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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삶

문윤홍 대기자 | 기사입력 2023/01/12 [08:48]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도는 ‘삶’이라는 기도”

기도하는 삶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도는 ‘삶’이라는 기도”

문윤홍 대기자 | 입력 : 2023/01/12 [08:48]

공자(孔子, BC 557~479)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 대사상가, 교육자, 유교의 개조(開祖)이며 성인(聖人)으로 일컫는다. 공자는 노() 나라에서 태어나 유가(儒家)의 비조(鼻祖)가 되었다. 젊어서는 하급관리로 일했으며 54세에 대사구(大司寇)에 올라 재상(宰相)의 일까지 수행했다.

 

공자는 그의 정치적 이상(理想)을 실현하기 위해 노나라를 떠나 위(((() 등 여러 나라를 순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3년의 유랑 끝에 다시 노나라에 돌아와 제자의 교육과 시경(詩經), 서경(書經)등의 정리에 몰두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공자는 어진 스승이었고 교육자였으며 제자가 3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면 공자의 인품과 삶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성실(誠實)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자만큼 꾸밈없이 진실과 정직을 갖추고 산 사람이 있었을까. 공자는 가난한 마음과 겸손(謙遜)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 정신의 그릇 속에 인간의 지혜와 지식의 원천을 간직하고 살았다. 학문과 인격의 완성을 위해 평생 정진(精進)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그런 자아의 성실성이 인간관계에서는 인()의 미덕을 탄생시켰다.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평생 베풀었다. 그래서 스승 중의 스승으로 존경받았다.

 

공자의 도 초월적 존재 상정아침에 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아

 

논어(論語)이인(里仁)편에서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을 수 있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 조문도 석사가의)고 고백하고 있다. 공자 시대의 영원한 것의 가치는 하늘의 도(天道)’였다. 쉽게 말해 종교적인 진리였다. 그 하늘의 정신적 실재가 인간화한 것이 인()이었고, 인애(仁愛)를 간직한 사람이 성실한 삶을 찾아 누리게 되어 있다. 개인의 성실함이 인간관계의 어진 마음으로 진화하며, 어질다의 근원이 바로 하늘과 우주의 진리라고 믿었다. 그러면서 인이 멀리 있단 말인가. 내가 인을 바라면 인은 바로 나에게 다가온다”(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 인원호재 아욕인 사인지의)고 했다.

 

서양의 중세기는 기독교 세계관의 시대였다. 그 안에서도 성실한 사람은 악마도 유혹하지 못하며 하느님도 그를 버리지 못한다는 격언이 있다. 그런데 공자는 그 도()는 내가 찾아서 발견하거나 체험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초월하는 실재(實在)’가 있어야 함을 암시한다. 철학적 표현을 빌린다면 종교적 신앙의 문제는 윤리적 한계를 넘어 존재한다는 뜻이다. 성실함의 한계를 넘어 실재하는 것이 신앙(信仰)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사고와 지식보다 인륜적 삶의 가치를 포괄하면서 삶의 가치를 창출해 주는 더 높은 존재의 원천에서 주어진다는 논리이다.

 

공자는 신앙의 대상에게 올리는 기도에 관해서도 말했다. 논어술이(述而)편에는 기도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공자가 신병(身病)으로 고통을 겪을 때 제자 자로(子路)가 기도를 드리자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공자가 내 건강을 위한 미신적인 기도는 원치 않으나 잘못을 뉘우치고 선()을 실천하기 위해 신()의 도움을 구한다는 뜻의 기도는 항상 드려 왔다고 말했다. “신의 존재나 내세에 관해 알지 못한다고 했던 공자도 평소 신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겸손한 자세로 기도하는 삶이 중요한 이유

 

그러면 기도하는 삶이란 무엇일까. 신앙을 가진 이들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성녀(聖女) 데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기도가 마음의 약동이며 하늘을 바라보는 단순한 눈길이고, 기쁠 때와 마찬가지로 시련을 겪을 때에도 부르짖는 감사와 사랑의 외침이다.”  이처럼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들어 높이며 하느님께 은혜를 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마음가짐과 자세로 기도하고 있는가.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겠다. 우리는 삶 속에서 기도를 하며 살아가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말이다. 기도하는 신앙인은 내가 너무나 약하기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느님을 향한다. 반면 기도하지 않는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지금껏 베풀어 주셨던 은혜에 대해 당연한 듯이 여기며 살아간다.

 

기도하지 않는 신앙인이 가진 결정적인 문제, 하느님께서 나에게 당연히 좋은 것을 주셔야 한다는 마음은 우리를 교만과 경솔에 빠지게 한다. 사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기쁨은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마련해주신 선물이고, 결코 내 자신이 잘나서 주신 게 아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향한 기도의 마음을 일상에서 잘 가지지 않게 되면 자연스럽게 교만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 또한 겸손한 마음을 간직했을 때 참된 기도가 된다. 그만큼 겸손한 마음가짐은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이다.

 

예수도 공생활 중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난 뒤 홀로 외딴곳으로 물러난 다음 하느님께 기도 드렸다. 매 순간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겸손하게 일치를 이루신 분이다. 그렇게 예수의 겸손은 십자가상 수난과 죽음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고, 이로써 부활의 영광이 완성될 수 있었다우리도 기도의 마음을 통해 겸손한 삶을 살고,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비로소 예수께서 그러했듯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복음서 1411)

 

100여 평생을 지킨 기도하는 삶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철학도가 되기 전에 이미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무신론 철학자의 책도 읽었고, 종교적 신앙이 없는 인생관과 세계관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것이 그의 종교적 신앙심을 오히려 더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종교적 신앙은 인간의 성실성의 선물이나 결실이 아니었다. 그러면 무엇인가. 그에 따르면 성실성 플러스 경건성이었다.

 

김 교수는 최근 김형석의 100년 산책칼럼에서 경건성은 우리가 모두 지니고 있는 성실함을 한 단계 더 높여준다. (()성실함이 아니고, 성실을 내포하는 초()성실이다. 나에게 그런 신념을 갖게 해 준 철학자는 칸트였다. 그의 종교철학 제목이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이다. 종교는 초이성적인 영역의 실재임을 암시해준다. 나는 칸트를 경건성을 지닌 철학자라고 느꼈다. ‘요청적 유신론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 경건성이 무엇인가. 나에게는 기도하는 마음이다. 내 인생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성실성을 갖춘 사람은 기도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공자의 고백이 바로 그런 뜻이었다. 도를 깨닫기 위해, 성실과 어진 마음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기술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14살 때 삶의 종말인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께서 저에게도 어른이 될 때까지 살도록 건강을 허락해 주시면, 제가 저를 위해 살지 않고 하느님의 일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는 기도였다. 그 기도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 것이 신앙적 체험이라고 믿는다고 고백했다.

 

기도란 우리를 애워싸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내주하시는 하느님께 우리가 드리는 모든 반응과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슬플 때나 기쁠 때, 평화로울 때나 두려울 때, 그 때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고 계시는 하느님의 눈길과 마음을 의식하고 그것에 반응하고 응답할 수 있다면, 그 모든 반응과 응답은 기도가 될 수 있다. 기도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신간 토저의 위대한 기도 100을 소개한다.

 

혼란스럽던 20세기 초 시대의 선지자로 불렸던 미국 목회자 A·W 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의 기도문 모음이다. 400편이 넘는 토저의 설교에 담긴 기도 중 100편을 골랐다.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기도, 하느님 말씀을 신뢰하는 기도, 신앙이 퇴보할 때 드리는 기도, 참회의 기도, 감사의 기도 등 기독교 신앙의 10가지 핵심 주제로 엮었다. 평생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저자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도는 이라는 기도라면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삶이 기도이고 우리는 항상 기도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했다.

 

2023년 계묘년(癸卯年)기도하는 삶으로 채워 나가면 어떨까. 

▲ 수암(守岩) 문 윤 홍 大記者/칼럼니스트  © 매일종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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