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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란의 종교가 산책
내가만난 달라이 라마⑤
보편적 객관적 시각에서 본 달라이라마의 역정
기사입력: 2015/01/06 [10:53]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이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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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라이 라마가 17년간의 사원대학교육을 마치고 당대의 유명한 대학승(大學僧)들로 부터 질문을 받고 답하는 마지막 구두시험을 보고 있다.     © 매일종교신문
▲ 가장 어렵다는 대논쟁에 의한 논리학 시험. 그는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여 게쉬(박사. 善知識) 학위를 받았다.     © 매일종교신문
달라이 라마는 2세 때, 제13세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선택된 다음, 라싸로 옮겨서 포탈라와 노블링카에 살면서 6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전세영동(轉世靈童:환생한 아이)의 어린 달라이 라마는 정궁(正宮)인 포탈라(Potala) 궁에서 13세의 환생임을 확인하는 의식을 치루고 하궁(夏宮)인 노블링카(Norbulingka) 별궁(別宮)에서 잠시 기거하면서 조캉 사원에서 삭발을 하고 사미(예비승려)가 되어 스승들의 특별 지도를 받으면서 성장했다.
 
포탈라 궁은 제5세 달라이 라마인 나왕 롭상 갸쵸(1617-1682)가 1645년에 짓기 시작해서 1649년에 백궁(白宮:정치행정담당)인 보트랑 까르포(Potrang Karpo)로 옮겨서 정사를 본 건물이다. 포탈라는 아바로기테스바라인 관세음보살이 상주(常住)하는 집을 의미한다.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기 때문에 기거하는 집의 이름을 포탈라 궁으로 명명하였다. 라싸의 포탈라는 왕이 사는 일종의 왕궁 개념이지 사원이 아니다. 하지만 세속적 왕이면서 동시에 종교적 수장이기 때문에 또 하나의 건물인 홍궁(紅宮:종교기능)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백궁은 세속적 정사를 논해야 했고, 정부의 내각과 각부 장관과 관료가 근무하는 정부 청사의 역할을 했고, 홍궁은 종교적인 역할을 했는데, 선대(先代) 달라이 라마들의 부도(무덤)와 불상과 삼장(三藏)을 봉안하고, 불교도들을 접견하고 설법을 하며 기도하고 수행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므로 내불당(內佛堂)이 건물 각 코너에 있을 정도로 사원 분위기를 풍긴다. 제14세 달라이 라마가 1959년 인도로 망명간 이후, 포탈라 궁의 기능은 정지되었다. 하지만 포탈라 궁은 달라이 라마 성하가 떠난 그 시점에 그대로 멈춰져있다. 달라이 라마가 사용하던 집무실을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었는데, 책상이라든지 의자 비품 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2001년 기준). 이제 포탈라 궁은 박물관이 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등록지가 되어있다.
 
포탈라의 별궁으로서 하궁 기능을 한 노블링카(의미:보석공원)는 라싸에서 3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제7세 달라이 라마가 1755년에 건립을 시작해서 1783년에 완성하여 세속적 정사(政事)와 종교적 종무(宗務)를 본 포탈라의 별궁이었다. 2001년 유네스코세계유산등록지가 되었다. 노블링카는 제13세와 제14세 달라이 라마가 특히 주석하였고, 1959년 라싸봉기 때, 중공군의 공격으로 상당한 손상을 입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14세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길을 떠날 때도 이곳 노블링카에서 병사(兵士)로 위장하여 중공군의 눈을 피해서 탈출한 사건은 너무나 극적이다.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1940년 제14세 달라이 라마를 승인함과 동시에 즉위식에 국민당 정부 대표로 지역 사령관인 장군을 파견하여 축하했다. 장 카이석 정부는 티베트 문제에 대해서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이 지역 군벌 무슬림 사령관인 마 부풍에게 요청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중국과 티베트는 국경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간헐적으로 발생했고, 한편 중국 국민당 정부는 일본과도 싸워야 했지만, 공산당과도 내전을 치러야 하는 등, 중국은 그야말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이 무렵 티베트의 정치는 행정부인 카샤그가 주도했다. 카샤그는 1721년 청(淸) 정부가 만들어서 1751년 건륭황제 때부터 시행된 티베트 행정부이다. 수상과 4명으로 구성된 칼론(내각장관)이 종교 정치 경제 외교 군사 등을 각각 담당해서 달라이 라마와 협의하여 정치 행정을 집행하는 정부이다.
 
중화민국은 몽장위원회(蒙藏委員會)를 설치해서 몽골과 티베트를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중화민국 정부가 중국 대륙을 통치하고 있을 때, 몽장위원회는 주로 소수 민족 종교 관련 사무에 종사했고, 몽장위원회는 1940년 티베트에서 14대 달라이 라마 즉위식이 열렸을 때, 이를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 후 몽장위원회 사절단은 1948년 티베트 정부에 의해 강제로 퇴거되기까지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 중화민국 행정원 몽장위원회 주(駐 )티베트 대표처 라는 이름으로 1948년까지 주재하였다.
 
중국 국민당이 국공 내전에서 패하자 중화민국은 정부를 난징에서 타이베이로 천도하였고, 중국 공산당은 베이징을 수도로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여 분단되었다. 이로써 몽장위원회는 중국 대륙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에 관한 업무가 사실상 중단되었지만, 타이베이로 천도한 중화민국은 중국을 대표하는 정통 정부라는 의미로 이 조직을 그대로 2011년 12월 31일까지 유지했으며, 이런 근거로 달라이 라마는 1997년과 2001년에 이어서 2009년에도 대만을 방문했으나 2012년 이후에는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중국에서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면서 티베트 문제는 크게 꼬이기 시작해서 드디어, 중국 해방군은 캄 지방을 공격하는 등, 라싸까지 위험한 상황에 이르렀다. 1950년 10월 8만 명의 중국 해방군이 라싸로 진군했다. 1950년 11월 17일 달라이 라마는 15세의 나이로 제14세 달라이 라마로 공식적으로 즉위하여 티베트의 통치자로 등극했다. 제13세 달라이 라마가 입적(入寂)한 후에는 티베트는 카샤그(내각)의 수상과 장관에 의해서 섭정되고 있었다.

달라이 라마는 두 명의 수상을 임명한 바, 라마인 롭상 타쉬와 민간인 한 명을 더 임명해서 집정토록 했다. 또한 사절단을 구성해서 미국 영국 네팔에 티베트의 원조를 위하여 파견했으나 큰 성과는 올리지 못했으나. 그 후 미국CIA는 달라이 라마가 1956년 인도에 왔을 때 은밀히 접촉하여 콜로라도의 한 캠프에서 티베트를 위한 티베트인들로 구성된 게릴라 훈련을 시키기 시작했다. 달라이 라마가 1959년 인도로 망명할 때, 게릴라들은 미국 특수요원(CIA's Special Activities Division)과 인도 부탄을 경유하여 티베트에 들어가서 달라이 라마를 호위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달라이 라마가《나의 조국 나의 국민 My Land and My People》1962년 출간에서 티베트 게릴라를 언급하였으나, 이들이 미국에서 훈련받았다는 사실과 CIA의 SAD는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었다.
 
달라이 라마는 1950년 인도국경 시킴으로 잠시 망명했다가 중국과 티베트가 1951년 5월 23일 17개 조항에 합의하자, 달라이 라마는 그해 8월 라싸로 돌아왔다. 중국에서는 십칠조협의(十七條協議)로 표현한 것으로, 양측이 베이징 시에서 체결한 조약으로, 중화인민공화국과 티베트 양측의 정치적 관계와 티베트의 자치권 보장, 종교적 자유 인정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 달라이 라마가 마오쩌뚱에게 티베트의 전통 예의 표현으로 하얀 실크 스카프를 건네며 인사하고 있다(1954년).     © 매일종교신문
 
달라이 라마는 제10대 판첸 라마와 함께 1954년 9월 27일 베이징에 가게 되고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에 뽑히기도 했다. 달라이 라마는 처음 베이징에 가면서 중국의 철도라든지 근대화된 모습을 보고 상당히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그의 저서에서 술회하고 있다. 베이징에서는 마오쩌둥 주은라이 덩샤오핑 등과 만나고 특히 마오쩌둥과는 여러 차례 회동을 하게 되는데,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독립과 자치권을 요구하면서 중공군의 퇴각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이것은 달라이 라마의 입장설명이며, 과연 중공이 강제로 점령한 상황에서 가능했겠느냐는 추측이다.
 
마오쩌둥은 달라이 라마를 설득해서 양측의 정치적 관계와 티베트의 자치권 보장, 종교적 자유 인정 등의 내용을 이미 합의한 대로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라싸로 돌아와서 6백만 티베트인의 안전과 국가의 보위를 위해서 고심에 찬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달라이 라마는 마하보디 소사이어티(대각회 大覺會)로부터 1956년 인도 보드 가야의 부처님 오신 날 행사에 초청을 받게 된다. 대각회는 스리랑카 출신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 라는 분이 인도불교성지 유적 보호를 위해서 1891년 설립한 단체이다. 달라이 라마는 이 때 인도에 가서 네루 수상을 만나서 도와줄 것을 요청했으나, 네루 수상은 1954년 인도-중국과의 조약체결로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이 무렵 CIA는 달라이 라마를 돕겠다고 접촉, 비밀 암약을 했으며 콜로라도의 헤일 캠프에서 티베트에 파견할 게릴라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나중에 암도와 캄 지역의 공산군을 공격하고 중앙 티베트로 밀고 들어간다는 계획을 세우고, 1956년 사천성 캄 지역에서 폭동을 일으키는데 암약을 했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는 행사에 참석한 다음, 불교 성지 순례를 계획했으나, 티베트에서 소요사건이 발생하는 등, 정정(政情)이 불안하자 라싸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달라이 라마는 인도 방문 중, 마침 인도를 방문한 주은라이와 몇 차례 회동하면서, 티베트의 독립을 요청했다고 하나, 사실여부는 알 수 없지만, 달라이 라마의 친형이 강력하게 요구했다고 달라이 라마는 그의 비망록에서 언급하고 있다.
 
▲ 달라이 라마가 인도망명길에 병사로 위장하여 얼음 덮인 티베트의 한 강을 건너고 있다.     © 매일종교신문

1959년 3월 10일은 라싸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중국공산당의 강압적인 티베트 통치에 반발한 티베트인에 의하여 일어난 반(反) 중국, 반공산주의 봉기였다. 이 봉기는 1956년 티베트의 캄 지방과 암도 지방에서 티베트인에 의한 무장 반란의 연장선상이었다. 중공정부는 티베트 동부 지역에 인민해방군을 증파하고, 라싸에 진주한 인민해방군은 티베트의 마을이나 사원에 대해서 공격을 강화하였다. 인민해방군 사령관은 티베트 게릴라 부대를 굴복시키기 위해, 포탈라 궁과 달라이 라마를 폭격하겠다고 위협하면서 거리를 좁혀 오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달라이 라마는 비밀리에 피난 준비에 들어갔고, 3월 17일 달라이 라마의 궁전 근처에 인민해방군이 발사한 2발의 포탄이 명중해, 이것이 그의 인도 망명행과 망명정부 수립의 결정타가 되었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병사로 위장하여 노블링카를 은밀히 빠져나와 그의 측근과 가족과 호위병으로 구성된 망명단이 인도 망명길에 올랐다. 수천 미터의 산을 넘고 강을 건너 3월 30일 티베트 인도 국경에 도착하고 4월 18일 아삼 지역에 도착하여 네루 수상이 제공한 기차로 머스우리 라는 데에 까지 가서 다람살라로 향해서 망명정부를 세우게 된다. 1956년 달라이 라마가 인도 방문 시에는 네루 수상은 달라이 라마의 망명타진에 명확한 답을 하지 않았으나, 막상 달라이 라마가 인도 국경에 도착하자 네루 수상은 망명 환영 전보를 쳐서, 달라이 라마와 그의 가족과 일행의 망명을 허용하고 지원한다는 내용이었으며, 수백 명의 국내외신 기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달라이 라마가 인도에 도착, 네루 수상의 환영을 받고 있다     © 매일종교신문

한편, 달라이 라마가 라싸를 탈출하고 난 뒤인 3월 19일에는 라싸의 주요 사원에 대한 포격을 포함한 전투가 시작됐다고 한다. 티베트군은 인민해방군에 비해 숫자와 무장이 빈약해, 이 전투는 이틀 만에 종료되었다고 하며, 티베트 망명정부의 추정치에 의하면 1959년 봉기 때 티베트인 약 8만 명 이상이 인민해방군에 의해 사망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중국 정부는 이 주장에 반대 하고 있다. 라싸의 주요 사원과 절은 중공군의 폭격에 의해서 심한 손상을 입었고 약탈, 파괴되었다고 하며, 라싸에 남은 달라이 라마의 무장경비원과 무기를 숨기고 있었던 티베트인들은 무장 해제가 되어 공개처형 되었다고 망명정부는 주장한다.
 
▲ 달라이 라마의 2005년 만해평화대상 수상소감 메시지.     © 매일종교신문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는 아직까지 한국방문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성하께서는 2005년 만해평화대상을 수상했다. 필자가 중간 역할을 했고 8월12일 수상식에 참석하도록 동분서주했지만, 비자가 발급되지 않아서 못 오시고 일본주재 동북아대사가 대신 수상했으나,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는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나는 수상자론, ‘달라이 라마, 지혜와 자비의 바다’를 쓴 바 있다. 그의 수상소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저를 2005년 만해대상 평화부문 수상자로 결정하고, 초청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는 만해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 것을 매우 영광스럽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티베트 문제를 비폭력적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저의 노력을 인정해 주신 것을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 국민들도 티베트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큰 사회의 변동을 겪었으며, 유사한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풍부한 불교 전통을 잘 보존하려고 애써 온 한국 법우님들의 결의와 헌신에 대하여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며, 한국국민들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달라이 라마-“
 
지금 다람살라 달라이 라마 비서실은 한국불교계와 여러 채널을 통해서 달라이 라마 성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교류하고 있으며, 중국정부는 매우 민감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이다. ‘내가 만난 달라이 라마’를 매일종교 신문에 연재하자마자 안티 달라이 라마 측(슉덴 Dorje Shugden=金剛護法神신봉자)에서 반응을 보이고, 한국의 불교 언론계와 추종자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티벳 하우스 코리아는 이 문제에 대해서 홈페이지에서 묘한 뉘앙스(슉덴추종자=중국정부)를 공지하고 있다. 다람살라에서 성하를 친견하고 방한 초청장을 전달한지 어언 23년여가 지난 지금, 한국 땅에서 추종자와 안티가 논쟁하는 것을 보고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한다.
 
나는 순수한 입장에서 내가 만난 달라이 라마의 경험과 그 분의 활동을 통해서, 성하의 덕 높으신 자비와 지혜를 갖추신 큰 스님을 존경하는 뜻에서 가능한 보편적 객관적 시각에서 글을 쓰고 있음을 밝힌다. 그 분의 세계평화활동과 승려로서의 보살행을 소개하고자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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