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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릉에서 발견했다는 '원효결서'의 정체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6/03/17 [15:07]
“박정희로 하여금 정도령으로 착각, 유신을 단행하게 된 결정적 계기?”

문무대왕릉에서 발견했다는 '원효결서'의 정체

“박정희로 하여금 정도령으로 착각, 유신을 단행하게 된 결정적 계기?”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6/03/17 [15:07]
정확치 않은 예언서‧ 易書를 펴낸 인물로
원효가 인식되는 것에 대한 책임 면키 어려울 것
 
감은사와 대왕암, 그리고 이견대가 있는 경상북도 월성군 양북면의 동해안 지역은 옛부터 동해구로 불리었다. 신라의 호국이념이 깃들은 성지일 뿐 아니라 만파식적의 현장이다.
 
감은사에서 동쪽에 위치한 대본 해수욕장 앞 동해바다에 떠있는 대왕암은 신라 30대 문무왕의 해중능 또는 산골처(유골을 뿌려놓은 곳)로 알려져 있다. 특히 감은사는 호국사찰이며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부왕(문무왕)의 위업을 잇기 위해 세운 절이다. 그동안 전설과 삼국유사에 기록으로만 전해져오던 그 실체는 1967년 신라오악조사단(한국일보사 주관)이 동악인 토암산과 동해구 유적조사를 하던 중 바닷속에 능침(능의 자리)를 발견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 ‘원효결서’가 발견됐다는 문무대왕 수중릉과 원효대사(아래 사진)     ©

수증능의 주인공인 문무왕은 재위 21년(681년)에 당 고종32년에 붕어했다. 대왕은 평소 지의법사에게 사후를 당부했다.
 
"나는 세간의 영화를 싫어한지 오래다. 죽은 후에는 나라를 지키는 용이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다"
 
지의법사가 물었다.
 
"용이라면 축생의 과보(果報)인데 어찌하시렵니까?"
 
그러자 문무왕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내가 인간세상의 영화를 싫어해온지 오래되었소! 만약 좋잖은 과보로 축생이 된다면 그것은 나의 소망에 본디 합일되는 일이오."
 
이 능이 세간에 주목을 끌은 것은 「KBS 역사스페셜」팀에 의해서다.
 
2001년 3월27일 오전 10시 대왕암에 대한 본격적인 탐사. 3월 28일, 물에 잠긴 부분의 수중탐사에 들어갔다.…… 3월31일. 경주문화재 연구소의 도움을 받아 대왕암의 물을 퍼내보기로 했다.

대왕암의 신비가 서서히 우리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가슴 뜨거운 기대의 순간이 이렇게 기술되고 있다. 1300여 년간 바닷물속에 잠겨 있던 문무대왕릉은 세계 최초의 수중릉이라는 이 능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학계)는 많은 이설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원효결서 1. 2>> 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원효성사께서 직접 지었다고 주장되는 이 책을 처음 번역한 미조 김중태씨는 자신의 손에 들어오기까지 과정에 대해
 
"1989년 기사(己巳)년의 여름.... 예천에 사는 저자의 고등학교 친구인 동창생 황병호씨의 소개로 윤태첨(尹泰瞻)이란 노인을 만나 얻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박정희로 하여금 정도령으로 착각, 유신을 단행하게 된 결정적 계기?”
 
그리고 윤태첨씨 손에 들어가게 된 경위에 대해 67년 5월경 대통령 박정희 초도 순시라는 명목으로 공화당후보 당선을 위한 선거지원도 할 겸 경주시를 방문할 당시 경북지사 김인(金仁) 경주시장 박수대(朴秀大) 등 지역 유력 인사와 만찬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경주를 문화관광도시로 조성하기 위해 세계 유일의 수중릉 개봉과 그곳의 정체를 알고 싶어 하던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과 조건반사적 충성심이 무모한 사업의 시작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추풍령 휴게소(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동시에 추풍령 휴게소가 영업을 시작했으니 박 대통령은 개장도 하기 전 이 곳에서 문무왕릉 개봉을 지시했다는 말이 된다.)에서 두 사람(박수대 경주시장, 한달조 경주시 기획실장. 편집자 주)을 불러놓고 간밤에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말이다. 문무대왕릉을 귀신도 모르게 한번 열어보도록 해요! 집안 식구에게도, 친구에게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시오! 경주 김씨 문중은 말할 것도 없고 중앙정보부에게도 절대 눈치채게 해서는 안되오. 비밀이 새나가면 임자 등 목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오늘부터 은밀하게 계획을 세워 당장 실행하도록 하시오."
 
이 지시를 받은 한달조는 67년 7월 초순 어느 깊은 밤, 기중기가 설치된 배를 문무대왕암으로 조심조심하며 조용히 접근하게 되었다.
 
"대왕암 외곽으로 접근한 배가 기중기로 상석을 들어 올리는 순간 산소호흡기를 부착하고 잠수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한달조는 재빨리 석관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KBS 역사스페셜 팀은 양수기를 이용 대왕암 안에 차있는 물을 퍼내는 방식을 통해 접근했다.
 
"능이 들어난 이후 전자탐사기를 이용 그 파형을 통해 대왕암 중앙의 거대한 바위 밑엔 아무 것도 뭍혀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묻을 수도 없는 구조였다. 일반적으로 능은 시신이나 유골을 지하에 묻은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위에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들거나 더 고대에는 거대한 돌을 덮었다. 그런데 기대했던 것과 달리 이 거대한 바위 아래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상식으로 대왕암을 능이라고 할 수 없다"
 
지하 암반의 절리(節理)가 수직으로 발달되어 있는 반면 거북 등 바위의 절리는 수평이었다. 또한 이곳은 "문무왕이 묻힌 곳이 아니라 문무왕릉비에 새겨진 '분골경진(粉骨鯨津)'이란 글귀는 화장한 뼛가루를 경진(鯨津), 즉 고래가 사는 깊은 바다에 뿌렸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화장한 다음 대왕암에서 그 유골을 뿌린 것이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원효결서>>에서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그 속에는 문무왕의 어체가 없는 것은 물론 아무런 부장품도 발견할 수 없었으며 석관 주변의 안팎으로 십자모양의 바닷물만 넘실거릴 뿐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달조는 잠수복을 입고 석관 속으로 들어갔다고 묘사하고 있다.
 
"석관을 자세히 살펴보니 바위틈에 책상서랍 모양의 손잡이 5개가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었다. 두려운 마음과 떨리는 손으로 그중 1개의 손잡이를 당겨보니 거짓말처럼 힘 하나 안들이고 쑥 빠져 나오는데 반듯한 흰 돌판 위에 글씨가 새겨있는 것이 보여서 준비한 카메라로 그것을 촬영한 후 원위치에 꽂아 넣었다."
 
성인남자가 들어가 볼 정도의 석실이라면 상당한 크기의 공간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참고로 전국 장의사회가 소개하는 관의 크기는
* 향고급 길이 1960mm 폭 600mm 높이 440mm 두께 44mm
* 향 평 길이 1960mm 폭 505mm 높이 38mm
* 향 3단 길이 1960mm 폭 570mm 높이 440mm 두께 44mm이다.
 
이것이 역사적인 예언서 <<원효결서>>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 밖으로 나오게된 이 책은
 
"67년 어느 날 한달조가 문무대왕암에서 촬영한 원효결서를 그대로 옮겨 적은 문서를 윤태첨 노인에게 내어놓으며 그 해석을 부탁하였다고....필자(김중태 편집자 주)가 윤노인으로부터 원효결서는 제목을 합쳐 총 467자 가운데 16자가 빠진 451자로 되어 있는데, 사실 16자가 빠지게 된 것은 한달조가 그대로 대통령에게 보고하다가는 자기 목이 달아난다며 고의로 16자를 지워버렸다.
 
이 책의 발견이 인정되었는지 한달조는 1979년 9월15일 박정희 명으로 '녹조 근정훈장'을 받았다고 사족을 달고 있다.
 
원효학 연구원이 제공하는 인터넷 검색 결과 원효스님의 저술목록에도 <<원효결서>>라는 제목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고 <<불교사전>> 원효편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원효성사 저술유무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이런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원효결서에 관계된 역사기록은 아무 데도 없고 흥덕왕 편에도 역시 없다. 또 있을래도 있을 수도 없다. 이 모두가 민족과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 때가 이르기까지 계획적으로 거짓말을 해온 원효대사와 문무대왕의 엄청난 권사(權辭)가 작용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필자인 미조 김중태 뿐"이라며 책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 자체를 막고 있다. 민족의 최대 예언서라고 주장하고 있는 김중태씨는 박정희가 단행한 유신체제 역시 이 책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원효결서가 그(박정희 편집자 주)로 하여금 유신을 단행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확신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바로 자신을 가리키는 '남어난박(南於亂朴)'이라는 글자를 보고 박정희는 대단히 흥분하였고 자신을 신이 점지한 사람으로 확신하기에 이르렀으며 과대망상증이 지나쳐 자신을 몇 천년 전부터 이 땅, 이 백성들이 애타게 기다려오던 정도령으로 착각했다."
 
고 밝히고 있다. 원효가 기술한 시기와 내용에 대해
 
"원효대사가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남기신 글로써 미래의 우리 민족과 세계의 운명을 기록한 예언서(豫言書)이며 결(訣)자는 말씀 언(言)변에 쾌를 더한 합성어로서 이미 결정되어진 운명을 뜻하는 것이라고“
 
이 책을 처음으로 김씨에게 전해주었다는 윤태첨 노인의 말을 빌려 기술하고 있다.
 
"神의 文辛인 원효결서를 받았다는 의미에서 神文王이라고 이름 붙여진 신라31대 신문왕으로부터 146년이 걸려 완성된 東海水口 앞바다 문무대왕암에서 우리 민족과 세계의 운명을 기록한 聖 元曉의 天書가 奉安되던 해인 흥덕왕 2년 서기 827년으로부터 19번째 丁未년이 되는 1967년 丁未년 7월 이 세상으로 나왔다(十九丁未始有世播), 우리나라(나는 土, 라는 水의 뜻)의 지형 모습은 天牛의 거룩한 형상을 닮은 신수(神獸)의 외뿔(孤角)인데 이 고각의 땅이 38선으로 잘라지면(孤角分土 三入中分) 1960년(庚子)과 1961년(辛酉) 사이에 남쪽에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亂을 일으키고(庚子辛酉南於亂朴) 박정희가 죽은 후(紫微極熙) 등장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金冠三世)의 기구한 운명까지도 원효성사께서 1300년 전에 이미 다 헤아리고 계셨다니!.... 우리나라 예언서의 총결정판이다."
 
고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지만 이 책의 최대모순은 해방 이후 남북이란 두 개의 이념이 다른 2국 체제 가운데 북한에 대한 기술이 빠졌다는 점이다. 다만
 
"산하(山河)가 황폐화되어 식량난으로 다 망해가고 있는 오늘날의 북한의 현실과 마지막 운수를 한인 하느님이 미리 예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언급을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다같은 한인 하느님의 직계자손인 북한의 좋지 못한 상태와 앞으로 운명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 현실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도 문제지만 그 정권을 지탱하고 있는 체제에 관한 언급이 없음도 문제점이라 지적할 수밖에 없다. 아울러 남한에 대한 기술부분도 이 책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모순이다.
 
"금관삼세 바로 다음에 나오는 글귀는 천기귀인(天氣歸人) 유재일월(有哉日月) 진인어세(眞人御世)로서 진인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개벽까지는 현실적으로 3년 이상이나 남았고 1997년 12월 대통령선거는 다가오는데 다음 번에 과연 어떤 정부가 들어서며 어떤 인물이 집권하게 될까. 이 점에 관하여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
 
"경상도 출신인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의 세 사람을 끝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사라지고 새롭게 태어난 나라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인물로는 이승만, 김일성(金木上昇), 박정희(南於亂朴),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金冠三世) 밖에 없으므로 각 정당 및 무소속의 후보자들은 하느님의 각본에 없는 인물이다."
 
결론부터 말해 이 책은 윤태첨, 한달조, 김중태 3인 가운데 누군가 한 사람은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런 예언서들이 특정집단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악용된다면 자칫 우리 사회에 매우 심각한 폐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폐해는 단시일 내 치유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예언서>는 과거의 일과 함께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주어야 할 것이다. <<원효결서>>는 미래를 속시원하게 풀어 주었다기 보다 미완으로 남겨놓고 있다. 이 점에 대해 김중태씨 말을 빌리면 문무왕 석실에 아직 해독하지 못한 꺼내보지 못한 4권의 책 속에 그 해답이 있다고 하지만 전자에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석실은 존재하지 않고 할 수 없는 구조였으므로 이 점에 대해 새로운 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역사를 가르치는 목적은 어떠한 난관에도 굴복하지 않고, 어떠한 역경에도 좌절하지 않으면서, 어려운 시대를 개척해 나갔던 선인(先人)들의 꿋꿋한 기상을 배워 미래를 맡은 청소년들에게 무한한 희망과 자부심을 키워주는데 있다."
 
미조 김중태씨가 한 말이다. 역사에 대한 올바른 정의라 생각한다. 그러나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원효결서1. 2>>로 인해 원효스님에 관련된 정확치 않은 예언서, 易書 정도를 펴낸 인물로 인식되는 것에 대한 책임은 면키 어려울 것이다.
 
비결서의 저자들을 보면 대부분 역사 속 유명인물인 경우가 많다. 실제로 그들은 저런 내용의 비결서를 썼을까 하는 의문에 백승종 교수는 "도선이나 남사고·서경덕 등은 풍수나 점복에 조예가 깊은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살았던 연대와 책이 나타나는 시기 등을 볼 때 직접 저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후대의 저술가들이 차명(借名)을 통해 권위를 빌린 것이라는 설명이다. (삼국유사문화원장·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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