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독립운동과 분할, 종교적 이유 때문에
인도독립운동과 분할, 종교적 이유 때문에
인도 독립운동은 영국이 영국(브리티시)인도를 선언하고 통치하는 순간부터 시작됐고, 특히 무슬림들이 적극적이었다. 1905년 영국인도 정부의 벵골 분할령이 발표되자 이에 대한 반대가 커졌고, 독립운동은 격렬해졌다. 영국인도 정부는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1885년에 창립됐던 정치단체 인도국민회의는 인도독립운동 단체로 급선회 했고, 힌두-무슬림 지도자와 단체가 적극 가담했다. 1920년대 이후에는 마하트마 간디 옹도 인도국민회의파를 통해서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다.
무슬림 지도자들서는 아불 칼람 아자드를 비롯해서 인도 이슬람 대학의 마흐무드 알 하산 교수 등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힌두 지도자들보다는 무슬림 지도자들이 인도 독립운동에 더 적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인도독립운동은 초종교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결국은 종교적 갈등으로 인하여 인도가 분할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마하트마 간디 옹이나 힌두-무슬림 지도자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인도가 분할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국인도 정부는 1947년 인도 독립법에 근거하여 분할되고야 말았다. 그런데 이런 인도의 분할은 종교인구 통계가 그 근거가 되었다. 파키스탄 자치령과 인도 자치령으로 분할되었는데, 파키스탄 자치령은 파키스탄 이슬람공화국과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으로 나눠졌으며, 인도 자치령은 인도 공화국이 되었다.
영국인도는 영국의회의 ‘1947년 인도 독립법’에 의하여 독립과 동시에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할되었다. 분할의 직접적인 이유는 종교인구 통계가 그 근거로 작용했다. 한마디로 거대한 인도 아 대륙이 종교 때문에 분할된 것이다.
1947년 인도분할 이후, 이슬람교도의 3분의 2가 파키스탄 (동부와 서부 파키스탄)에 거주하게 됐고, 3분의 1은 인도에 거주하게 됐다. 1951년 인구 조사에 의하면 무슬림 720만 명이 인도에서 파키스탄령으로 옮겼고, 720만 명의 힌두교인이 인도로 옮겼으며 다수의 시크교도가 인도로 옮겨 왔다고 한다. 이동과정에서 50만 명의 희생자가 있었으며, 1200만 명이 집을 잃은 노숙자가 되었다는 연구가 있다.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인도의 독립 운동가이자 인도 이슬람교 정치인으로, 후에 파키스탄의 정치인이며 파키스탄의 초대 총독이 되었다. 파키스탄에서는 콰이드 에 아잠 (Quaid-e-Azam, 우르두어로 ‘위대한 지도자’) 및 바바 에 쾀 (Baba-e-Qaum, ‘국부’라는 의미) 이라고 불린다. 인도 독립운동 과정에서 인도 국민회의의 비폭력주의를 비판하였고, 인도 국민회의가 자치권 행사 및 지방의회 구성에서 이슬람 세력을 배제하자 이에 반발, 이슬람 국가 건설 운동에 동참했다. 1947년 7월 12일 파키스탄 독립과 동시에 영국령 파키스탄의 초대 총독이었고, 8월 12일 파키스탄의 독립과 동시에 초대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다른 무슬림지도자와는 다르게 그는 분할을 택했다.
인도의 분할은 인도 아 대륙에 큰 상처를 남겼다. 이런 종교적 이유의 분할은 벵골을 서 벵골과 동 벵골로 갈라놓았다. 이스트 벵골은 방글라데시가 되었고, 서 벵골은 인도의 일부가 되어서 같은 벵골어를 쓰는 벵골인들이 갈라지게 되었다. 사실, 이것은 1905년 영국 인도정부의 획책이기도 했다. 펀자브 주도 벵골과 유사한 경우가 되었는데, 웨스트 펀자브 (이후 파키스탄 펀자브와 이슬라마바드 수도 영토)와 이스트 펀자브 (이후 인도 펀자브와 하리아나와 히마찰프라데시)가 되었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저작권자 ⓒ CR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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