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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빛을 그리다, ‘클로드 모네’를 만나다

강선희 기자 | 기사입력 2023/06/25 [01:49]
-도슨트 정우철 해설... 빛을 쫓은 모네는 빛이다-

인생의 빛을 그리다, ‘클로드 모네’를 만나다

-도슨트 정우철 해설... 빛을 쫓은 모네는 빛이다-

강선희 기자 | 입력 : 2023/06/25 [01:49]

▲ 인생의 빛을 그리다, 클로드 모네...도슨트 정우철  © CRS NEWS


지난 23일 충남도서관 문화교육동 강당에서 도슨트계의 아이돌 정우철이 인생의 빛을 그리다란 부제로 인상파의 거장 클로드 모네의 미술 작품을 이해하기 쉽게 해설해주었다.

 

도슨트란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에서 전시작품을 설명하는 사람을 말한다. 도슨트 정우철은 EBS 클레스e 시청률 1위를 달성하는 <정우철의 미술극장> 진행자이자, 프리랜서 도슨트로 활동 중으로 맥스 탄튼, 앙리 마티스, 샤갈, 에바 엘머슨 등 화가들의 전시회에서 작품을 소개한 이력이 있다.

 

클로드 모네는 가장 익숙한 화가

도슨트 정우철은 클로드 모네가 가장 익숙한 화가라서 오늘 강연으로 들고 왔습니다라 말했다. 모네는 빛이다. 그림에서도 인생에서도 빛을 좇았고 혁신을 좇았다.

 

어린 관객들이 눈에 많이 띄니까 도슨트 정우철은 그림은 최대한 어릴 때 배워야 합니다. 어릴 때 좋은 경험을 만들어주십시오. 전시회에 갔을 때 행복한 날이란 경험을 주면 자라서도 또 갑니다라고 말하며 어릴 때 미술 관람 경험을 적극적으로 갖게 해줄 것을 당부했다.

 

모네 하면 수련인상파 거장이란 두 가지 수식어가 떠오른다. 모네는 왜 수련에 집착했을까? 모네를 왜 인상파 거장이라고 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 클로드 모네(1840.11.14. ~ 1926.12.5.) 초상화  © CRS NEWS

 

르아브로 항구는 우리나라의 인천과 같다. 파리에서 너무 멀지 않고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으로 모네는 유년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모네는 자연을 좋아했고, 학창시절 수업을 잘 빼먹고 바닷가나 산으로 가서 그림을 그렸다.

  

모네는 사람이든 자연이든 그 특징 포착하는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케리커쳐를 잘 그렸다10대 때 그린 케리커쳐가 스케치북에 남아 있다.

▲ 모네가 그린 케리커쳐  © CRS NEWS


만약에 내가 케리커쳐를 계속 그렸다면 유년 시절에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일반 노동자의 평균 일급이 5프랑(한화 5만원 상당)으로 마지막에 판 값은 10~20프랑이었으니 진짜 많이 번 것이다.

 

사람은 스승을 잘 만나야 한다. 케리커처 그리는 것을 갑작스레 멈추고,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풍경을 그리러 온 화가 의젠부댕이 모네의 솜씨를 알아보고 스승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모네는 "부댕을 만난 후 나의 두 눈이 비로소 열렸고, 진정으로 자연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부댕은 모네에게 풍경을 그릴 때는 그 풍경 앞에서 그 풍경을 보면서 그려야 살아있는 풍경을 그릴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때까지만 해도 풍경을 그릴 때는 밖에서 스케치만 하고, 대부분은 작업실에서 그렸다.

 

모네의 첫 스승, 부댕은 하늘을 많이 그린 화가다. 모네는 부댕을 통해서 살아있는 풍경을 그리기 위해서는 직접 보고 그려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이어서 부댕은 모네에게 예술가로 성공하려면 파리로 가야한다고 했다. 드디어 모네도 파리로 갔다.

  

파리 미술은 왕립아카데미와 살롱전이 특징이다. 루브르에 가면 살롱전이 열린다고 표시가 돼 있는데 아무도 안 본다. 살롱전은 국전인데, 왜 만들었을까? 서민들은 당시에 그림 보기가 힘들었다. 국가에서 이것이 미의 기준이다라고 그 기준을 정해주는 것이다. 살롱전에 걸려야 예술가로써 성공을 인정받기 때문에 모든 화가들이 살롱전에 지원했다.

 

그림에도 급이 있었는데 역사화, 신화, 종교 이 세 가지를 제일 높게 쳤다. 다른 주제는 급이 달린다고 평가도 안 했다. 예술계가 그만큼 보수적이다. 우수한 성적으로 붙은 그림 바칸데스의 춤’(1849)이 뽑혔다. 당시의 그림은 본 것을 그린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그린 것이다.

 

반기들고 일어난 사람들이 인상파다

이때 반기들고 일어난 사람들이 인상파다. 모네, 느르와르, 에드가 드가 등이다. 인상파 때 부터 예술가 이미지가 생겼다. 그림은 원래 돈 있는 사람이 의뢰하고, 고치라고 하면 고쳐줘야 했지만 인상파 때부터 자유롭게 그렸다.

 

모네의 초기작품을 보면 과거를 향하던 눈이 현재에 머물렀다. 내가 보는 것, 내가 사는 모습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인상파의 아버지는 마네이다. 마네는 모네의 정신적 스승이지만 인상파는 아니다.

 

당시 중요한 신화, 역사일수록 캔버스를 크게 그렸다. <정원의 여인들>은 실제 사이즈가 세로 2.55M이니까 대놓고 반항한 것이다. 큰 그림을 야외에서 어떻게 그렸을까? 모네가 인터뷰 한 내용에 따르면, “다른 인상파 화가들이 도와줘야 했다. 땅을 파고, 하단부는 묻어놓고 그렸다”고 했다. 얼마나 고생됐을까?

 

인상파들이 싫어했던 색은 검은색이다. 빛이 있는 한 완전한 검은색은 없다고 봤다.

 

모네는 카미유와 결혼했다. 혁신이 일어나는 시기에 모네의 뮤즈 카미유가 고생을 많이 했다. 아이도 낳았다.

 

<장모네의 초상> 1868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아들을 그린 것이다. 모네는 좋은 아빠였다.

 

▲ 장모네의 초상화  © CRS NEWS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젊은 사람들이 징집됐다. 모네는 영국으로 대피했다. 도피차 갔는데 그곳에서 인상파를 완성 시킬 힌트를 윌리엄 터너의 그림을 통해 보았다.

 

윌리엄 터너는 천재였다. 최연소 미술대 교수. 30대 초반에 서울대 교수된 격이다. 자연현상을 원근법, 살아 움직이는 듯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모든 게 불분명하다. 바다이다. 땅이 아니다. 중앙에 배가 있다. 배가 증기를 내뿜고 있고, 터너의 마스터피스(최고작)이다.

 

한 겨울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이때다 하고 나가서 눈보라 너무 치니까 돛대에 자신을 묶어달라고 부탁하고, 돛대에 묶여서 눈을 부릅뜨고 4시간 동안 사투를 벌이다가 살아 돌아와서 그린 그림이 윌리엄 터너, 대작인 눈보라이다(1842).

 

예술가들은 나이가 없다. 이때 터너의 나이 67세였다. 목숨 걸고서 그렸다. 내가 하고자 하는 신념. 1874년 무영에술가협회, 인상파의 탄생. 모네가 그린 작품이다.

 

▲ <인상, 해돋이>, 1872 © CRS NEWS

 

■ 혁신이 일어나면 비난이 일어난다
<
인상, 해돋이>는 모네가 자기 고향을 그린 것이다. 새벽에 카페에 앉아서 해돋이 보면서 그렸다. 해돋이는 빨리 끝난다. 바다 표현이 붓 터치가 다 보인다.

 

이 작품을 처음 본 누군가는 인상만 그려놓고 완성했다고 우긴다고 비판했다. 미술사조는 전문가들이 붙인 줄 아는데 아니다. 비평한 것을 듣고 괜찮다며 명칭으로 사용한 것이다. 혁신이 일어나면 비난이 일어난다.

 

비판에 대해 모네는 대중이 내 그림을 보고 왈가왈부할 수 있다그러나 내 인생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나의 것이다라고 명언을 남겼다.

 

도슨트 정우철은 새벽 2시에 모네의 이 말을 보고 펑펑 울었습니다. 방송에 나오고 나서 익명의 사람들한테 SNS에 비난이 계속 올라오니까 상처가 됐고, 무서웠습니다. 그때 이런 거장도 이렇게 비난을 받았는데, 이렇게 견뎠구나!하고 모네를 통해서 배웠습니다라고 전했다.

 

그때부터 붓 터치가 쪼개진다. 물감을 섞지 않았다인상파들이 튜브 물감을 사용했다. 튜브 물감이 없을 때는 돼지 방광에 넣고 다녀서 잘 터져 너무 불편하므로 대개 실내에서 그렸다. 휴대용 물감이 나오니 편리해졌고, 기차가 나오니까 여행업이 발달했다.

 

인상파들이 반 발자국 앞서가고 있었다. 인상파들이 그린 것은 빛, 공기, 대기의 움직임이었다.

 

▲ 양산을 쓴여인  © CRS NEWS


<양산을 쓴 여인>, 1875. 왼쪽의 여성이 카미유, 그 여인만 사랑했다. 오른쪽의 여성은 카미유가 아니었다. 모네 때문에 인상파란 말을 들었는데 전시회에 참석을 안 하니까 변절자라 불렸다. 사실, 둘째를 낳고 카미유가 자궁암에 걸렸다. 이제 사람들 시선이 변하고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니까 병에 걸려 안타까운 일이었다. 카미유는 30대에 떠났다. 카미유가 죽고 나서 독특한 작품이 그려졌다. 개인전과 판매에 집중하는 모네였다.

 

▲ <임종을 맞은 카미유>, 1879  © CRS NEWS

 

<임종을 맞은 까미유>에 사인을 하면 카미유를 보내줘야 한다. 모네의 사인을 클로즈업해서 보면 마지막 글자에 하트를 그려 넣었다.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던 모네이다.

 

까미유가 죽고 나서 건초더미 연작 25점을 그렸다. 그동안은 연작이 없었다. 모네가 처음 시도했다. 똑같은 것을 봐도 시간마다 다 다르다. 빛이 곧 생각이다. 빛이 변할 때마다 색이 변한다. 건초더미가 고가이다. 최근에 건초더미가 논란이 되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건초더미, 가장 유명해진 건초더미다.

 

천재 법학자가 인상파 도시에 갔다가 모네의 건초더미를 보고 놀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림을 보고 무언지 못 알아보았다. 도록을 보니 건초더미라고 써 있었다. , 형태가 명확하지 않은데 색채와 붓 터치로 변화를 줄 수 있구나! 지금 미술계에 혁신의 바람이 불고 있다. 여기 탑승해야 된다." 결국, 그는 법학자를 그만두고 미술학원에 등록해서 화가가 된 칸딘스키이다칸딘스키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가 모네의 건초더미이다.

 

 

모네가 정원가꾸기와 수련 가꾸기에 집착했던 것은 행복해서가 아니다. 시련의 아픔을 이겨내려고 했던 것이다. 밖에서 14시간 그림을 그렸으니 노년에 백내장으로 눈이 다 망가졌다. 돈은 있었지만 수술해도 성공률이 낮아서 무서워했다. 수술받다 잘못돼서 안 보일까 미루었지만 결국 왼쪽 눈은 실명이 되고 나서 최악의 순간에서 수술을 받았다.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기 전에 모든 것을 그리고 싶다.“

 

모네가 남겨준 선물

 

도슨트 정우철은 그 화가의 마스터피스를 꼭 살펴보십시오. 살면서 한 번쯤은 가보십시오. 어릴수록 좋습니다라고 당부했다.

 

모네가 남겨준 선물이다. 모네는 많은 사람들이 수련을 감상할 수 있게 내주면서 부탁했다. “인공조명은 쏘지 마라. 자연광으로 보게 하라”.

 

▲ 모네가 남겨 준 선물  © CRS NEWS


저는 위대한 화가도 위대한 시인도 아닙니다.

제가 아는 거라곤 자연에서 느낀 것을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 뿐입니다

 

거장들 보면서 공통점이 있다. 거장들은 하나 같이 힘들까. 힘들게 살았기 때문에 거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아서 거장이 됐다. 이 시간 통해서 그 사람 인생을 좇아가면 그 시야가 넓어진다.

 

5777919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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