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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25) 열반묘심 정법안장과 한국불교 정통법맥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3/06/19 [06:44]
통불교적 전통은 어디로 가고, 선맥만 남아 있는 우리 불교 정당한가?

종횡무진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25) 열반묘심 정법안장과 한국불교 정통법맥

통불교적 전통은 어디로 가고, 선맥만 남아 있는 우리 불교 정당한가?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3/06/19 [06:44]

참으로 한국불교를 한마디로 규정하기가 난감하다. 분명 한국불교의 전반적인 경향은 통불교인데, 선불교적인 맥락에서 보면 한국불교는 선종불교의 전통에만 집착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든다. 한국불교에서는 깨달음이나 선맥(禪脈)에 의한 정통법맥의 계보가 없으면 비주류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선원(禪院)에서 참선을 하는 선사가 아니면 맥을 추지 못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에서 겨울이면 철새가 이곳 호수에 와서 겨울을 난다. 인도 왕사성 근교 고라 카토라 호수.  © CRS NEWS

 

부처님은 84천 법문을 설했는데, 영산회상에서 정법안장(正法眼藏).열반묘심(涅槃妙心실상무상(實相無相미묘정법(微妙正法) 진실한 법의 모습즉 실상(實相)아무런 모습이 없다즉 무상이라는 심인(心印)의 핵심을 가섭존자에게 전해주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 방법은 염화미소(拈花微笑)였다. 남방불교와는 완전히 다른 전통인데, 동아시아 선종불교에서는 영산회상에서의 염화미소가 가히 절대적인 선언적 명제가 되어 있다. 한국불교에서는 감히 누구도 이런 선언적 명제에 토를 달을 수가 없다.

 

▲ 영취산 정상에는 일본의 한 종파인 일본산 묘법사에서 세운 세계평화탑(비샤샨티 스투파)이 서 있다.  © CRS NEWS

 

이런 기록에 대한 경전적 근거는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에 최초로 나타나고 있다. 석가모니가 영산(靈山)에 있을 때 범왕(梵王)이 금색의 바라화(波羅花)를 바치면서 설법을 청하였다. 그 때 석가모니가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자 모든 사람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 망연하였는데, 대가섭(大迦葉)만이 미소를 지었다. 이에 석가모니는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열반묘심(涅槃妙心)과 실상무상(實相無相미묘정법(微妙正法)이 있으니, 이를 대가섭에게 부촉하노라.”라고 하였다. 그 뒤 이 내용은 중국의 여러 선서(禪書)에 인용되면서 선종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내용으로 채택되었다. 우리나라 선종의 경우에도 석가모니가 왜 꽃을 들었으며, 가섭은 왜 미소를 지었는가하는 것이 화두의 하나가 되어 깊이 연구되었다. 그런데 이 경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僞經)으로 판정되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불교에서 참선하는 분들은 이런 선언적 명제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대체적인 경향이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하나의 화두공안으로서 참구하는 것은 의의가 있을 수도 있다. 전설적인 이야기인줄 알면서도 누구하나 적극적으로 부정한다거나 토를 다는 분들이 없다. 동아시아 불교의 선종에서는 염화미소는 삼처전심의 하나로서 석가부처님께서 상수 제자인 가섭존자에게 전해진 이야기로 확실하게 각인되고 있다. 

 

▲ 세계평화탑에 이르는 로프 카.  © CRS NEWS

 

불교에서 조사선이 교외별전(敎外別傳)되었다는 근거가 되는 설이다. 삼처전심이라 함은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니련하반곽시쌍부(泥連河畔槨示雙趺)를 말한다.

 

첫째, 다자탑전분반좌는 아함경·중본경(中本經)의 대가섭품(大迦葉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석가가 사위국 급고독원에서 대중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데 마하가섭이 뒤늦게 해진 옷을 입고 밖으로부터 왔다. 석가가 잘 왔다 가섭이여.” 하면서 앉은 자리 반을 나누어주며 앉으라고 하였다.

 

대중은 저 늙은 비구가 무슨 덕이 있기에 감히 여래의 자리에 앉으라 하는가하고 이상히 여겼다. 석가는 대중의 의아해하는 마음을 살피고 널리 가섭의 덕을 찬양하였다. 이것이 첫 번 째로 마음을 전한 것이라 한다.

 

둘째, 영산회상거염화는 송나라 오명(悟明)이 편찬한 전등회요(傳燈會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셋째의 니련하반곽시쌍부는 대열반경다비품(茶毘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석가가 열반에 드신 뒤 가섭존자가 먼 곳으로부터 뒤늦게 이르니 석가의 유체는 이미 입관되어 있었다. 가섭이 그 관 앞에서 슬피 울면서 세존이 어찌 벌써 열반에 드셨나이까하고 호소하자 석가가 두 발을 관 밖으로 내놓으며 광명을 놓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보조국사는 경절문(徑截門)을 세웠지만 삼처전심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 말의 진정국사(眞靜國師)가 지었다는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서는 염화미소 등을 내세웠다. 또 조선시대의 청허(淸虛)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세존이 삼처전심한 것이 선지(禪旨)가 되고, 일대소설이 교문(敎門)이 되었다.”고 선언하였다. 조선 후기의 백파(白坡)선문수경(禪門手鏡)에서 삼처전심을 조사선과 격외선(格外禪)에 배당하였다. 

 

▲ 마하 카사파(대가섭)의 열반도. 중국 신장 키질 동굴벽화.  © CRS NEWS

 

왕사성은 불교역사에서 성지로서의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갖는다. 빔비사라 왕이 헌증한 최초의 불교사원이 있고, 중국선종불교의 기원의 상징성을 갖는 영산회상과 고오타마 붓다 열반 후에 마하 카사파의 주도로 최초의 불전결집이 이루어진 칠엽굴(삿따빠니Sattapanni Cave) 등이 있는 고오타마 붓다와 상수제자들의 숨결이 스며있는 불교성지다. 고오타마 붓다가 열반에 드신지 3 개월 후에 아잣타사투 왕의 후원아래 제1차 불전결집회의가 이루어졌는데, 이 회의에서는 주로 고오타마 붓다께서 승가 공동체의 규율인 율장(律藏)과 교법을 설하신 경장(經藏)이 성립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마하 카사파의 주도로 5백 명의 아라한이 칠엽굴에 모여 고오타마 붓다 45년간의 설법을 구송(口誦)으로 결집하였다.  © CRS NEWS

 

이 최초의 불전결집총회를 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고오타마 붓다가 열반 한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바다(Subhadda)라고 하는 비구가 이제 계율 같은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상수 제자인 마하 카사파의 주도로 결집회의가 개최된 것이라고 한다. 수바다 비구는 나이가 들어서 늦게 출가한 고타마 붓다의 열반 직전에 승가에 들어 온 비구였다. 늦게 출가했으면 더 모범을 보여야 함에도 스승의 부재를 이유로 규율을 해이하게 생각한 것이다. 이에 마하 카사파는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율과 말씀하신 진리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를 느껴, 결집총회를 개최했고, 이후 100년이 지나서 제2, 200년 후에 아소카 대왕의 후원으로 제3차 경전결집이 이루어졌다.

 

왕사성은 불교 8대 성지다. 특히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대만의 불자들은 이곳 영취산의 독수리 봉인 영산회상(靈山會上)을 각별하게 생각하고 이곳을 참배한다. 선종불교에서는 보드 가야와 영취산 독수리 봉을 꼭 보고 싶어 하는 까닭은, 보드 가야는 깨달음의 장소였고, 영취산은 염화시중(拈華示衆)으로 부처가 가섭에게 심인(心印)을 이심전심으로 전한 상징성 때문이다. 일본의 법화계열 종파에서는 부처가 이곳 영취산정에서법화경을 설했다는 믿음 때문에 다른 불교성지보다도 더 선호한다. 그렇지만, 이런 이유를 떠나서라도 영취산은 고오타마 붓다가 직접 토굴에서 명상을 했고, 자주 이곳 산정에 와서 머물렀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선종불교 이전의 중국 동진 시대의 구법승 법현 법사는 그의불국기에서, 이곳 영취산을 방문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고, 당나라 현장법사 또한 영취산을 찾았다고대당서역기에 기록하고 있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코리아대표>

▲ 히말라야 부탄에서 온 라마와 함께.  © CRS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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