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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아일체 추구한 장자…탐욕과 아집 시대 맞선 혁명서 『장자』

문윤홍 대기자 | 기사입력 2023/01/13 [13:28]
마음은 천하에 있으되 몸은 강호에 살다…속세를 초탈하려고 애쓴 장자(莊子)

물아일체 추구한 장자…탐욕과 아집 시대 맞선 혁명서 『장자』

마음은 천하에 있으되 몸은 강호에 살다…속세를 초탈하려고 애쓴 장자(莊子)

문윤홍 대기자 | 입력 : 2023/01/13 [13:28]

고전 장자(莊子)를 읽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가 있다. 저 먼 북쪽 깊고 어두운 바다에 곤()이라는 커다란 물고기가 사는데, 이 물고기가 새로 변하여 하늘로 솟구쳐 날아오르면 대붕(大鵬)이라는 새가 된다고 한다. 이 물고기와 새는 너무나 커서 그 크기가 수천 리이고, 대붕이 되어 날아오르는 높이만 해도 구만리나 된다고 한다. 참 크기도 하고 또 높이도 날아오른다. 대붕의 비상(飛上)이 정신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든, 세상의 성공을 뜻하는 것이든 이 이야기에 가슴 시원해지지 않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장자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곤()과 붕()의 이야기를 읽으며, 대개는 곤과 붕에 자기 스스로를 동일시한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참새와 비둘기가 대붕을 보고 비웃는 이야기를 읽으며 "뱁새가 황새의 뜻을 어찌 알겠는가"라는 속담을 떠올리곤 한다. 그런데 과연 장자의 모습은 대붕에 가까웠을까 아니면 참새나 비둘기에 가까웠을까. 아니 이 곤과 붕의 이야기를 읽고 참새와 비둘기를 조소해온 전통 지식인들이나, 또 지금의 우리는 대붕에 가까울까, 아니면 참새나 비둘기에 가까울까.

 

불운하지만 재상 자리를 거절한 지식인 장주(莊周)

 

장자(莊子, BC 369?~BC 289?)가 살았던 전국(戰國)시대는 전란과 정치적 소용돌이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란의 회오리가 요동치는 시대는 뜻이 있으나 때를 얻지 못하던 사람들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때이기도 하다. 난세(亂世)에는 영웅을 기다린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러나 장자에게는 그런 커다란 야망조차 없었던가 보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장자는 초()나라의 왕이 보낸 두 대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빨리 돌아가 나를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마시오. 차라리 시궁창에서 뒹굴며 즐거워할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諸侯)들에게 구속당하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아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자 하오.”

 

그뿐이었다.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으면서도 수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천하를 주유(周遊)하며 제후들에게 유세하였던 맹자(孟子. BC 372?~BC 289?)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장자에는 이 이야기가 두 차례에 걸쳐 등장하는데, 사기는 오로지 장자에 대해 이 일화만 소개한다. 그 외의 사항은 아주 간단한 사항들에 지나지 않는다. , 장자는 몽() 지방 사람으로 이름은 주()이고 칠원(漆園)이라는 고을에서 관리를 지냈는데, ()나라의 혜왕(惠王), ()나라의 선왕(宣王)과 같은 시대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박학하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10만여 자나 되는 문장을 지었고 어부(漁父)’, ‘도척(盜跖)’, ‘거협(胠篋)’ 등을 지어 공자(孔子, BC 551~BC 479)의 무리를 비방하고 노자(老子, BC 6~4세기 추정)의 학설을 천명했다는 게 거의 전부이다.

 

하지만 장자에 기록된 일화들을 통해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가에 대해 조금은 가늠해 볼 수 있다. 장자는 생전에 노()나라의 애공(哀公)과 만났으며, ()나라의 혜왕(惠王)과 만난 일이 있고, 특히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혜시(惠施, BC 370?~BC 309?)와는 막역한 친구 사이였던 것 같다. 또한 부인의 상을 당해 슬퍼하기는커녕 춤추며 노래했다는 기이한 행적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장자는 결혼했고 몇 명의 자식이 있었던 듯하다.

 

장자에서 증언하는 인간 장자는 매우 가난하고 고달픈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외물(外物)’편에는 장자가 집이 가난하여 감하후(監河侯)에게 곡식을 빌리러 갔다가 불쾌한 대접만 받았다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열어구(列禦寇)’편에는 송()나라 왕을 위해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성공하고 돌아온 조상(曹商)의 입을 통해 장자가 얼마나 곤궁한 처지에서 살았는가를 알려주는 대목이 나온다. 장자가 누더기처럼 기운 옷을 입고 삼끈으로 얽어맨 신발을 신고 위나라 혜왕의 곁을 지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혜왕이 말했다.

 

"선생은 어째서 이렇게 지친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장자가 이렇게 말했다.

 

"가난한 것이지 지친 것이 아니오이다. 선비가 도와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를 행하지 못했을 때 지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옷이 해지고 신발에 구멍이 난 것은 가난한 것일 뿐 지친 것이 아니오이다. 이는 곧 때를 만나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 지금처럼 군주가 어리석고 신하들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지치지 않으려 한다고 해서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저 비간(比干)과 같은 충신이 심장을 도려내는 일을 당한 것을 보면 분명하지 않습니까?"

 

혜왕의 눈에 비친 장자의 모습은 가난에 찌든 비천한 몰골이었던 모양이지만, 자신을 충신 비간에 비유하면서 은연중에 장자는 자신이 도()와 덕()을 속에 품고 있어 천하를 구제할 만한 그릇이지만,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사람임을 강조하고 있다. 외모가 아닌 가슴속의 웅지(雄志)를 보고서 사람을 쓸 것을 종용한 듯하다. 아무리 좋은 활이라도 명궁의 손에 쥐어져야 그 활의 본색이 드러나는 것이며, 물고기는 물을 만나야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법이다. 그 당시처럼 부패와 혼란이 극심한 시대에는 뛰어난 인재일수록 초라하고 볼품없이 살아간다는 것을 장자는 은연중에 꼬집은 것이다. 비록 가난했지만 장자는 값싼 동정에 몸을 팔거나 절개를 버리면서까지 세상이나 권력자에 아부하는 것에 대해선 극심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 장자(莊子, 369?~BC 289?)

 

속세를 초탈(超脫)하고자 애쓴 장자

 

노자와 함께 도가(道家)를 형성한 장자는 송나라 몽읍(蒙邑)에서 출생했다. 이곳은 호수와 숲이 많았고 경치가 아름다웠으며 기후는 온화했다. 장자의 이름은 주()이고, 자는 자휴(子休)이며, 칠원성(漆園城)의 말단 관직에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끼니를 굶을 지경이 되자 어느 날 치수(治水)를 담당하는 관리에게 쌀을 좀 빌리고자 했다. 그러나 그 관리는 쌀쌀맞게 말했다. “내가 수확기에 전세(田稅)를 받으면 그 자리에서 당신에게 삼백 냥을 빌려주겠소.”

 

그의 말에 불쾌해진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리로 오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러 사방을 둘러보았더니, 시궁창의 붕어 한 마리였소. 그 붕어가 나에게 하는 말이 나는 동해의 파신(波臣)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한 말의 물을 주어 제발 살려주십시오’ 하는 것이었소. 그래서 나는 내가 남쪽의 오나라와 월나라의 군주를 만나면 큰 강의 물을 끌어다가 당신을 환영하도록 청하리다’ 했소.” 장자는 이 비유를 통해 사람이 급할 때 조금만 도와주어도 될 것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말장난으로 희롱하는 것에 대해 준엄하게 꾸짖었던 것이다.

 

노자와 장자를 묶어 흔히 노장(老莊)사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두 사상가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노자가 정치와 사회의 현실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있었던데 비해 장자는 개인의 안심입명(安心立命)에 몰두했다. 노자가 혼란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처할 것을 가르친 반면, 장자는 속세를 초탈해 유유자적(悠悠自適)하고자 했다.

 

노자의 도덕경이 깊은 사색을 필요로 하는 철학적 작품인 데 비해, 장자의 남화경(南華經)은 읽는 사람을 도취의 망아(忘我) 상태로 빠져들게 하는 문학적 작품이다. 장자는 철학자임과 동시에 탁월한 산문가로서, 1천여 년 동안 그의 문학을 모방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의 문장은 모두 우화(寓話형식으로 되어 있고 내용도 대부분 허구적이기는 하지만, 이솝 우화에서처럼 무궁무진한 의미가 들어 있다.

 

유가(儒家)에서는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聖人)이 나와 인의도덕(仁義道德)의 정치를 해주기를 바랐고,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정치를 기대했다. 하지만 장자는 이 모든 것들을 초월한 신인(神人)의 경지를 말했다. “신인은 그 몸의 먼지나 때, 쭉정이나 겨만 가지고서도 요순과 같은 성인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거늘, 무엇 때문에 하찮은 천하 따위를 위해 고생하려 하겠는가.”

 

만물은 도의 나타남이다

 

장자에 따르면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삼라만상은 모두 도()가 나타난 것에 다름 아니다. 도 밖에 만유(萬有, 만물)가 없고, 만유 외에 도가 없다. 만물은 도가 밖으로 나타난 것이므로, 도는 만물을 생성하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만물은 도에서 생겨나고, 다시 도로 돌아간다. 도는 절대 무차별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스스로 근본이 된다. 도는 모든 것을 보내고 맞아들이며, 모든 것을 파괴하고 건설한다. 진정 도를 깨닫는 사람은 삶을 기뻐하거나 죽음을 싫어하지 않으며, 작은 것을 탓하거나 성공을 과시하지도 않고, 억지로 일을 꾸미지도 않는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을 때 아무런 저항 없이 편안하게 살아가듯이, 사람 역시 도 가운데 행할 때 아무런 문제없이 스스로 유유자적하며 살아갈 수 있다.

 

삶과 죽음은 하나다

 

장자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사물이 서로 얽히고 뭉쳐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이것이 이른바 만물일체론(萬物一體論)’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물은 전체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어떠한 개별적 변화도 전체 질서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가령 한쪽의 완성은 다른 쪽의 파멸을 뜻하므로, 전체 질서에는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장자가 죽어갈 때,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안장(安葬) 문제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고 있었다. 그러자 장자는 나는 천지를 관으로 삼고, 해와 달을 벗으로 삼으며, 별들을 보석으로 삼고, 만물을 휴대품으로 삼으니, 모든 장구는 갖춰진 셈이다. 여기에 무엇을 더 좋게 하겠느냐고 말했다. 이에 제자들이 관이 없으면 까마귀나 독수리 떼가 뜯을까봐 걱정됩니다라고 하자, 장자는 다시 노천(露天)에 버리는 것은 까마귀나 독수리 떼에게 뜯어먹도록 주는 것이며, 땅에 묻는 것은 개미 떼나 땅강아지가 먹도록 내어주는 것이니, 이 둘이 무엇이 다르겠느냐. 이것은 마치 이쪽에서 식량을 빼앗아 저쪽에 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냐?”라고 말했다.

 

이와 비슷한 일화가 또 있다. 어느 날 장자의 아내가 죽어 절친 혜시가 문병을 왔는데, 정작 장자 자신은 물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시가 그 연유를 묻자, “나의 아내는 본래 삶도 형체도 없었고 그림자조차 없었지 않은가. 이제 그녀도 죽었으니, 이는 춘하추동의 변화와 같은 것이네. 그녀는 아마 거실 안에서 단잠을 자고 있을걸세. 내가 처음에는 소리 내어 울었는데, 울다가 가만히 생각하니 가소롭기 짝이 없게 느껴졌다네라고 대답했다. 이는 비관과 낙관을 한꺼번에 융화시킨, 일종의 달관주의(達觀主義).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진인(眞人)은 삶을 기뻐하지도 않고, 죽음을 미워하지도 않는다. 태어남을 기뻐하지도 않고, 죽음을 거역하지도 않는다. 그저 무심히 자연을 따라가고, 무심히 자연을 따라올 뿐이다.

 

그러한 그에게 과연 인간세계의 영고성쇠(榮枯盛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세속을 초탈한 최고조의 경지에서 봤을 때 잠시 잠깐 출세하면 무엇하며, 돈을 번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시험에 합격하면 어떻고, 또 낙방한들 어떨까. 좋은 사람과 결혼하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겠는가. 건강하게 오래 살면 얼마나 더 행복할 것이며, 병들어 조금 일찍 죽은들 그게 무슨 대수인가 말이다. 장자에 의하면, 모든 차별이나 변화는 결국 인간의 유한한 지식으로부터 유래한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지식의 한계를 깨닫고 쓸데없는 시비(是非)를 버려야 한다.

 

신령한 거북이라면

 

장자는 벼슬자리 같은 것에 관심조차 없었다. 장자가 중국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 것은 공자처럼 정치 무대를 찾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 묵자(墨子. BC 479? ~BC 381?)처럼 사회개혁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욕망에 허덕이는 인간의 가련한 모습을 보고 세상 풍토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웃어버리고자 했을 뿐이다.

 

송나라의 조상(曹商)이라는 사람이 진()나라로 사신의 길을 떠날 때, 불과 몇 량의 수레로 출발했다. 하지만 돌아올 때는 선물이 가득 찬 백여 량의 수레를 이끌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장자에게 하는 말이 나는 누추한 집에서 사는 재주는 없어도, 한마디 말로 군주를 기쁘게 하여 백 량의 수레를 끌고 오는 재주는 있다오했다. 이에 장자는 진나라 왕이 언젠가 병이 들어 의사에게 고름이 가득 찬 종기를 손으로 터뜨리면 한 량의 수레를 선물로 주고, 입으로 빨면 다섯 량의 수레를 준다고 했소. 즉 그 방법이 더럽고 추할수록 수레를 많이 얻어올 수 있었단 말이오라고 했다. 이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행위로 명예와 부귀를 바꿔온 데 대한 통렬한 비난이었다.

 

하루는 초나라 왕이 예절을 갖춰 장자를 초빙하고자 그에게 두 대부(大夫)를 보냈다. 마침 물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그에게 두 사람이 국왕의 부름을 전했다. 이에 장자는 태연하게 말하기를 초나라에 신령한 거북이 한 마리 있다는데, 그것은 죽은 지 이미 삼천 년이나 된다고 하오. 초나라 왕은 그것을 비단으로 잘 싸서 태묘(太廟속에 간직하고 길흉을 점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 거북이 정말로 신령스럽다면 죽어서 그 껍질로 사람의 존경을 받겠소,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 치며 살겠소?” 했다. 즉 까닥 잘못하여 정변에 휩쓸린 탓으로 몸이 죽고 난 후에 찾아오는 인간의 명예는 빈껍데기와 같이 무가치할 뿐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진정한 현자(賢者)좌로나 우로나 치우침 없이 그 바른 중용의 길을 따라감으로써 스스로 목숨을 보전할 뿐이다.

▲ 『장자(莊子)』에는 장자와 혜시가 강가에서 물고기의 즐거움에 대해 논쟁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혜시가 죽은 후, 장자는 더 이상 자신과 변론할 사람이 없음을 매우 애석해했다.

 

백이(伯夷)나 도척(盜跖)은 마찬가지다

 

장자의 윤리에 대해 논하면 첫째, 유가의 인위적인 도덕을 비판했다. 공자가 초나라에 갔을 때, 광접여(狂接與)라는 사람이 불렀다는 노래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말지어다, 말지어다. 도덕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위태로운지고, 위태로운지고. 땅에 금 긋고 달리는 것은.”(已乎已乎 臨人以德 殆乎殆乎 畵地而趨 이호이호 임인이덕 태호태호 획지이추)

 

시대에 따라, 나라에 따라 많은 도덕과 윤리가 있다. 임금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던 시대가 있었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소리 높이 외치던 시절도 있었다. 가장 선이라 여기던 것들이 세월에 따라 박물관의 박제처럼 변하기도 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유가의 도덕을 비판한 장자의 철학을 배우게 된다. 도덕을 사람에게 강요하고 주입시키는 것은 마치 땅에 금을 그어놓고 달리게 하는 일처럼 위험하고 답답한 일이다.

 

어느 날, ()을 잘 다룬다는 백락(伯樂)이란 사람이 말들을 죽 늘어세운 채, 그 털을 지지고 몸에 낙인을 찍어 외양간에 매달아 놓았다. 그런데 열 마리 중 두세 마리가 죽고 말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것은 백락이 말의 타고난 본성에 어긋난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둘째, 장자는 생명 존중의 윤리를 주장한다. 백이(伯夷)는 대의명분과 자신의 명예를 위해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고, 도척(盜跖)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좇아 살다가 동릉산 위에서 처형을 당했다. 이 두 사람은 비록 죽은 원인이 서로 다르지만, 목숨을 해치고 타고난 본성을 상하게 한 점에서는 같다. 그런데 어찌 백이(伯夷)만 옳고 도척(盜跖)을 잘못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는 마치 책을 읽는 바람에 양을 잃어버린 남자 종이 노름을 하다가 양을 잃어버린 여자 종보다 결코 낫지않음과 같다. 비록 두 사람이 한 행위는 다르지만 양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결국 장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생명을 지키고 몸을 보존하는 일보다 더 위대한 도덕은 없다는 것이다.

 

셋째, 장자는 본성에 따라 사는 분수의 윤리를 주장한다. 예컨대,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라면 다섯 발가락 중에 두 개가 서로 붙어 있어서 네 발가락이어도 장애자라 생각하지 않고, 손가락에 하나가 더 있다 할지라도 육손이라 여기지 않는다. 길다고 그것을 여분(餘分)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짧다고 그것을 흉으로 여기지 않는다. “물오리는 비록 다리가 짧지만 그것을 이어주면 도리어 괴로워하고, 학의 다리는 길지만 그것을 잘라주면 오히려 슬퍼한다”(鳧脛雖短 續之則憂 鶴脛雖長 斷之則悲 부경수단 속지즉우 학경수장 단지즉비). 본래부터 긴 것을 잘라서도 안 되지만, 본래부터 짧은 것을 이어주어도 안 된다. 태어난 대로, 생긴 대로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뜻이다.

 

하늘로부터 타고난 자연은 모든 사물 안에 깃들어 있으나, 사람이 억지로 꾸미는 일은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가령 소와 말에게 각기 네 개의 발이 있는 것은 자연의 섭리에 해당하고, 그 말머리에 고삐를 달고 쇠코에 구멍을 뚫는 일은 사람이 만들어낸 일이다. 이와 같이 일부러 천성을 망쳐서는 결코 안 되며, 사람이 자신의 명성 때문에 본래부터 타고난 덕을 희생시켜서도 안 된다.

 

자기 본성과 능력에 따라 분수를 지켜나갈 때, 진정 평안하고 자유로워

 

사람들 사이에도 능력과 취미가 서로 다르다. 공부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있고, 운동이나 예술에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각자 소질에 맞춰서 그에 맞는 교육을 하면 된다. 공부에 취미가 없는 아이를 억지로 책상 앞에 앉혀놓거나 음악적 재능이 전혀 없는 아이를 세계적인 음악가로 키우기 위해 밤샘 과외를 시켜본들 그 효과가 제대로 나겠느냐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육의 비극은 바로 이 점에 있지 않을까 싶다. 모두 일렬로 늘어서게 한 다음, 동일한 골인 지점을 향해 뛰도록 하는 이 교육은 개선돼야 한다. 장자는 인간이 자기 본성과 능력에 따라 분수를 지켜나갈 때, 진정 평안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고 했다.

 

장자는 생사(生死)와 시비(是非), 권세와 부귀 등 세속적인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달관적 인생관의 소유자였다. 그는 특히 유가 사상을 비판하는 대신, 노자의 입장을 택했다. 사물 간의 차이점만을 따지는 모든 지혜들을 타파했으며, 스스로 자유분방함을 실천하며 천지일체(天地一體)의 묘리(妙理)를 몸소 체험했다. 그렇다고 장자가 끝까지 이 세속을 혐오한 것은 아니었으며, 인간세계에 돌아와 현실의 가치를 다시 한번 긍정했다.

 

장자는 이 세상을 완전히 벗어나고자 하기보다는 여유있게 살아가고자 했다. 어쩌면 그는 우리 인간이 세상일에 몰두하기보다는 차라리 한 걸음 떨어져 관조(觀照)하며 사는 것이 도리어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을지 모른다.

 

장자는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논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친구인 혜시를 만나면 통쾌한 논전을 곧잘 벌였다. 그러나 그 혜시는 일찍 죽고 말았다. 장자는 그와의 옛정을 못 잊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초나라에 사는 어떤 사람이 자기 코에 파리 날개처럼 얕게 횟가루를 묻히고는 그것을 석수장이에게 정으로 쳐서 떨어내라고 했다. 이에 석수장이는 코에 정을 대고 망치로 쳐서 횟가루를 떨어냈으나, 코는 전혀 다치지 않았다. 송나라 왕이 그 말을 듣고 석수장이를 불러다 자신의 코에 횟가루를 묻혀 그것을 떨어내도록 했다. 그러나 석수장이는 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재주를 펴볼 수 있는 상대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석수장이는 바로 나이고, 그 상대자는 혜시다. 나는 변론의 상대를 잃어버렸도다.”

논쟁을 벌일 때에는 서로 얼굴을 붉히기도 했고 싸우기도 했지만, 장자는 그 혜시가 있어서 자신의 논리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혜시는 장자의 철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징검다리이자 일종의 촉매제였다.

 

왜 지금 장자가 필요한가

'장자' 펴넨 김원중 장자는 모든존재·사유 상대적으로 봐이념·진영에 갇힌 우리에게 가르침 줘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즐겁게 살고 싶소.”

 

사기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편을 번역하던 중에 장자가 재상으로 맞아들이고 싶다는 초나라 위왕의 제안을 제사 때 쓰이는 소 이야기를 하면서 거절하는 대목이 눈에 확 띄었다. ’장자라는 사람, 참 대단한 배짱이구나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단국대 한문교육과 김원중 교수(중국인문학회 부회장)는 이때 나중에 기회가 되면 고전 장자를 번역하리라고 생각했다. 지금부터 20여년 전의 일이었다. 물론 이보다 앞서 대학원 시절부터 장자의 내용이 담긴 중국 6조 시대의 문학예술 평론서 문심조룡(文心雕龍)’을 공부하면서 장자의 해학과 풍자,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미학이 흥미로워서 호감을 갖고 있긴 했다. 더구나 유가와 더불어 양대 사상인 도가에 대한 관심이 많던 그가 10년 전쯤 도가의 고전 노자 도덕경을 번역·출간하면서 또 다른 도가의 고전 장자역시 세트로서 번역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장자는 여느 동양 고전과는 달랐다. 김 교수는 무엇보다 비유와 풍자, 구어체 표현이 많았다. 문장이 까다로웠다. 논어(論語)맹자(孟子), 한비자(韓非子)등과는 결이 전혀 달랐다. 근본적으로 장자가 무한히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거침이 없고, 낭만적이었으며, 생계도 걱정하지 않고 주변인처럼 살았다. 장자의 사유를 따라가는 게 심리적으로 부담이었다. 제 스스로 기계처럼 살아가는 유형이기에, 스타일상 괴리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동양 고전의 대가로 꼽히는 김원중 교수가 최근 도가의 고전 장자-자유로운 삶을 위한 고전(휴머니스트)를 번역·출간했다. ‘장자는 도와 무위를 강조하는 노자 도덕경의 사상을 계승하면서도 도가적 사유를 확장하고 다양한 개념을 발전시킨 도가의 대표 고전이다. 특히,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겁게 놀았다는 고사로서 사물은 하나라는 뜻으로 물아일체(物我一體)와 만물의 조화를 담은 호접몽(胡蝶夢)’ 이야기는 유명하다.

 

옛날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였으니 스스로 기뻐하며 뜻에 맞았다. (스스로)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얼마 있다가 깨어보니 갑자기 장주의 모습이었다. 알지 못하겠으니, 장주의 꿈에 (장주가)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의 꿈에 (나비가) 장주가 된 것인가.” (‘2편 제물론(齊物論)’ 중에서)

 

기존 장자번역과 비교해 이번 번역의 차이점이나 특장점은 뭘까. 김 교수는 직역을 하되, 가독성에도 신경을 썼다. 주석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주석이 하나도 없는 번역판도 있지만, 이번 번역은 주석이 1400여개나 된다. 아울러 다른 번역본 해석도 충실하게 설명, 종합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려 노력했다고 밝혔다.

 

그러면 김 교수의 책 장자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으며 현대인은 왜 장자를 읽어야 하는가. 그는 “‘장자의 기본 사유는 모든 존재와 사유는 상대적이며, 인간은 감히 사유를 판단하거나 진위(眞僞)를 간별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유가를 비롯해 물()과 아()를 구분하거나 늘 시비를 가리려는 인간 행태를 경계하며, 사물과 자아 사이의 구분이 사라지는 경지를 추구한다. 최근 우리 사회도 아집에 사로잡히거나 이념 및 진영에 갇혀 탈()진실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장자는 나를 내세우는 아집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울러 장자에는 장애인이나 어부를 비롯해 비주류적 존재와 교류하면서 공감하는 장면도 적지 않다고 했다.

 

장자에 대해 잘못 알려졌거나 오해받는 부분이 있다면 뭘까. 김 교수는 “‘장자의 사상이 현실 도피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게 가장 큰 오해 같다. 예를 들면, 격몽요결(擊蒙要訣: 1577년 퇴계 이이가 학문을 시작하는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편찬한 책)의 독서 파트 등에선 노자 도덕경이나 장자가 빠져 있는데, 아마 노장사상이 사회가 지향하는 삶의 목적성과 유리된다는 생각이 퍼져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장자야말로 삶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숨 쉴 여지를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자본의 탐욕이나 자기만 정의라고 하는 아집의 시대와 맞서게 하는 비범한 혁명서일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대학에서 동양 고전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던 성균관대 대학원 박사과정 3학기 차에 있던 대학원생 김원중은 1993당시감상대관(唐詩鑑賞大觀)을 펴냈다.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널리 읽히면서도 작품성이 뛰어나다고 평가되는 당시(唐詩) 180여수()를 선정해 각 작품에 관한 상세한 주석과 체계적 분석을 시도한 것으로, 무려 700쪽이 넘는 벽돌책이었다. ‘동양 고전 대가김원중의 원점이었다. 김 교수는 연구와 강의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서도, 동양 고전을 우리 시대 보편적인 언어로 정확하고 섬세히 번역하는 작업에 매진해 왔다. 사기열전(史記列傳)을 비롯해 20여권의 동양 고전을 번역했다. 삼국유사50만부 이상 팔리는 등 그가 번역한 고전들은 독자의 사랑 속에 대부분 스테디셀러에 올라 있다.

 

중국의 위대한 사상가들, 애민(愛民)정신과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생각은 공통적

 

중국의 위대한 사상가들, 즉 공자·묵자·노자·장자는 혼탁한 세상에 놓여 있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고, 세상을 바로잡아보자는 생각에는 공통적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서로 달랐다.

 

공자와 묵자는 직접 사회 개혁에 뛰어들어 대를 쪼개듯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노자와 장자는 문제들이 자연적으로 치유되고 미화되기를 바랐다. 가령 병이 났을 때 어떤 의사는 과감하게 수술을 해서 낫게도 하지만, 어떤 의사는 자연적인 치유를 권장하기도 한다. 병이 낫기를 바라는 마음은 똑같지만 그 처방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노자와 장자 사이에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예컨대 노자가 자연의 원리와 함께 그 응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줬다면, 장자는 우리 인간이 천지(대자연)와 한 몸이 되는 원리를 설파했다. 물론 장자에 대해 허무주의적이라거나 회의주의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세상사와 정치에 대한 그의 통렬한 비평은 역설적으로 그에게도 격렬한 시비의 관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아예 세상사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면 구태여 비웃거나 비판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4 수암(守岩) 문 윤 홍 大記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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