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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철학, 그리고 일상 삶에서의 ‘두려운 죽음의 防禦機制’

신민형 | 기사입력 2023/11/07 [11:50]
瞬間이 永遠‧無限이고 영원‧무한도 순간이다

종교와 철학, 그리고 일상 삶에서의 ‘두려운 죽음의 防禦機制’

瞬間이 永遠‧無限이고 영원‧무한도 순간이다

신민형 | 입력 : 2023/11/07 [11:50]

하늘소풍길 단상

 

좌우 시력 0.6으로 생활하는데 전혀 지장 없고 안경이 필요없다던 내가 돋보기를 끼고 책을 읽은 후부터 피로감이 없어졌을 뿐 아니라 광명을 찾았다. 그러다보니 골절상으로 박아놓은 발목 철심을 제거할 생각도 하게 된다. 철심을 빼내면 눈의 광명 같은 신체의 경쾌함도 느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생긴 것이다.

 

늙어가면 다 그러려니 다소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사는 게 나이에 걸맞는 미덕이란 생각을 했었다. 눈과 다리 등 각종 신체의 노화 과정뿐 아니라 일상적 삶에서도 모든 희노애락을 초연한 듯 생활하는게 철들고 성숙해지는 모습이라 여겼다. 많아야 백년 사는 삶에서 언젠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삶에서 재물과 명예의 즐거움이나 생노병사의 고통은 한 순간 지나치는 과정이라 치부하면 될 일이었다. 세상사에 부대끼며 살아야 할 젊은 시절을 까마득한 전생으로 여기며 생활하는 날이 많아졌다.

 

생이 죽음에 가까워지며 죽음에 대한 방어기제로 나름대로 정립한 생각이다. 실상 역사 이래 종교와 사상은 유한한 삶,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형성된 방어기제라 할 수 있겠다.

 

2천여년 유지해온 기독교의 믿음은 방어기제로서 훌륭한 것이었다 중세에 이르기까지의 서양철학과 사상도 이러한 신앙을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했다.

 

근대에 들어서 종교를 벗어난 철학-실존주의, 허무주의 등으로 실체와 본질에 마주했지만 결국은 그 안에서 허무를 극복하려 노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 사상 같이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는 철학도 역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작업으로 두려운 죽음에 대한 방어기제라 볼 수 있겠다. 불교를 비롯해 여러 동서양 사상에서 드러나는 윤회설도 어쩌면 유한한 삶과 두려운 죽음을 극복하려고 고안해낸 것일지도 모른다.

 

특정 종교나 사상에 매료되어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맹신과 광신이 점차 사라지는 가운데 거론되는 방어기제 또한 새로울 것이 없다. 이미 인간사회에서 끈질기게 내려온 것들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죽음이란 인체를 구성하는 원자의 흩어짐이며, 죽음과 동시에 모든 인식도 소멸한다라는 영혼소멸론을 주장하며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우리의 오래된 속담도 죽음을 외면함으로써 방어기제 역할을 했다. 공자의 부지생언지사(不知生焉知死)란 말씀 역시 생활에 충실하고 누구도 알 수 없는 죽음 세계는 신경쓰지 말라는 일종의 방어기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심지어 종교 철학과 대치된 현대의 과학 철학도 나름의 삶의 의미를 추구하며 죽음을 극복하려 발버둥치지 않는가. 인간과 우주의 본질이 그저 원자로 이루어졌고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를 표방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삶의 의미를 찾음으로서 삶과 죽음에 대한 위안을 얻으려 한다.

 

140억년 우주 역사와 여전히 팽창하고 있는 우주 세계와 시간은 상상하기에도 질릴만큼 무한하고 영원하다. 불과 수백만년, 수만년에 그치는 인간 역사에 비교할 수가 없다.

 

인도철학의 우주론에 따르면 창조신인 브라흐마의 하루인 1칼파(Kalpa)는 인간의 시간으로는 432천만 년이다. 칼파의 음사어(音寫語)()’이다. ‘은 하늘과 땅이 한 번 개벽한 때에서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를 뜻하며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는 사방과 상하로 1유순(由旬-15 km로 황소수레의 하룻길 40리에 해당하는 거리)의 철성(鐵城) 안에 겨자씨(개자, 芥子)를 가득 채우고 100년마다 겨자씨 한 알씩을 꺼내는데 이를 다 꺼내도 끝나지 않을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반면 우리가 순간이란 일컫는 것도 무한, 영원한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찰나는 하루를 648만 찰나로 본다. 눈 깜짝할 사이의 10분의 1도 안 되는 0.013초 정도라는 것이다.

 

현대과학의 시간 분석은 더욱 아득하다. 올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피에르 아고스티니(미국) 페렌츠 크라우스(독일) 안 륄리에(스웨덴) 교수는 찰나보다 더 짧은 시간 개념을 내세운다. 이들은 빛이 물 분자의 지름(0.3나노미터)을 지나는 데 걸리는 시간을 100경분의 1초라고 한다, 아토는 덴마크어로 18을 뜻하는데, 100경이 1018승이어서 그런 용어를 썼다고 한다. 너무나 무한한 수치여서 인식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팽창하는 우주가 무한·영원하듯 찰나와 아토초의 순간도 무한·영원한 셈이다. 

 

▲ 140억년 우주도 영원. 무한하지만 찰나와 아토초의 순간도 영원. 무한하다.NASA

 

호수공원을 날마다 산책하며 산책할 날들을 계산해 본다. 백년을 산책한다 해도 36500날이다. 우주와 인간역사, 겁과 칼파, 찰나와 아토초에 비하면 손가락으로도 가늠할 듯한 숫자다. 그런가운데 백년의 삶의 의미를 생각하고 두려운 죽음에 대한 방어기제를 떠올린다는게 참으로 가소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동서고금 종교인과 철학자를 비롯 많은 인류들이 그랬듯, 내 나름대로의 확신을 갖고 싶다. 그게 인간의 또 다른 본능인 듯 싶다. , 내 나름의 확신을 갖되 여타의 방어기제도 인정하려고 한다. 어차피 不知生焉知死이지만 내가 맹신, 광신이라 여기는 누군가의 확신이 들어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각자 자신의 확신이 절대적으로 여기고 나 역시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정신과 의사로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이자 임종연구의 권위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어느 누구나 죽음을 앞두고 5단계의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부정(Denial), 분노(Anger), 타협(Bargaining), 우울(Depression)의 단계를 거쳐 마지막에는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수용(Acceptance)한다는 것으로 임종에 대한 정설처럼 굳어졌다, 그러나 나름의 확신에 따라 바로 수용하거나 앞의 몇 단계 중 어느정도를 생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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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교호수의 낮과밤. 인생 백년에 3만6500번이 반복되지만 우주와 인간역사, 겁과 칼파, 찰나와 아토초에 비하면 손가락으로도 가늠할 듯한 숫자다. 그러나 그 호수를 산책하는 순간에 영원과 무한을 떠올리고 몇천겁을 살면서 이룰 수 있는 깨달음도 잠시 얻을 수 있으니 얼마나 경이롭고 즐거운 삶인가. 죽음의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순간이자 영원이다.  © CRS NEWS

 

10km에 지나지 않는 광교호수공원이지만 날마다 새롭게 다가온다. 낮과 밤과 계절 따라, 기후와 마음 상태에 따라 변화무쌍하다. 공원체육센터가 휴관하면 로비에 있는 에디야커피솝 대신 푸른도서관 카페로 가고, 이곳도 휴관하면 호수 앞 전망좋은 카페에서 책을 읽는다. 변화가 주는 재미가 무궁무진하다.

 

찰나와 아토초와는 비교도 안되게 기나긴 산책과 독서, 명상 시간에 무한과 영원의 우주와 순간들도 무한정 상상할 수 있다. 그런 삶이 만족스럽고 경이로워진다.

 

이제는 나이에 걸맞게 구도자로서의 마음과 자세를 정리하려 노력한다. 아직도 꿈에서 나타나는 젊은 시절 치열하고 고난한 삶에 대한 악몽을 차분하게 추스려 보는 시간도 갖는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면 악몽과 같은 생활과 처지를 반복할거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삶의 자세와 의미를 정립하려고 한다.

 

죽도록 사랑한 삶을 가질 수 있다면 그말처럼 죽음도 흔쾌히 받아들이자

이제 타인의 평가나 평판을 의식하지 말고 내가 나만을 평가할 수 있도록 살자

가면 가는가 보다, 아프면 아픈가 보다, 죽으면 죽는가 보다, 하자

죽음이 바로 닥친다 해도 역사 속 인간과 타인의 죽음 바라보듯 하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

 

이런한 다짐으로깨달음과 도를 이루는 것에 삶의 의미를 부여하며 죽음에 대한 방어기제를 쌓는 과정이다. 그러나 몇천 겁을 거쳐도 이를 수 없는 깨달음과 도를 불과 1백년의 순간에 어찌 이를 수 있겠는가. 단지 산책하는 시간 속에서 깨달음의 순간을 만끽하며 영원과 무한을 느끼면 그게 삶과 죽음의 성취라고 생각하자. 

 

또한 그렇게 삶과 죽음의 성취를 지향하면서도 새 안경을 써보고, 다리의 철심도 제거하는 생활도 해보자. 내가 나만을 평가하는 것에 만족하는 외통수가 되지말고 주변의 평가도 의식하며 어울리며 살자. 살아있는 한 세속적인 즐거움에 슬금슬금 한눈 팔기도 하며 삶을 누려보자. 그것은 완전한 도를 이룬 죽음과 해탈의 경지에서는 맛볼 수 없는 삶이 아니겠는가. 그래야 죽음도 평안하고 만족스럽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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