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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방어기제

정영부 | 기사입력 2023/11/02 [08:19]

죽음에 대한 방어기제

정영부 | 입력 : 2023/11/02 [08:19]

 

▲ 본지에 150회 가까이 연재 중인 「영혼학 그 표준이론」이 ‘지식과감성 출판사’에서 지난 8월 출판되었습니다. 독자 제위의 관심을 기대합니다.  © CRS NEWS

 

이번 149회에는 다음 영혼학 그 표준이론의 제12장 내용 중 죽음에 대한 방어기제(2)’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죽음에 대한 방어기제(2)

 

9) 우리가 살아있는 때에는 죽음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에피쿠로스(Epicurus)적 자기기만주의.1)이건 사실 논리도 기제도 아니나 인구에 그토록 오래 회자된 것을 보면 그럭저럭 쓸 만한 모양이다.

 

10)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이승에 대한 엄청난 집착이 낳은 터무니없는 죽음 외면(外面)주의.이는 위 1)의 소산이다.

 

11) 실존(實存), 진리, 인생의 목표, 세상과 인간 행동의 의미 등을 인정하지 않고 삶은 무(, nihil)로 의미가 없으니 죽음도 의미가 없다고 부르짖는 니힐리즘(nihilism).2)이는 마야의 심오한 철학을 삶의 현장에 끌어온 싸구려 기제다.

12) 사는 것이 곧 고통이고 병이니 기회 되면 죽는 게 낫다는 염세주의(厭世主義).

 

13) 혼은 레테(Lethe)강물을 마시고 태어난다. 즉 혼이 몸뇌에 구속되어 있을 때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레테강물의 약효가 약한 때가 있다. 유아기(乳兒期)와 변성의식 중 초기 렘수면, 깊은 최면, 유체이탈, 근사체험 등 혼뇌의식의 때다. 이런 때에는 간혹 전생의 기억이 몸뇌의 현재기억으로 새어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가 아닌 각성 시에도 혼은 혼뇌의식의 잠재적 영향(소위 무의식적)으로 사후와 전생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 있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감쇄된다. 사실 이 이유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장 큰 것일지도 모른다. 혼뇌의 기억이 현재화되지는 못하더라도 혼은 죽음이란 없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14) 물질주의가 만연하다 보니 물질적 삶에 철저히 중독되어 소유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해지고 마침내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이 우려한바 존재와 소유가 전도된 소유가 존재(To Have is to Be)’라는 主義가 창궐하였다. 이 역시 위 1)의 아류다.

 

15) 자연이 생명을 만들어 내는 근원적 충동인 삶의 의지는 생명의 주기(週期)를 이어가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이 없으므로 여기에서 기인하는 목숨연장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쇼펜하우어적 염세주의(厭世主義). 그런데 이 논리가 과연 몇 사람에게 연명(延命)의 쏠쏠한 방어기제가 되었을까?

 

16) 죽음의 공포가 너무 커서 아예 생각하지 않으려는 무조건적 죽음회피주의.3)이는 지니기에는 너무 처절한 방어기제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부분이 조금씩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17) 짐승이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둔해서 죽음을 모르는 무대뽀(無鐵砲).4)이 역시 무명에서 기인하는 1의 아류다.

 

18) 의식은 진화에 의해 자연발생한 육체의 전기작용이니 죽음이란 전기가 나가는 것일 뿐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는 과학교적 믿음.5) 사실 이는 다른 방어기제를 사용하면서 직업상 또는 멋져 보이려고 겉으로 내세우는 허울이다. 이것만으로는 오히려 수명 단축기제다.

 

19) “신을 믿고 살았는데 죽고 보니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잃을 것이 없고 반대로 신이 존재한다면 천국에 간다. 그런데 신을 안 믿고 살았는데 죽고 보니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역시 잃을 것이 없는데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지옥에 간다. 그렇다면 계산상 믿는 게 훨씬 이득이다.”라는 파스칼의 내기에 기댄 얼치기 신앙. 귀여운 아이디어이기는 하나 기제로 쓰기에는 별로일 듯하다.6)

 

20) 종교나 사상에 조종당하여 사람이나 귀신 또는 이데올로기에 마음을 빼앗긴 맹신자와 광신자.7)

 

21) 사후세계가 존재하고 영혼은 영생한다는 여러 종교와 사상. 특히 윤회론8)은 정신문명적으로 가장 선진(先進)한 방어기제다.

 

여기 나열한 방어기제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기제가 더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어기제들은 점점 많아지고 그 심도도 깊어지며 오늘날 모두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어느 한 가지 방어기제만을 사용하지 않는다. 유사한 여러 기제를 동시에 사용하며 또 자신도 모르게 서로 모순되는 기제를 끌어다 사용한다.

 

이제 틱낫한 스님처럼 시체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죽음은 상품화되고 희화화(戲畫化)되어 삶에 짓밟히고 있다. 웬만한 액션영화는 최소 50명 이상 죽어 나가야 팔린다. 그리고 죽어 나가는 방법이 남달라야 평점이 높아진다. 뉴스도 마찬가지다. 그저 그런 교통사고나 살인사건은 뉴스거리도 아니다. 나의 죽음이 아니고서야 죽음다운 죽음은 없는 세상이다.9)심지어 나의 죽음도 스스로에게 도매금이 될 수 있다. 자살률10)이 높은 우리 사회가 그 표본이다. 인생의 목적이, 아니 윤회의 목적이 죽음을 초월하는 경지의 달성이라면 호모사피엔스는 이제 지구에서 폐종(閉種)해도 될 경지다. 

 

▲ 에피쿠로스(B.C.341~B.C.270)는 ‘죽음이란 인체를 구성하는 원자의 산일(散逸)이며, 죽음과 동시에 모든 인식도 소멸한다’라는 영혼소멸론을 주장했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註釋> 

1) 에피쿠로스의 무신론

1. 에피쿠로스(Epicurus BC 341~270)는 기원전 3세기경 그리스 사람으로 쾌락주의자요 無神論者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둘 다 틀렸다. 그의 쾌락은 아타락시아(ataraxia)요 그의 無神論理神論(deism)이었다.

2. 쾌락주의(hedonism)는 어느 하나의 신조가 아니라 쾌락(hedon, pleasure)이 인간 행위의 본래적 동기이며 삶의 목적이자 윤리적 기준이라는 생각을 가진 일련의 이론을 통칭하는 용어로 여기에 속한 사상들은 그 내용이 천차만별이다. 보통 이해하기로는 육체적 쾌락, 특히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주의로 보는데 이는 쾌락주의로 분류되는 일련의 사상 중 하나(Axiological hedonism)일 뿐이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이런 저질들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ataraxianism 정도로 고쳐 불러야 할 것이다.

3. 에피쿠로스는 괴로움이 없는 것을 쾌락이라고 정의하고 혼란, 고통, 근심, 걱정 등이 사라지고 죽음을 비롯한 일체의 공포에서 해방되는 영혼의 평정 상태를 ataraxia라고 부르며 이는 은둔과 질박한 식사, 미신타파와 우애(友愛)의 삶을 추구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에게는 이러한 ataraxia가 바로 쾌락이었다.

4. 그렇다면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토아학파의 아파테이아(apatheia)거친 음식을 먹고 팔베개를 베고 잘지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에 있다(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論語孔子님 말씀을 실천하는 主義였으니 곡굉이(曲肱而)주의로 번역함은 어떤가.

5. 또한 그는 우주가 무한하고 영원하며 모든 물질은 원자로 알려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원자론을 가르쳤으며 여기에 경험주의자(empiricist, 지식은 오직 감각적 경험에서 나온다는 이론)로서의 그의 입장이 더해져 죽음이란 인체를 구성하는 원자의 산일(散逸)이며, 죽음과 동시에 모든 인식도 소멸한다라는 영혼소멸론을 주장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그의 유명한 말이 둘 있다.

1) 우리가 있으면 죽음이 오지 않고 죽음이 오면 우리가 있지 않다(When we are, death is not come, and, when death is come, we are not).

2) Non fui, fui, non-sum, non-curo(n.f.f.n.s.n.c, I was not, I was, I am not, I do not care 나는 없었다. 나는 있었다. 나는 이제 없다. 나는 개의치 않는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 죽음의 공포는 아파테이아를 해칠 뿐이었다.

6. 그런데 에피쿠로스가 자기기만(自己欺瞞)에 가까운 이런 생각으로 누멘의 감동과 죽음의 공포를 어떻게 이겨냈는지 의문이다. 아타락시아의 삶을 산다면 (혹시 사후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의 주인인 신이 인격적이라면) 알아서 자비를 베푸시겠지 하는 파스칼(Pascal)적인 계산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7. 그런데 그는 무신론자가 아니었다. 에피쿠로스는 신은 존재하지만 인간사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또 신이 자연현상을 통제한다고 믿는 것은 신이 죄를 물어 인간을 처벌한다는 두려움을 가져와 아파테이아를 해칠 뿐이라고 하였다. 그는 신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영혼의 불멸을 부인한 것뿐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唯物論이 아니라 原子論을 주장하였고 無神이 아니라 有神을 말하였다.

8. 한편 그가 무신론자라는 주장은 그의 말로 알려진 다음의 에피쿠로스의 역설(Epicurean paradox)’과도 관련이 있다. “신은 악을 막을 의사가 있지만 할 수 없는가? 그렇다면 그는 무력하다. 신은 능력은 있지만 의지가 없는가? 그렇다면 신은 惡意的이다. 신은 능력과 의지가 모두 있는가? 그러면 악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Is he willing to prevent evil, but not able? then is he impotent. Is he able, but not willing? then is he malevolent. Is he both able and willing? whence then is evil?” 그의 이 말은 그러므로 신은 없다는 주장에 원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 말이 정말로 그의 말이었는지도 논란이 많고 누구의 말이었다 하더라도 이 paradox는 악()이 있을 때 성립하는 논리다. 악이 없다면 이 paradox는 또 다른 paradox일 뿐이다. 표준이론에서 악은 선의 결핍(缺乏)’이다. 따라서 그의 역설은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리된다. “신은 악을 막을 의사가 없다. 악이란 없기 때문이다. He is not willing to prevent evil, because there is no evil.”

 

2) 니가 몇 개?

 

이 어마어마한 우주가 그냥 있는 것이라니

그 오묘한 운행법칙과 조성원리가 그냥 생긴 것이라니

그걸 의식하는 존재는 뉴런 간의 전기현상이 만들어낸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니

그에게서 전기가 나간 후 의식이 끊어지면

그가 의식하던 우주도 트루먼 쇼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도 아무것이 아니거나 아무것이거나 아무 상관이 없다니

 

이게 도대체 무엇이라는 거니

니가 일곱 개라는 거니 열한 개라는 거니

 

3) 건물에 四層이 아예 없다. 死層이라는 것이다. 서구문물이 들어오더니 13층도 없어졌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짜라서 그렇단다. 13일의 금요일이라면 기겁을 한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면 십자가의 救贖에 오히려 감사하여야 할 애니버서리일텐데 말이다.

 

4) 1.5단계 이하 수준의 자아

 

5) 1. 과학적 허무주의라고 한다.

2. 사람들이 진화론에 열광하는 이유는 과학적 허무주의와 별 관계가 없고 오히려 3번이나 4번 케이스에 가깝다.

 

6) 1.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내기(wager)’는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모두 지옥에 간다는 기독교리를 전제로 하니 불합리한 진술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바꾸면 합리적인 진술이 된다. (사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착하게 살았는데 죽어 보니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잃을 것이 없고 반대로 신이 존재한다면 천국에 갈 가능성이 커지니 이득이다. 못되게 살았는데 죽어 보니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역시 잃을 것이 없는데 신이 존재한다면 천국 갈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계산상 착하게 사는 게 훨씬 이득이다.”

2.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가지면 죽음의 공포가 사라질까? 이는 신이란 없다 하고 악하게 살다가 죽었더니 신이 있으면 바로 지옥간다라고 겁주어 착하게 살라는 경구일 뿐이다. 그러나 이 말이 저 똑똑하다는 파스칼이 신을 확인하고 한 말일 테니 신도 있고 영혼도 있나 보다라고 느껴져 믿음이 간다면 신보다 파스칼을 믿는 꼴이 되니 자존심이 좀 상하지 않을까?

 

7) 혼을 타인에게 장악 당하면 공포심의 주체가 없어지니 죽음이 두렵지 않다.

 

8) 방어기제로서 윤회론

 

1. 윤회론은 죽음에 대항하는 여러 방어기제 중 가장 효과 있는 기제다. 로마황제가 윤회론자들인 영지주의를 박해한 이유 중 하나다. 황제가 보기에 죽음에 대한 가장 훌륭한 방어기제이자 황제 보기를 개 보기로 하는 윤회론은 죽음보다 두려운 것이었다.

2. 윤회론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방어기제로만 사용되면 좋은데, 악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문제다. ‘이번 생은 어차피 망치고 잡쳤으니 다음 생에서나 잘해 보자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人身難得을 헤치고 전쟁 피하고 질병 피하고 굶주림 피해 모처럼 좋은 시절을 타고났는데 이를 포기한다면 더 좋은 기회가 주어지겠는가. 몸을 다시 받더라도 업을 되갚는 (苦生)이 될 것이 분명하다.

3. 成佛하소서

 

스님

성불하세요

치킨에 맥주 한잔 같이 하고

비루집을 나서며 불편한 말을 기어코 건넸더니

스님은 대뜸

다음 에 하겠습니다

하시더라

새삼스럽지도 않은 듯

매우 자연스럽게

게다가 매력 있게 살짝 웃으면서

그 높은 자리 스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더라

法文처럼 들리더라

 

9) 죽음다운 죽음이 없는 세상

 

1. 오늘날 늙은 부모의 상을 당하여 그 죽음에 애를 절절해 한다는 자식이 있다면 이는 뉴스감이 아닐까? 정승집 개의 初喪이 정승의 초상보다 절절하다.

 

2. 喪家有感

 

있는 돈 없는 재산 다 내주고

죽지 못해 이어 온 하루하루 눈칫밥도

병수발에 지친 척하는 처자식 말년 구박도

다 뒤로하고

병마와 사투하던 침대를 비우자마자

장의사는 노래하고 요양원은 새 손님을 맞았더라

 

누구보다도 내 편이던 賢母良妻

뼈 빠지게 공부시켰더니 이제 제 일로 바쁜 자식들

같은 피, 닮은 코, 째진 눈의 형제들

함께 아프고 같이 늙자던 말로만 친구들

날밤을 같이하며 미운 정 쌓아 온 직장동료들

모두 모여 왁자지껄 밤새워 놀고 있더라

 

누구누구는

슬프지 않은 상주에게 슬픔을 잊자며

위로인지 축하인지를 건넨 후

육개장 안주에 과일 늘어놓고

습관인가? 건배까지 외치고 있더라

둥근 달도 새로 뜨고 밝은 해도 또다시 붕긋 솟았더라

(추신)

 

亡人도 바빴는가

상주의 위세 담은

수백 송이 조화에 묻혀

이십 년은 젊어진 얼굴에 검은 천 조각 두른 채

절 두 번 받더니

애지중지 보살피던 미련덩이 몸뚱어리

화장하든 매장하든 내팽개치고

새로운 생을 찾아

어디론가 벌써 떠나버렸다

 

10) 자살(自殺)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세계적이다. 그러니 경제적인 부와 자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거나 오히려 역의 관계가 있는 셈이다. 표준이론의 입장에서 자살의 원인을 살펴보고 그 대책을 세워보자.

1. 자살은 죽음의 의도와 동기를 가지고 자신에게 손상을 입혀 죽음을 초래하는 행위. 자살의 원인이 인생의 고통을 기피하려는 혼의 의지박약한 태도 때문이라기 보다는 우울증 등 정신체가 가진 질병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자살자의 약 60% 이상이 우울증에 기인한다는 연구도 있다. 자살충동을 일으키는 우울증 등의 병을 통칭하여 자살충동증이라고 하자.

2. 표준이론은 사람의 혼은 생기체와 정신체와 양심체로 구성된다고 주장하며 자아 수준이 낮을수록 정신체가 혼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또 자살충동증이 생기는 것은 정신체가 병에 걸렸다는 증거라고 한다. 많은 경우 자살은 自殺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자살을 죄악시하는 교리(敎理)가 있다면 그 자체로서 죄악이다. 병들어 고통받다가 죽은 사람을 저주하는 짓이 죄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자살을 하는 사람에게 아무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병에 걸렸으면 병원도 다니고 운동도 하여 치료를 하여야지 병에 굴복하여 스스로 목숨을 내어준다면 자신에게나 가족에게나 사회에게나 지극히 무책임한 태도다. 자살은 대부분 종혼이 주혼을 죽이는 행위다. 따라서 자살충동증이 있다면, 단기적으로는 몸은 약으로 마음은 명상과 기도로 평정심을 찾아 종혼을 진정시키고, 장기적으로는 체계적인 수행으로 인신난득(人身難得)의 이치를 깨닫고 나아가 자아수준을 고양(高揚)함으로써 종혼을 극복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자살충동은 기회일 수 있다. 그 극복이 어려운 만큼 이를 극복함으로써 금생에 자아수준을 그만큼 높이 상승시킬 수 있다. 기회를 놓치면 다음 생에 같은 숙제를 다시 받기 십상이니 자살하여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라면 금생에 넘어라. 여러 종교의 교리에서 자살을 죄악시하는 진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므로 종교는 나서서 이를 치료하여야 마땅하거늘 도리어 병으로 죽은 환자를 지옥으로 보내어 저주하고 그 유가족에게마저 상처를 주는 교리를 세운다면 종교로서의 본연의 의무를 회피하는 짓이다.

3. 표준이론에서 우울증은 주혼(主魂)과 종혼(從魂)들 간의 불화와, 혼이 군혼(群魂)시절에 익혔던 혼들 간의 의존과 교류의 단절로 인한 고독(孤獨)이 그 큰 원인이다. 우울증의 원인은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혼의 정신체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정신체에 근원한 우울증은 생기체의 신호 전달시스템의 기능저하를 초래하고 이는 육체에 행복호르몬(Serotonin) 등 여러 신경전달물질의 부조화로 나타난다. 이후 몸과 마음은 교호작용(交互作用)으로 자살충동증의 증세를 더욱 악화시켜 자살로 이어진다. 따라서 자살충동증은 몸과 마음 양쪽에서 그 치료를 시도하여야 한다. 몸에 대한 대증요법만으로는 우울증을 일시적으로 완화시킬 뿐이다. 근치를 위해서는 기도(祈禱), 기공(氣功) 등을 통한 외부로부터의 선기(善氣)보충,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명상과 수행을 통한 정신체의 성장 즉 자아수준의 고양을 꾀하여야만 한다.

4. 우울증 등 정신병이 家系적 요인이 크다고 하는 이유는 이러한 병이 부모로부터 받은 선천지기인 원기(元氣)와 그 이후 성장과정에서 부모가 조성한 후천지기로서 사기(邪氣)에 기인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아동기에 겪은 상실(喪失)이나 학대의 경험이 자살의 위험을 증가시키는 많은 사례들을 보라. 따라서 태교(胎敎)와 건전한 유년기 가정환경의 조성이 자살방지를 위한 근본적 치료방법 중 하나다. 가계에 유전적 요인이 있다고 생각되면 이는 업()일 가능성이 크다. 자신의 병을 극복하고 나아가 자기 家系의 업을 풀어(解業) 그 유전의 맥을 끊는 것은 그가 금생에 타고난 숙제다.

5. 여성보다 남성의 자살율이 높은 이유는 남성의 경우 혼들 간의 의존과 교류의 단절로 인한 충격이 여성보다 크기 때문이다. 집단생활에 길들여진 남성들이 독신, 별거, 이혼, 사별 등 배우자와의 이별이나 중년 이후의 사회적 고립을 더 힘들어 한다. 따라서 최근 우리나라의 이혼률의 증가와 조기은퇴는 자살률의 증가와 관련이 있다.

6. 또한 급격한 평균수명 증가도 자살률을 높인다. 노년의 자살률이 높은 이유는 건강악화로 인한 육체적 고통이다. 건강하지 못한 성인의 자살충동이 건강한 사람보다 10.6%나 더 높다(통계청, 1987~2018년 사망원인통계). 또 당장의 경제활동이 중요한 한국 중년들이 처한 생활환경도 높은 자살률의 한 원인이 된다. 돈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고 또 그로 인해 건강을 잃어 몸이 고통스러우면 여생을 전면 포기하는 자살로 이어진다.

7. 이런 자살문화를 정책수준의 마음공부 캠페인으로 극복하는 것도 유효한 방법이다. 단체명상모임의 결성과 그 활성화를 지원하고 노인들의 상호교류를 확대하며 사랑과 관심을 주변에 베풀어 줄 수 있는 건강한 사람들을 제도적으로 양성하는 것이 어떤가.

8. 우리나라의 높은 자살률의 또 다른 이유는 가족문화의 급진적 변화와 소득격차의 심화일 수도 있다. 젊은 사람은 결혼을 하지 않거나 자식을 낳지 않아 자식에 대한 책임이 적어 가족을 팽개치고 무책임하게 자살하고 노인들은 반대로 가난한 자식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자살을 선택한다.

9. 결론적으로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는 공부와 명상 그리고 수행을 통하여 인신난득(人身難得)의 윤회의 이치와 화엄세계의 엄연한 질서를 깨닫고 나아가 자아수준을 고양(高揚)함이 중요하고 종교와 사회적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교리적, 정책적 차원의 반자살 대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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