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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이해하는 한국무속의 실체(2)

장정태 논설위 | 기사입력 2024/03/21 [10:26]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현장에서 이해하는 한국무속의 실체(2)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장정태 논설위 | 입력 : 2024/03/21 [10:26]

집안 신앙, 마을 신앙, 무속 신앙으로 나뉘는 민속신앙-무속은 민속의 일부

 

만신의 신당은 신이 내린 신을 위주로 꾸며지게 된다. 실재하는 인물을 비롯해 다양한 신격이 몸 주신으로 등장한다.

 

우리나라의 민속 신앙은 크게 집안 신앙과 마을 신앙, 그리고 무속 신앙으로 나뉜다. 집안 신앙(가신신앙)은 주로 집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이다. 집안 신앙의 대상은 집터의 토지신, 안방의 조상신, 마루의 성주신, 부엌의 조왕신, 출입구의 수문신, 뒷간의 측신, 우물의 용신 따위가 있다. 마을 신앙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산신 · 동신 · 골매기신 따위를 모신다. 무속 신앙은 주로 무당을 중심으로 하여 전해 내려오는 신앙이다. 무당이 하는 갖가지 형태의 굿으로 개인이나 공동체의 안녕과 복을 빈다.

 

민속 종류 그 속에 무속이 있다. 무속은 민속의 일부다. 사람들은 민속은 무속으로 알고 있다.

은 일제에 의해 우리 고유문화 전통신앙 폄하용으로 사용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것을 탈피해 무교라고 주장한다.

 

내가 아는 범위 내 무속(샤먼)이 종교화 대접받은 예는 없다. 한국만 독특한 모습이다. 대한승공경신연합회(현 경신회) 소속 일부 무속인들이 경천신명회를 조직 현재 민족종교협의회 산하단체로 가입했다. 민족종교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부에서 7대 종교지도자 초청 시 대통령실에 민족종교 지도자 일원으로 무속인도 당당히 참석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순수 무속인보다 관리자들이 대표자로 참석이다. 조금 비약일 수 있지만, 현실적 논리는 그렇다.

 

무속인이 불교 승려가 될 수 있고 불교 승려가 무당인 경우도 다반사

 

한국무속의 특징이며 종교라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속과 불교와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한국불교와 무속은 경계가 모호하다. 무속인이 불교 승려가 될 수 있고 불교 승려가 무당인 경우도 다반사다. 결국, 불교와 무속, 무속과 불교의 경계가 한국사회에는 없다.

 

너무 직설적 표현이지만 무당이 불교종단 최고지도자 정신적 지도자 종정, 총무원장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굿을 전문으로 하는 곳을 굿당이라고 한다. 많은 굿당이 불교종단에 가입된 사찰이며 굿당 주인은 사찰의 대표자, 승려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 순수하게 무속업에 종사하는 무속인은 불교사찰 출입시 일반 신도와 같은 대우를 받는다. 사찰측에서도 특별한 대우를 하지않는다.

 

여기서 의문은 한국불교의 대표종단 조계종은 하는 물음이다. 한국에는 조계종이란 거대한 비구 독신종단과 결혼한 승려들이 다수 차지하는 대처종단이 있다. 우리는 모두 조계종 승려는 처음부터 조계종 승적을 취득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조계종 승적 취득과정을 보면 꼭 그렇지만 않다. 그 군소 종단 소속 승려가 조계종 승려가 될 수 있고 군소 종단은 점쟁이, 무속인, 일반인도 승려증 취득이 쉽다. 가장 먼저 군소 종단에 입종후 전종형식으로 신분세탁을 하면 조계종 승려가 될 수 있다. 지금까지 본 주제와 다를 수 있지만, 한국무속이 독립된 종교, 무교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15세기 초 유교를 국시로 하는 정권이 탄생하면서 무속은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백정, 창기와 함께 천민으로 분류되었으며 일제하에는 한국의 민족문화는 무엇이든 탄압하던 식민지 정책에 의해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해방 이후에는 서구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미신 시 당하며 기()를 펴지 못하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 전국적으로 전개된 새마을 운동으로 전근대적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된다. 

 

▲ 역사적으로 무속은 천민, 미신으로 취급되며 종교로 보기보다 우리 조상들이 행해오던 하나의 의식 정도로 생각했다.  © CRS NEWS

 

역사적으로 미신 시 당하며 기 펴지 못힌 무속-1980년 중반부터 활기

 

그 결과 무당이나 마을의 서낭당 신앙과 것은 차츰 비주류 문화로 전락하게 된다. 현재 무속을 종교로 보는가 하는 문제에서 종교로 보기보다 하나의 전통적인 민간신앙,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행해오던 하나의 의식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 실례로 문화관광부 산하 종무실에는 불교를 비롯해 기독교, 민족종교를 상대하는 종무실이 설치되어 있지만 그들의 주 업무는 불교, 기독교, 민족종교를 상대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서울 근교에 수십 개의 굿당이 정부의 미신타파 때문에 강제철거를 당하고 어렵게 명맥을 이어오던 굿당들이 80년도 중반기부터 활발하게 들어서고 있다. 무당의 숫자는 대한민국 어느 기관에서도 정확한 통계치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얼마다고 말할 수 없지만 대략 몇만 정도는 되리라는 것이 무속 연구자들의 생각이다.

 

그 몇만 속에도 무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과 무속 행위를 하면서 방편으로 불교종단, 민족종교단체 회원으로 활동하는 숫자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정확하게 분류하고 통계잡기는 어렵다. 그러나 굿당의 숫자가 늘듯 무당의 수도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인다. 그 예로 여성 잡지는 물론 스포츠 신문, 광고비가 중앙 대형 신문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매체에 광고하는 숫자도 날로 늘고 있다. 아울러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인터넷을 통한 광고전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전화 상담, 사주카페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생존해 가고 있다.

 

성직자를 통해 신과 부처와 만나는 것과 하등 다를 것 없는 무당의 중재

 

무속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들이 자신의 힘만으로 풀 수 없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 무당의 중재로 신령의 힘을 끌어들여 풀어가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다른 종교에서도 중간(성직자)을 통해 신과 부처와 만나는 것과 하등 다를것이 없다.

 

무당은 본래 노래와 춤으로 강신을 하는 여무를 말하고 박수도 남무이면서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이를 박수무당이라고도 하는데(조선무속의 연구(朝鮮巫俗硏究)1937년에 발간된 아키바 다카시(秋葉隆)와 아카마쓰 지조(赤松智城)의 공저) 이는 주로 서울 이북의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경향이고 판수와 같이 가무에 의하지 않고 독경으로 귀신을 다스리고 점복을 주로 하는 사람으로 비 장애인 무격을 충청도 지방에서는 박수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만신은 이능화 선생의 주장으로 무당이 본래 믿지 않는 신이 없을 정도로 많은 신을 믿는다는 데서 왔다. 이 말이 무척 오래된 것으로서 포박자에 있다는 주장을 한다. 한국의 무당과 무속 무엇이라고 호칭하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사실은 어떠한 전제 아래에서 어떤 말을 택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고 서로가 각자의 전제를 알고 그것을 분명하게 할 때 불필요한 의론상의 혼선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샤먼이란 17세기 후반 서양의 민속학자들이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과 접촉하면서 그들의 주술종교를 샤먼으로 부르기 시작된 용어다. 이들은 주술 종교적 소질과 능력을 갖춘 모든 종교(사람)를 샤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무속은 샤머니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 샤머니즘이란 샤먼이라는 신들린 사람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베리아 지방의 신앙 형태인데 우리나라 일부 무당은 샤먼과 매우 유사하고 또 굿에서 신들림의 현상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속은 샤머니즘과 다른 요소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어서 이 둘을 동일시하거나 무속을 샤머니즘의 한 분파로 넣는 것은 많은 논란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샤머니즘은 여러 가지 종교에 붙어서 거기서 어떤 신격이나 의식유형을 빌려오는 수가 있다. 혹은 저승의 존재, 육체와 영혼의 분리 망아체험과 비교가 나타나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불교, 도교, 이슬람교 이론적으로는 기독교에서도 가능하다.

 

부처, 관음, 예수, 성모 마리아 등 각 신명보다 우위에 있는 한국의 조상신

 

한국인에게 제일 큰 의지가 되는 신은 부처, 관음, 예수, 성모 마리아 각종 종교단체에서 말하는 신명보다 우위에는 조상신이 있다. 굿거리 가운데 조상거리가 한 거리차지하고 있는 것에도 알 수 있다. 조상거리는 무당이 조상이 되어 그 가족들에게 공수를 내리는 것이다. 무당은 조상의 넋이 저승에서 얼마나 이 세상에 사는 후손을 보고 싶어 하는가? 얼마나 자식들을 생각하고 있는지 천연스럽게 재현을 한다. 그 소리를 듣는 자손은 눈물을 흘리게 된다. 조상님이 보살펴 줄 것이란 전제가 깔린 상태에서 무당의 몸을 통해 자손을 만난다는 설정이다.

 

조상거리에서 하는 넋두리는 대개 그 집안 사정을 잘 아는 무당이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굿을 하기전에 이야기가 나와서 대개 무당이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게 마련이다. 

 

▲ 역사적으로 무속은 천민, 미신으로 취급되며 종교로 보기보다 우리 조상들이 행해오던 하나의 의식 정도로 생각했다.

 

이은관의 <배뱅이 굿>에서 마을 입구 주막에서 주모에게 들은 총각이 한판 굿을 하는 장면을 연상하면 된다. 이런 기초지식을 이용해서 무당이 애통한 어조도 넋두리할 때 그 가족은 자연히 눈물을 흘리고 목이 멜 수 밖에 없다. 무당에 따라서는 이 순간 자기 자신의 원통한 과거를 되새기며 자신의 신세한탄을 실어 슬픔을 배가시켜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므로 그 넋두리의 표현이 더욱 처절하고 실감 나게 받아들여 지게 된다. 예전에 집에서 장례를 치를 때면 곡을 해주는 어머니들이 있는데 그분이 하는 곡소리에는 자신의 서러움을 함께 실어 보냈다. 장민호가 부른 <내 이름 아시죠> 인순이 <아버지> 싸이 <아버지>등은 자신과 아버지의 대비를 통한 감정이입 상태에서 노래를 듣는 이들이 눈물을 흘리게 한다.

 

천 년 동안 향을 피운다는 신도 결국의 우리 조상신이다. 시대가 바뀌고 있지만 지금도 조상, 부모를 위시한 조상신에 대한 기도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무속에서는 깊은 관계를 맺은 신이 굿에 등장한다. 굿은 보통 열두거리라는 과정으로 되어있고, 이 열두거리 안에 신들이 모셔지는 것이다. 한 거리라 하여도 많은 신이 모셔지는 것이지만, 이들 신은 대개 같은 종류나 부류에 속하는 신들로 기능이 비슷한 것이 상례이다. 가령 대감거리라 하여도 터줏대감, 걸립 대감 등 명칭이 다양하지만, 실제의 기능 면에서는 매우 비슷하다.

 

열두거리 신을 살펴보면-본향(本鄕), 불사(佛事), 성주(成造), 조상(祖上), 대감(大監), 창부(倡夫), 별상(別相), 호구(戶口), 산신(山神), 마명(馬命), 가망(感應), 제석(帝釋), 걸립(乞粒) 등이 있다. 

 

 

▲ 엑스터시 상태에서 특정 신을 직접 만나 체험한 신을 몸주라 하여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선녀의 경우에는 교태를 보이기도 한다. 선녀와 접신한 무속인. 그녀의 접신을 기뻐하던 어머니는 잠시 실신을 했다. 험한 길에 들어선 딸의 삶을 스스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 CRS NEWS

 

엑스터시 상태에서특정한 신을 직접 만나 그 신의 능력을 체험하고 성무 뒤에는 체험한 신을 몸주라 하여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굿을 할 때 장군 신이라면 장군의 위엄을 갖추고 선녀의 경우에는 교태를 보이고 동자의 경우에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표현한다.

 

만신의 신당은 그가 신이 내린 신을 위주로 꾸며지게 된다. 무속에서 신은 크게 보면 사람과 신격으로 나눌 수 있다. 사람의 경우 사명대사, 서산대사, 맥아더 장군, 박정희 대통령, 선덕여왕, 최영 장군이 될 수 있고 신격으로 천신, 산신, 용궁 할머니, 글문도사, 조상님, 관성제군, 선녀보살, 동자 등 다양하다. 실재하는 인물을 비롯해 다양한 신격이 몸 주신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삶 속에 있는 인식, 경험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란 주장도 있다. 몸 주신과 관련된 연구는 연구자 관심밖에 있다. 

 

▲ 만신의 신당은 신이 내린 신을 위주로 꾸며지게 된다. 실재하는 인물을 비롯해 다양한 신격이 몸 주신으로 등장한다.  © CRS NEWS


전안, 신당에 모시는 무신도는 만신이 불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화공을 통해 제작한다. 화공에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면 화공은 만신의 이야기를 듣고 무신도를 그리는 주문방식이다. 만신이 직접 자신이 모실 무신도를 그리는 경우도 있다. 몸 주신은 도상(그림)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글로 신의 이름을 쓰기도 하고 돌을 신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자신만 아는 느낌으로 미륵, 장군, 단군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무속에서 우주는 천상과 지상 그리고 지하로 나눈다. 천상은 하늘 세계를 말하는데 막연하다. 그곳에는 천신이 살고 해님 달님과 그 시종 신들이 살며 우주의 삼라만상을 지배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고 있다. 한편으로 피하고 싶은 춥고 덥고 배고픔이 없는 그런 세계로 묘사되고 있다. 지상은 말 그대로 인간과 그 주변 삼라만상과 명부신이 사는 곳이다. 지하세계는 천상세계와 반대로 보면 된다. 춥고, 덥고, 배고프고 인간이 사는데 최악의 세계를 말한다.

 

무속의 신관은 다신관이다.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에도 신이 있다는 믿음이 있다. 이와같은 사상 때문에 천지만물이 모두 신이다. 이 가운데 특히 높은 산, 크고 오래된 나무, 신령을 모시기 위하여 세우는 신간이라는 나무 등이 신성시된다. 높은 산, 오래된 큰 나무, 신간은 지상과 천상계가 수직적으로 연결되어 천상의 신이 강림한다고 믿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 만신의 집에 깃대 나무를 세우고 그곳에 하얀 천, 붉은 천을 끼워 놓는 것이 다 이와 같은 원리다. 빨간색은 육신, 백은 혼을 상징한다. 그리고 태극기를 끼워 놓기도 하는데 해방 이후 6·25전쟁 등 좌우 이념 대립에서 자신들을 보호받기 위해 추가된 것으로 알고 있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태백산 산정에서 신단수를 통해 인간세계로 내려온다. 가락국기에서 하늘로부터 금란이 구지봉 정상에 내려오는 데서 알 수 있다.

 

민간 유포 내세관에 불교 전래 후 일부가 습합된 무속의 사후세계

 

무속에서 내세관은 민간에 널리 유포된 내세관에 불교 전래 후 일부가 습합된 형태로 발전되었다. 무불습합으로 불교적 내세관이 일정 부분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주술적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

 

사람이 죽어서 가는 내세에는 극락과 지옥으로 나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명부로 가서 명부의 십대왕 앞에서 생전의 선악 심판을 받는다. 사찰 전각 가운데 명부전에 모셔진 지장보살이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불교에서 지장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자신은 성불하지 않겠다는 염원하고 있다.

 

무속에서 말하는 지옥의 종류는 억만지옥, 불사지옥, 독사지옥, 한빙지옥, 구렁지옥, 백암지옥 등이 있다. 이곳은 뱀이 득실되는 토굴, 암흑지대 등의 형태로 묘사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지옥의 종류는 불교에서 익히 들었던 지옥이다. 이것은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한 이후 형성된 사후세계관으로 추측된다.

 

무속에서 사후세계는 정확하게 연구되지 않았다. 다만 민간에서는 이승과 저승으로 구분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곳과 죽으면 간다는 그곳으로 인식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좋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저승은 선악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피하고 싶은 장소로 보고 있다. 더 나아가 이승과 저승에서 관계를 살펴보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사람이 저승에서 어머니를 만난다. 반갑게 달려간 아이에게 어머니는 정색하며 이승에서 인연은 이승을 떠나면서 끊어진다라는 단절을 이야기한다.

 

무속에서 말하는 인연의 정리는 깨끗하다.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신파조 인연이 아니다. 이와 같은 단절의 주장은 우리의 장례문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죽은 사람을 입관할 때 혼례복을 입히고 여자의 경우 얼굴에 연지까지 찍어 시집가는 것처럼 꾸민다. 저승으로 출발은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여행 정도로 본 것이다. 무속에서 죽음은 이승과 저승의 단절을 의미하며 저승에서의 삶은 새 출발을 말하고 있다.

 

방송에서 부부가 출연하면 상투적이고 불쾌한 질문이 다음에 태어나면 지금 배우자와 다시 만날 것인가?” 남자는 대부분 다시 만날 것을 원한다. 반면 여자는 뜸을 들이다. 대답한다. “생각해 보고 아니면 거부한다. 한번 살아봤으면 되었다. 윤회를 믿지 않는 종교인에게는 불쾌한 질문이다. 그가 믿는 신앙안에는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내세관에도 없는 질문이다. 단절과 새로운 인연을 맺는것이 한국인의 내세관이다.

 

무속에서는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정리되는 과정은 여느 종교와 다른 매력이 있다. 이승에서 아름답게 헤어지면 섭섭하겠지만 진짜 보고 싶지 않고 생각만 해도 끔찍한 사람을 다시 만난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이런 생각을 하면 무속에서 말하는 이승과 저승의 인연 분리관은 상당히 합리적이다.

 

또 무속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육신과 혼이 분리되고 영혼은 살아있는 사람과 동일한 인격을 갖추고 있고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라고 본다. <사랑과 영혼>에서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 연인 <몰리> 곁을 떠나지 못하고 그녀의 곁을 맴돌고 있다. <>은 귀신끼리는 볼 수 있지만 정작 <몰리>는 볼 수 없다. 사람은 볼 수 없는 존재이며 벽이라는 존재를 무시한 채 넘나들고 있다. 이에 비교해 우리의 귀신영화, 드라마에서는 문을 통해 다니며 자신들의 억울함을 자기들 스스로 해결하기보다 타자를 통해 해결하는 소극성을 보인다. 조선 시대라면 고을 원님을 통해 해결하는 수동적 모습을 보인다. 무당의 몸을 통한 <접신>으로 자신의 의사 표현을 하고 있다.

 

▲ 무속의 신관은 다신관이다. 천지만물이 모두 신이다. 특히 높은 산, 크고 오래된 나무, 신령을 모시기 위하여 세우는 신간이라는 나무 등이 신성시된다. 높은 산, 오래된 큰 나무, 신간은 지상과 천상계가 수직적으로 연결되어 천상의 신이 강림한다고 믿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 그곳에 깃대 나무를 세우고 하얀 천, 붉은 천을 끼워 놓는 것이 다 이와 같은 원리다. 빨간색은 육신, 백은 혼을 상징한다.  © CRS NEWS

 

한국무속의 변명=무당이 가짜와 진짜가 있는가?

 

무당은 굿을 통해서 인간과 신령의 만남을 중재하는 사람이다. ()는 글자에서 위의 가로획은 하늘 또는 신을 표시하는 것이다. 아래의 가로획은 땅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 가운뎃줄은 하늘과 땅을 하나로 연결하는 상징이다. 그런데 그 세로획 양편에는 사람()’ 자가 춤추는 모습으로 서 있다. 곧 무속은 사람이 춤을 추어 신을 찬탄하며 신과 인간을 하나로 연결해주고 있다. 무당은 무속의 의례인 굿에서 사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지닌 전문가다. 무당의 자격과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문적인 학습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무당의 유형은 그 입문과정에 따라 강신무와 세습무로 나눈다. 그 기준은 무속인의 길로 들어서는 과정에서 무병 혹은 신병체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몸주가 있느냐 없느냐 굿을 행할 때 신이 내린 상태에서 춤과 공수를 하느냐 못 하느냐가 구분 짓는 기준이다.

 

대다수 종교가 자신들의 교육기관을 통해 성직자를 배출하고 있다. 그 교육과정을 통과해야만 인정받는 구조다. 무속도 신부모를 통해 인가라는 절차를 받는다. 그 이후 협회, 단체에 가입하면서 사회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일부 이와같은 구조를 벗어나는 예도 있다. 이것은 종교단체 대다수에서 발견되는 모습이다.

 

자신이 스스로 머리를 깎고 절을 창건 후 승려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이 교단을 만들고 신학교를 설립하는 극히 소수지만 존재하는 것이 종교계 현실이다. 민족종교를 표방하면서 종교단체를 창교한 사람들 가운데 1세 교주가 스스로 성직자를 자처 하는데 이들을 사이비 가짜라고 할 수 있을까.

 

이처럼 무속인들을 가짜, 진짜하는 구분은 불가능하다. 각자 인격에 따라 결정할 문제다. 다만 우려스러운 것은 비양심적인 주변 사람들에 의해 오도되는 것이다. 언론 노출을 조건으로 접근하거나 주요무형문화재 등록의 유혹을 하며 접근하는 사람들에 의해 본의 아니게 사기꾼 무당이 탄생하는 것이다. 굳이 진짜와 가짜의 구분을 한다면 무속계 주변에서 기생하는 연구자 집단과 걸립 집단(행사장 마다 찾아다니며 금품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 아귀와 같다.)에 의해 이용되는 일부 무속인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글은 장정태 박사가 지난 13일 천도교 종학대학원에서의 특강을 정리한 것입니다.

▲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 CRS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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