움을 벌이는 일이 종종 있었다. 각각 국가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서로 양보를 하지 않으려고 한 결과 난제를 일으킨 것이었다.
 
 
▲ '다케시마(독도)’ 영토문제를 놓고 ‘일․한’간의 정치적인 마찰이 커지고 있다. 한쪽에서 강력하게 나가면, 또 한쪽이 더 강력하게 응징해야 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한, 일간의 타협의 실마리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 편집장

 

 
일본이 옛날에 가야 일대를 지배했다가 신라로 인해 찬탈되고 이것을 되찾으려고 일본 천황이 신라를 정벌했다는 기술이 일본 옛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있다. 이 기술을 근거로 일본에서는 조선에 대한 우월감이 있었다. 이와 반대로 조선에서는 삼국시대에 일본으로 유교, 불교, 한문 등 고등문화를 전수해 줬다고 일본을 한수 아래로 여겼다. 그러니 각각 상대방을 누르려고 하는 배경이 깔려 있었다.


당시 재상(宰相)이었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일본 국왕 호칭 문제로 대립한 일이 있었다. 당시 일본 최고 권력자는 德川幕府(도쿠가와 바쿠후)의 장군(將軍)이었다. 그러나 국왕으로서는 따로 천황이 있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조선 조정에 일본 장군 앞으로 보내는 국서(國書)의 호칭을 종래의 ‘일본국대군(日本國大君)’가 아니고  ‘일본국왕’으로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 형식적 국가 상징인 천황과 실권자인 도쿠가와 장군으로 이원화돼 있는 권력구조를 악용한 것이었다. 여기서 대등한 교류관계 즉 교린(交隣)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호슈는 이에 반대하였다.


交隣(교린)이란 원래 조선시대 초기의 일본에 대한 외교책이었다. 일본에 대해서는 대등한 입장으로 교류하며 화평을 이루려고자 하는 것이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또한 정부 재정난을 개혁한 사람이었다. 그 일환으로 조선통신사에 대한 대우도 간소화하려고 하였다. 사절에 제공할 식사량을 줄이거나 마중하러 나오는 사람을 장관급에서 차관급으로 낮췄다. 이 일에 대해서도 예의에 어긋한 행동이라고 호슈는 정부에 항의하였다.


문화의 차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문제도 생겼다. 국휘(國揮)분쟁이었다. 조선통신사가 일본 장군에게 받은 답례 국서 중에서 조선 임금의 휘를 쓴 한자가 있는 것을 발견하여 문제가 발생하였다. 일본 문화로서는 주군(主君) 이름의 한 한자를 신하에게 하사하고 신하의 주군에 대한 충성심을 강화시키는 일이 많았다. 예를 들어 德川幕府(도쿠가와 바쿠후) 장군의 이름에는 ‘家’ 자가 들어간 예가 많았는데, 2대 장군의 경우 달랐다.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가 정권 잡기 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하데요시(豊臣秀吉)의 신하였고 ‘秀’ 자를 받고서는 아들 이름을 ‘德川秀忠’으로 개명시킨 일이 있었다. 이렇게 이름에 대한 개념이 일본과 조선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호슈가 ‘交隣提醒(교린테이세이)’라고 외교에 임하는 자세에 언급한 책을 썼는데, 그 책 내용을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다.


호슈가 살았던 시대는 일본과 조선이 교린관계를 맺고 더 이상 일본이 적국(敵國)이 아닌데도 조선측에서는 아직도 적국이라고 문서에 쓰고 있는 점을 지적하였다. 대마도에서는 지형적으로 평야가 없기 때문에 쌀이 잘 생산되지 않아 조선에서도 쌀을 조달하였다. 이 사실을 가지고 대마도가 조선의 직할령이 된 것처럼 ‘한베이(藩屛)’라는 단어를 쓰는 것도 못 마땅하게 여겼다.


명나라에서는 조선을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 아니면 ‘동방예의지방(東方禮儀之邦)’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명나라에서 볼 때 조공을 제대로 받치는 나라로서 조선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명나라에 조공한 적이 없어서 말 그대로 조선을 예의 바른 백성들이 사는 나라로 생각했다. 이런 일본사람의 착각을 지적한 바가 있었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은 ‘誠信之交(성신지교)’이었다. 책 첫머리에 조선의 역사, 풍속, 사고방식, 예법을 아는 것이 ‘간요(肝要)’하다고 저술하였고 마지막 장(章)에는 ‘성신지교(誠信之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상대방을 속이려고 하지 말고 싸우지도 말 것 ▲진실을 가지고 교제할 것을 성신이라 했다. 진실한 마음으로 상대방과 접하며 서로 신뢰관계를 만든 토대 위에서 대등한 입장에서 교섭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현대 외교에 있어서도 우선 자기 나라의 사정을 아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이상 상대방 나라의 실상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호슈는 조선어 습득 뿐만 아니라 조선의 역사, 문화, 품속, 예의 등 조선의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조선인의 사고방식의 배경을 알아야 그들의 속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교에서는 서로 입장이나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대립하기 쉬운데, 이것을 어떻게 조정할 수 있는지가 외교사무관의 능력에 딸려 있다. 호슈는 그 근간 사상으로 ‘誠信(성신)’을 두었다.


문제가 무엇 때문에 발생하는가를 통찰한 후에, 도리에 비추어 보면서 판단하고 성의 있게 시비를 가리고 대처하려고 한 것이다. 위와 같은 자세는 외교 뿐만 아니라 종교화합를 이루기 위한 자세로서도 필요하지 않겠는냐는 필자의 생각이다.


우선 상대방에 대한 관심부터 가져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예를 들어 일본 오키나와(沖縄)현을 태풍이 지나가면서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고 하면. 일본국민들의 관심이 오키나와에 집중하나, 태풍이 지나고 나서는 어디를 향하는지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처럼 처가집이 한국에 있는 사람은 처가집이 피해를 입을까봐 계속해서 걱정되며, 관심이 끊이지 않는다. 이렇게 양국가 국민들이 이런 관심부터 시작하는 것이 양호관계를 맺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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