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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 말로 천냥 빚을 갚는다’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5/04/07 [08:20]
아베의 巧言과 미 의회 연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한마디 말로 천냥 빚을 갚는다’

아베의 巧言과 미 의회 연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5/04/07 [08:20]
공자는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라고 했다. 누구나 잘못을 할 수 있지만, 그 잘못을 고칠 줄 모르는 것이 진짜 잘못이라는 말이다. 우리 속담에는 ‘한마디 말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했다. 누군가 잘못이 있더라도 이를 진심으로 사과하면, 그를 용서할 수 있는 관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이 말이 새삼 떠오른 것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지난 3월28일 <워싱턴포스트(WP)>와 가진 인터뷰 때문이다. 아베는 인터뷰에서 일본군위안부를 ‘인신매매의 희생자’로 지칭하면서, 측량할 수 없는 고통과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을 겪은 이들을 생각할 때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유의할 대목은 인신매매에 해당하는 영어 표현으로 ‘human trafficking’이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미 국무부가 위안부 문제를 다룰 때 사용하고 있는 용어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인신매매라는 용어는 민간업자들이 여성이나 아동을 사고 파는 행위를 의미하는 데 사용해 온 것으로, 일본군이 속임수와 강박을 통해 위안소를 설치해 왔음을 부정하는 데 써 온 표현이다. 일종의 용어 세탁인 셈이다.
 
그런데 WP와 인터뷰에서 미 국무부가 사용하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일본은 전시 위안부 문제에 있어 미국과 동일한 입장이라는 심리적 오류를 유도하는, 지극히 의도적이고 작위적인 기책(奇策)으로 보인다. 아베가 실제 인터뷰에서 ‘진신바이바이(人身賣買)’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러한 분석이 크게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이 말을 듣는 우리의 가슴은 찢어질 듯하고, 양심을 가진 인류의 가슴은 헤질 수밖에 없다. 교묘한 언어로 인터뷰한 것이, 공교롭게도 일본의 전시(戰時) 성노예를 크게 지탄해 온 미 의회 상·하원에서 예정된 합동연설을 앞둔 시점과 묘하게 맞물려 있다. 피해자를 향한 직접적이고 분명한 사과는 외면한 채, 미국인들이 매일 접하는 한 언론을 통해 교언(巧言)한 것이라면, 여생이 길지 않은 피해자들의 가슴에 또 다시 대못질을 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위에 거론한 공자의 가르침이나 우리 속담과 같은 의미의 명언이나 속담이 일본에도 있을 것이다. 최근 일본 교도통신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본 국민의 55%가 오는 8월에 발표될 ‘아베 담화’에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넣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이는 일본 국민 다수의 의식은 공자의 가르침이나 동북아시아의 일반적 관용 정신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한편, 유흥수 주일본 대사는 “오는 8월 전후(戰後) 70주년 '아베 담화'에 "침략과 식민지 지배, 그리고 반성이라는 3가지 키워드가 들어갈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재외공관장 회의 참석차 4월1일 일시 귀국한 유 대사는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아베 담화에 역대 총리들이 언급한 담화 내용을 그대로 계승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며 "전후 50주년에 무라야마 담화, 전후 60주년에 고이즈미 담화 등 역대 총리들의 담화에서 '침략', '식민지 지배', '반성'이라는 표현이 있었다"면서 이렇게 전했다. 유 대사는 "일부에서는 역대 총리의 (담화) 정신만 계승하면 되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있지만 우리 정부도 압박하고 여러 식자층에서 담화를 발표해서 주변이 시끄러워진다면 오히려 발표하지 않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분위기도 있다"며 "근린 외교가 잘 되어야 한다는 바탕에서 일본 정부 내에서 바뀌는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펠로시 美 전 하원의장 “아베, 위안부 사과 성명 내야”
 
4월말 아베 총리의 미국 의회 연설을 앞두고 한국을 방문한 낸시 펠로시 미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아베 총리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를 강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하원 의원 대표단 9명을 이끌고 방한(訪韓)한 펠로시 원내대표는 4월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우리(미국 의회)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무엇을 듣고 싶은지를 분명히 밝혀왔다. 아베 총리가 의회 연설에서 그렇게 할지 안 할지에 대해 내가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가 성명을 내어 일본인들을 위안부 문제의 부담으로부터 풀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아베가 이번 의회 연설을 계기로 일본 정부에도 외교적 부담이 되고 있는 과거사 문제를 적극 해결하라는 주문이다. 그러나 아베가 미 의회 연설에서 과거사에 대해 사과를 할 가능성은 낮게 내다봤다. 펠로시 원내대표는 “그가 어떤 식으로든 사과를 하기 바란다”면서도 “반드시 (미국) 의회에서 할 필요는 없다. 그가 (사과) 성명을 낸다면, 다른 나라에서 하기보단 아마도 자기 나라에서 할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 하원에서 2007년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될 당시 하원의장이었던 펠로시 대표는 이어 “우리는 (위안부) 결의안을 본회의에 가져갔고, 그렇게 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그것을 통과시키는 데 우선순위를 뒀다”며 “우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분명히 해 왔다”고 말했다.
 
미국 하원이 채택한 위안부 결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강제로 젊은 여성들을 ‘성노예’로 만든 것을 인정하고 사과할 것을 일본 정부에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현 세대와 미래 세대에 교육하라는 요구도 포함돼 있다.
 
앞서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펠로시 원내대표 등 미 하원 대표단을 만나 “위안부 피해자들이 90세에 가까운 고령임을 감안할 때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이에 펠로시 원내대표는 여성 인권 차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필요성에 공감을 나타냈다고 청와대가 전했다. 미국 역사상 첫 여성 하원의장을 지낸 펠로시 원내대표는 2007년 7월 하원의장 시절 마이클 혼다 의원이 주도한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이 하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는 데 큰 몫을 한 바 있다.
 

美하원의원, 아베의 과거사 반성 촉구---재미한인들 아베 의회연설 반대 거세
 
아베 총리가 최초로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을 하기로 한 가운데 미 의회에서 아베의 과거사 반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제리 코널리 민주당 하원의원은 3월30일 워싱턴한인연합회 임소정 회장 앞으로 보낸 서한에서 “아베 총리가 이끄는 일본 정부가 과거의 정의롭지 못한 일들을 분명하게 시인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인 유권자들이 많이 사는 버지니아주가 지역구인 코널리 의원은 “일본 정부의 일부 관료들이 반드시 인정해야만 하는 역사적 사실들을 묵살하려는 행위는 매우 충격적”이라며 “아베 총리는 일본군 전쟁범죄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도발적인 발언으로 이같은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해왔다”고 비판했다. 그는 “일본은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일본군에게 겪은 고통을 분명하게 직시하고, 아베 총리 명의의 확실한 성명을 내놓아야 한국과 일본이 이 어두운 국면을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난은 역사 기록의 문제이며, 아베 총리는 그 피해자들과 그 가족이 받아야 하는 존엄과 위신을 빼앗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존 베이너 하원의장의 3월26일 발표로 아베 총리의 상·하원 합동연설이 확정되었지만 재미 한인들의 아베의 의회 연설 반대 운동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뉴욕시민참여센터, 워싱턴 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 등은 대중 집회도 계획하고 있다. 한인 유권자들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미국 연방의원들이 추가로 아베에 대한 성명을 내놓을 가능성이 있다. 지한파(知韓派) 의원 모임인 코리아코커스 공동의장을 맡고 있는 코널리 의원의 성명도 버지니아주 한인 유권자들의 청원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나왔다. 공화당의 에드 로이스 하원 외교위원장은 2월 정의화 국회의장을 만난 자리에서 “아베 총리의 연설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반성을 촉구하는 내용을 어떤 식으로든 기록에 남기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베, 美의회 연설 택일 논란--- 일본 ‘주권회복일’ 다음날이기도
 
아베 총리가 4월29일 미국 의회에서 상·하원 합동 연설을 한다. 베이너 미 하원의장이 초청해 이뤄진 행사다. 공교롭게도 4월29일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히로히토(裕仁·1901∼89년·사진) 일왕(日王)의 생일을 기념하는 ‘쇼와(昭和)의 날’이어서 벌써부터 논란이 일고 있다. 아베 1차 내각 때인 2007년 4월부터 일본 정부는 이날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4월29일은 또 미국 등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이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에 대해 전후 배상 책임을 사실상 면제해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 9월8일 체결)이 공식 발효된 일본의 ‘주권회복 기념일’(28일) 하루 뒤라는 의미도 있다.
 
실제로 아베는 2013년 히로히토의 아들인 아키히토(明仁) 현 일왕이 참석한 가운데 도쿄 시내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주권 회복 및 국제사회 복귀 기념식’에서 만세를 불러 논란을 일으킨 일이 있다. 일본은 1965년 한·일(韓日) 국교정상화 담판을 비롯해 그동안 기회있을 때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내세워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부정했고, 이 때문에 한국·중국 등 주변국들과 마찰을 빚어왔다.
 
이처럼 아베의 미 의회 합동연설 택일(擇日)에는 일본 측의 복합적인 계산이 담겨있는 것으로 확인돼 정부·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한 외교 소식통은 “아베 총리의 상·하원 합동 연설을 막지 못한 것은 우리 정부가 워싱턴에서 벌인 대미 외교 1차 저지선이 무너진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아베의 연설문에 분명한 사과와 반성 메시지가 담기도록 한·미가 일본을 상대로 물밑 외교 공조를 펼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전 외교부 동북아국장)는 “일본은 샌프란시스코조약을 체결하면서 도쿄재판(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 5명을 교수형에 처한 재판)을 수용한다고 천명했다”며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일본 총리가 참배하면 미국이 일본에 제시한 최저선을 넘는 것이란 의미를 이번 기회에 미국이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訪美앞둔 아베, 안보·경제 미국 뜻 다 들어줘---워싱턴 정계 '아베 띄우기' 화답
 
아베 총리의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이 결정되면서, 미국 정부 및 의회 관계자들이 일제히 '아베 띄우기'에 나섰다. 존 매케인 연방상원 군사위원회 위원장이 자신을 '열렬한 아베 지지자'라고 말한 데 이어, 데이비드 시어 국방부 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는 3월27일(현지시각)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안보 관련 세미나에서 "아베 총리는 공개 발언을 통해 스스로 위대한 비전과 평화의 인물임을 보여왔고, 매우 전향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입장을 표명했다"며 "의회 연설에서 이런 입장을 다시 천명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어 차관보는 "2차 대전 종전 70주년은 국제적으로 중요한 이벤트로, 우리는 당시의 비극을 기억하지만, 종전 이후 미래를 지향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매케인 위원장은 이날 CSIS 초청 강연에서 "오랜만에 일본에서 강한 지도자와 안정된 정부가 나왔다. 미국과 일본의 전략적 파트너십과 군사협력이 우수한 데 대해 매우 만족한다"면서 '열렬 지지자' 발언을 했다. 워싱턴 소식통들은 "일본이 그동안 군사·경제·동맹 같은 각 분야에서 미국이 원하는 대로 협력한 데 대한 일종의 찬사로 보인다"고 말했다. 미국 내 '아베 띄우기'는 4월 말 방미(訪美)하는 아베 총리의 선물보따리와 관련이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이때 타결될 가능성이 크다. 일본 내 농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쌀 시장 개방을 일정 부분 허용하는 쪽으로 결론이 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도 아베 총리가 미국의 입맛에 맞는 입장을 취한 게 한둘이 아니다. 오키나와 지역의 반대에도 후텐마(普天間) 미군 비행장 이전을 밀어붙이겠다고 아베가 밝힌 것에 대해서도 고마워하고 있다. 이미 아베는 헌법 해석까지 바꿔가면서 자위대의 집단자위권 행사 요건을 완화하는데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동맹국이 공격받을 때도 반격에 나설 수 있게 해 사실상 미군 주도 군사작전에 편입할 수 있게 했다. 게다가 스텔스 전투기, 오스프리 수송기 등 미국의 첨단무기를 대량 구매하는 '바이어'이기도 하다.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참여하지 않는 몇 안 되는 미국의 동맹도 일본이다. 영국 호주 한국 등 미국의 맹방들이 모두 AIIB 참여를 선언했지만, 일본은 확실하게 미국 편에 섰다.
 
이러한 점을 들어 미국 내에서는 대규모 시위에도, 총리직을 걸고 미·일 안보조약을 개정한 아베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를 떠올리며 '친미(親美) DNA'를 공유하고 있다는 해석도 한다.
 
한편, 시어 차관보나 매케인 위원장 모두 한·일(韓日) 관계 개선에 대한 필요성도 강조했다. 시어 차관보는 "안보협력 강화를 위해 일본과 한국이 과거사 문제에서 훨씬 더 큰 진전을 이뤄내, 활기차고 미래 지향적인 동반자 관계를 만들어내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매케인 위원장은 "한·일 양국 모두가 아시아에서 미국의 가장 강력한 두 동맹인데,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 점이 나를, 그리고 두 나라 모두의 친구인 우리 모두를 가슴 아프게 한다"면서 "위안부 문제와 함께 양국의 악화된 관계를 해결해야 한다. 나는 양측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계속 '서로 앉아서 이 문제를 해결하자'고 간청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베게 경도된 분위기 때문에 한·일 관계 악화에 대한 '한국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오바마의 마음은 이미 콩밭에---아베 방미는 美日 新밀월 신호탄
 
참으로 기묘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 사이의 조합 얘기다. 오바마는 미국 대통령사(史)에서 진보적인 색깔이 가장 두드러진 대통령 중의 한 명이다. 아베는 극우 성향의 국수주의자이고, 역사 수정주의자이다. 이런 두 사람이 손을 꼭 잡고, 동북아 질서 새판 짜기 작업에 나서고 있다. 4월26일 시작되는 아베의 사실상 미국 국빈 방문은 미·일 신(新)밀월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아베는 오는 29일 일본 총리로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미 상·하원 합동 연설에 나선다. 미국 정부는 아베의 의회 연설은 어디까지나 의회가 결정한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게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베에게 레드카펫을 손수 깔아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오바마이다.
 
한국은 아베의 미국 방문과 의회 연설을 놓고 그의 과거사 인식 문제를 물고 늘어지고 있다. 노광일 외교부 대변인은 아베의 미 의회 연설에 대해 “일본 정부가 그간 누차 공언한 대로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변함없이 계승하고,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성찰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베의 과거사 부인 행보로 인한 한·일 간의 갈등 문제를 오바마 대통령 또는 미국 정부가 나서서 중재해 달라는 뜻을 미국 조야에 누차에 걸쳐 전했다.
 
아베의 과거사 망언으로 깊은 내상(內傷)을 입은 한국의 이런 대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가 전략적인 측면에서 한국은 지금 나무만 볼 뿐 숲을 보지 못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오바마와 아베가 이미 과거사를 훌훌 털어버리고, 저 멀리 미래로 내리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 국무부 내 서열 3위인 웬디 셔먼 정무차관이 3월초 한국이 들으라는 듯이 “과거사는 한국, 중국, 일본이 모두 책임이 있으니까 빨리 정리하고, 북핵과 같은 당면 현안에 치중하자”고 했다.
 
미국이 현재 이슬람국가(IS) 등 이슬람 과격 세력과 싸우고 있지만 미국의 최대 관심사는 뭐니 뭐니 해도 국제사회의 공룡으로 커가는 중국이다. 냉전 이후 유일 초강대국 지위를 누렸던 미국은 21세기를 맞아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미국은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와도 다르다는 ‘미국 예외주의’는 역사의 유물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바로 이런 시점에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중국 예외주의’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게 미국의 판단이다.
 
이제 중국을 견제하는 게 미국의 최고 외교 목표이다. 오바마가 표방한 ‘아시아 중심축 이동’ 전략의 포장을 벗겨내면 중국 포위 전략과 다름없다. 미국은 중국을 억누르고 싶지만 힘이 달린다. 그 부족한 부분을 어느 나라가 메워 주면 좋겠다는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런 역할을 할 최고의 국가가 동북아에서 중국의 인접국이자 최대 라이벌인 일본이다. 때맞춰 일본에서 아베가 등장해 ‘강한 일본’을 표방하면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정상 국가로 변모해 가려하고, 자위대의 해외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 제임스 쇼트 케네기 국제평화재단 선임 연구원은 “오바마 정부의 미·일 협력 목표는 중국에 위협을 가하지 않으면서도 아·태지역에서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이클 오스린 미 기업연구소(AEI) 선임 연구원은 “중국의 부상(浮上)에 따른 불안감과 불확실성을 해소하려고 미국이 일본의 군사력 증대와 역할 확대 조치를 지원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오바마와 아베가 중국 포위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의 과거사 문제가 걸림돌이 될 리 만무하다. 한국이 미국에 볼멘소리를 해보았자 효과가 별로 없다. 미국은 오로지 한국, 미국, 일본이 3각 동맹 체제를 굳건히 유지해 나가자고 딴소리만 할 뿐이다. 오바마의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다. 한국은 이런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일(韓日) 간 과거사 문제를 미국에 아웃소싱하려 들지 말고, 한·일 간 직접 대화를 통해 매듭지어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외교 안보팀은 지금 중대한 시험대에 올라 있다.
 
아베의 미 의회 연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
 
아베 총리가 베이너 미 하원의장의 초청으로 4월29일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에 나가게 됐다. 일본의 총리가 처음으로 합동연설에 나선다는 점에서 어떤 연설이 나올지 국내외 외교가의 관심이 뜨겁다. 태평양전쟁 전후(戰後) 70주년을 맞아 아베 총리는 ‘전후 70년과 미국·일본의 관계’라는 주제로 합동연설에 나서게 된다.
 
아베는 WP와의 인터뷰에서 일본군위안부를 “인신매매의 희생자”라고 표현했다. WP는 일본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관해 인신매매라는 말을 쓴 것은 처음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아베의 발언은 기존 입장에서 달라진 게 없다. 인신매매의 주체나 객체, 목적도 적시하지 않았다.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을 앞둔 시점에서 위안부 문제의 책임을 민간업자들에게 돌리고 일본 정부의 책임을 피하려는 사전 정지작업 차원의 발언으로 볼 수밖에 없다.
 
아베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측량할 수 없는 고통과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을 겪은 이들을 생각할 때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정작 들어가야 할 사과와 반성은 빠진 채 개인적인 연민만 담았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미국 여론 주도층은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사과와 반성을 한 것으로 오인할 수 있다. 아베는 같은 날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위안부 문제에 관해 “마음이 아프다”면서도 “역사 속에는 많은 전쟁이 있었고 그 와중에 여성 인권이 침해돼 왔다”고 말해 전쟁이 초래한 비극으로 일반화하려는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다양한 채널에서 드러나는 일본의 입장을 요약하면 ‘역사인식과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에 전향적 태도는 없다’이다.
 
문제는 아베의 이러한 내용의 연설이 미 의회 합동연설에서 나올 경우의 후폭풍이다. 외국 정상이 의회에서 연설을 하고, 상하원 의원들이 모두 기립박수를 보내는 합동연설의 관례는 미국이 외국의 정상에게 보내는 최고의 예우이다. 이 과정에서 외국 정상의 입장을 미 의회가 지지하는 모양새가 연출되면서 양국의 동맹관계는 더욱 강화된다. 아베 정부가 오직 미국만을 상대로 ‘순애보 외교’를 펼치고 그토록 합동연설에 서고 싶어 했던 이유다.
 
만약 아베가 합동연설에서 전범국으로서 사과의 내용 대신, 일본의 원조로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발전했고 위안부 문제는 인신매매라는 연설을 한다면 우리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다. 현재 미국 의회는 70년 만에 2차 세계대전을 겪었던 세대가 모두 빠져있다. 지난 2006년 고이즈미 총리의 합동연설 추진을 막았던 헨리 하이드 위원장 같은 참전 세대가 없다는 의미다. 애초에 아베의 합동연설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대미외교가 실패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다만 미국 내 여론에서도 아베가 연설을 통해 태평양 전쟁 등 과거사 문제에 진실된 사과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한국 외교당국이 아베의 합동연설 전까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과제가 명확해진 셈이다. 이에 대해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미국 의회나 싱크탱크들을 통해 아베 총리의 합동연설을 처음부터 봉쇄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태평양 전쟁은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과거사 문제는 미국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다. 외교당국이 이를 잘 이용한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의 가능성이 될 수도 있다”고 관측했다. <精吾 문 윤 홍·칼럼니스트·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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