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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二·화쟁사상에 바탕한 한국禪… ‘세계유일’ 간화선 종주국
한국 불교의 중흥조…현대 曹溪宗史의 주역 경허 선사의 한국선 위치와 법맥
기사입력: 2019/09/16 [21:19]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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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의 중흥조현대 曹溪宗史의 주역 경허 선사의 한국선 위치와 법맥     

 

불교는 수행의 종교로, 존재의식을 자각하고, 삶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궁구하게 하며, 진정한 행복의 길(離苦得樂·이고득락)을 제시한다. 불조(佛祖)의 진리가 넘쳐나건만 우리는 왜 그렇게 번뇌의 구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한국불교는 선불교가 주류인데 이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이에 한국선의 흐름을 짚어보고 근현대 한국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선사에 관해 조명해본다

 

한국선의 역사적 분류는 9단계로 나눠  

 

한국선(韓國禪)의 역사적 분류는 대략 9단계로 나누어진다. 신라 말기 이전: 구산선문 이전 최초의 선사인 법랑과 정중종의 무상대사 나말여초(羅末麗初): 구산선문 및 여러 산문의 전개, 특히 마조계 선풍 도입 고려 초기: 위앙종·조동종·법안종의 전개와 교종의 발달 고려 중기: 보조 지눌의 간화선 전개 및 결사운동 고려 말기: 태고·나옹·백운을 중심으로 임제 간화선 도입 및 몽산의 선풍 전개 조선 초기: 척불과 통한의 불교계(무학·함허득통·벽송지엄) 조선 중기: 서산 휴정의 휴정계와 부휴 선수의 부휴계 선풍 전개 조선 말기의 선() 논쟁: 백파의 선문수경을 중심으로 130년간에 걸친 선법논쟁 구한말현대: 경허 및 경허계 문하·용성의 선풍(禪風) 전개이다.     

▲ 대한불교조계종은 종헌(宗憲)에서 종조(宗祖)는 혜능의 증법손 서당지장에게서 심인(心印)을 받은 도의국사로 명문화했다. 사진은 도의국사 진영.  

 

법맥 및 사자상승 재고

 

법맥(法脈)은 조선 중기이후부터 재고해 본다. 17세기 전반 무렵, 중기만 해도 청허 휴정(1520~1604)과 동문인 부휴 선수(1543~1615)의 계보가 나란히 번성했다. 휴정은 할아버지 벽송 지엄, 스승 부용 영관, 수계사 경성 일선의 행적을 다룬 삼로행적(三老行蹟)에서 법맥 계보를 표명했다.

 

이는 벽송 지엄(14641534)이 송대의 대혜 종고(1089~1163)와 원대의 임제종 고봉 원묘(1238~1295)를 계승했다고 밝힌 데서 유래한다. 그러다 사명대사와 친분이 깊은 1612(휴정과 사명 입적 후), 허균이 법통을 정리했다.

 

허균은 법안종·임제종·조동종의 선()계보, 고려의 보조 지눌에 이은 나옹 법통(평산처림과 지공의 법맥)을 주장했다. 그러다 허균이 역적죄로 죽음을 당한 이후 휴정의 만년 제자인 편양(1581~1644)이 다시 법통설을 주장했다.

 

고려 말 나옹이 아닌 태고 법통을 주장한 것이다. 곧 석옥청공-태고보우-환암혼수-구곡각운-벽계정심-벽송지엄-부용 영관-휴정이다. 근대의 경허선사도 이를 강조했으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20여 년 전부터 태고와 보조 법통 문제로 논쟁이 있었다.

 

현재 조계종 종법에 종조는 도의, 조계종 중천조 보조 지눌, 중흥조 태고 보우라고 명시돼 있다. 이는 당시 편양이 고위관료에게 부탁해 휴정의 비문과 문집에 명시한 것이다. 이 점은 당시 사회 상황과도 관련된다.

 

()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가 된데다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은 청나라를 거부하며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식이 팽배했는데, 당시 유학자들이 정통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불교도 임제태고 법통을 통해 승가의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조선 후기에 들어 서산 휴정의 휴정계와 부휴 선수의 부휴계, 양대 문파로 나뉜다.

 

휴정계는 편양파·사명파·소요파·정관파 등이 크게 발달했다. 편양파는 최대 문파로서 묘향산과 금강산 등 북방에서 활동했고, 사명파는 18세기 이후부터 저조해 문하가 드러나지 않는다. 소요파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정관파는 호남을 근거지로 문중이 발전했다.

 

한편, 부휴계는 청허계 못지않게 문중이 크게 번성했는데, 의승군으로 활동한 벽암 각성(15751660)이 화엄사, 쌍계사, 법주사 등지에서 활동했고, 이후 순천 송광사를 중심으로 본산을 삼았다

 

조계종이라는 宗名

 

조계종 종명(宗名)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역사에 몇 차례 등장했다. ‘조계(曹溪)’라는 명칭은 6조 혜능이 주석했던 곳의 명칭에 연원을 둔다. ‘조계는 신라말 887년에 세워진 쌍계사 진감국사비부터 등장하며, 고려 전기 승과에 조계업(曹溪業)’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러다 조계종 종명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1172(고려 명종 2)에 지어진 대감국사 탄연(사굴산문)의 비명이다. 이 비문의 고려국 조계종 굴산하 단속사 대감국사비(高麗國曹溪宗堀山下斷俗寺大鑑國師碑)’라는 구절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조계종풍을 크게 떨쳤다혹은 동국의 선문을 중흥하였다는 표현이 등장했다.

 

고려 초기~중기에는 화엄·유식·천태종 등 교종이 발전하면서 선종이 주춤했다. 원응국사 학일의 비문에 전하듯이 대각국사 의천이 1097년에 천태종을 개창하자, 선종 승려 70%가 개종했다. 이때, 구산선문 교단이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나마 담진(사굴산문)과 학일(가지산문)이 외부세력에 흔들림 없이 선종 승려로 남았다. 이때 구산선문에서 천태종과 확실하게 구분하며, 선종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조계종이라는 종명을 썼던 것으로 본다. 이렇게 쓰인 조계종 종명은 조선 초기에 이를 때까지 300여 년간 지속됐다.

 

정확한 전거는 알 수 없지만, 이후 조계종은 독자적인 종파의 하나로 유지됐다. 조선시대에 들어 태종 6(1406)에 선종 11개종에서 7종으로 통폐합될 때 조계종이 포함돼 있었다. 세종 때 국가에 의해 선교 두 종파로 통폐합되면서 조계종명칭은 사용되지 않았다. 이후 교종이니 선종이니 하는 것조차 사라진 무종파로 불교가 흘러왔다. 조계종 종명이 다시 등장한 것은 조선 역사 500년이 지나서다. 1941423일 일제의 사찰령 시행규칙이 개정되면서 1945년까지 조계종 종명을 다시 쓰게 됐다.

 

조계종 종명이 세 번째로 등장한 것은 1954년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정화 담화에 자극받은 불교계는 620일 조선불교 교헌(敎憲)을 개정해 종명을 조선불교에서 대한불교조계종으로 변경했다. 이런데도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비구·대처 간의 분규가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1962년 비구·대처의 통합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했다.

 

다시 비구와 대처간의 불협화음으로 난항을 겪던 중 1970년 대처 측이 한국불교태고종을 창종하면서 조계종은 청정 비구·비구니만의 교단이 됐다. 현 조계종은 1940년대 초대 종정(宗正)인 한암(1876~1951)스님으로 시작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국선의 정체성

 

대한불교조계종은 한국불교의 장자격이요, 대표 종단이다. 조계종의 수행법은 염불, 간경, 주력, 참선 등이다. 하지만 조계종은 선()을 근간으로 하며, 선풍은 임제선풍으로 전세계에서 유일한 간화선 종주국이다. 한국선의 정체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첫째, 우리나라는 오롯이 선()만을 지향한 선사들도 많지만, 선과 교()를 모두 인정하며 일치를 강조한다. 허응 보우(1509~1565)선과 교가 물과 얼음의 관계처럼 일체라고 보았다. 그런데 선사들은 전반적으로 선을 바탕에 두고, 교를 일치시켰다. 선주교종(禪主敎從통교귀선(通敎歸禪)적인 선교일치이다.

 

지눌은 보조비문에서 선에는육조단경대혜어록, 교에는 이통현의 화엄론금강경을 강조했다. 화엄과 선에 관한 융섭이나 일치점이 신라 말기를 비롯해 조선 후기에 이른다. 대표 인물이 보조 지눌·환성 지안·연담 유일·백파 긍선·설두 유형 등이다. 한편 고려 초기에 선이 쇠퇴하는 무렵, 대각국사 의천에 교선일치가 있지만 이 또한 천태교관과의 회통으로 선을 바탕에 두고 있다.

 

둘째, 수행법에 있어서는 삼문(三門)’을 지향한다. 물론 앞 선교일치의 한 일환이기도 하지만, 조선 중기부터 시작해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는 삼문일치가 강조됐다. 즉 염불문(淨土원돈문(경절문()이다. 허응 보우는 어리석은 중생은 자력이 어려우므로 아미타불을 염하면 극락으로 인도될 것이라는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 점은 지눌의 사상과 비슷하다.

 

벽송 지엄(1464~1534)조사선을 참구하고, 여러 교학을 공부하며, 여기에 정토왕생을 희구한다고 했고, 서산 휴정도 선가귀감에 염불문·원돈문·경절문으로 분류했다. 여기서 염불문은 유심정토와 서방정토가 합일되어 염불 그 자체로서 인정됐다. 현대의 고암스님은 염불에 있어 참선을 통해 삼매에 들든, 염불을 통해 삼매에 들든 차이가 없다고 하면서 염불도 그 자체로서 화두가 된다고 보았다.

 

셋째, 우리나라는 이론적으로 조사선(祖師禪)이지만, 수행방법상에 있어서는 간화선이다. 나말여초에 조사선이 전개되었고, 보조 지눌·진각 혜심의 주도로 간화선이 보급됐다. 고려 말기에는 태고 보우·나옹 혜근·백운 경한이 직접 송나라에 들어가 법을 받아와 간화선을 전개했고, 몽산 덕이(12311308)의 간화선 선풍이 유행했다. 이어 조선 중기 들어 서산 휴정과 편양 언기에 의해 간화선적인 흐름이 주류가 되어 근자에까지 이르고 있다.

 

넷째, 나말 여초10세기 고려 말까지 선교일치였다면, 조선으로 들어와서는 불교와 유교와의 일치이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함허 득통·청허 휴정 등이 유불도(儒佛道) 일치를 강조했다. 선교 일치는 불교계 입장에서 자발적인 사상 정립이라면, 유불도 일치는 외부 세력에 대한 견제의식과 불교의 정당성을 드러내기 위해 타의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어떤 사상이나 이념과 대립이 아닌 불이(不二화쟁사상을 바탕에 두고 있다.

 

한국 선불교 중흥조이며 현대 조계종사의 주역 경허 선사중이 수행하지 않고 죽으면 콧구멍 없는 소가 된다는 말끝에 법안열려 천만고(千萬古)의 영웅호걸 북망산의 무덤이요, 부귀문장 쓸데없다 황천객을 면할쏘냐? 오호라 나의 몸이 풀끝의 이슬이요, 바람 속의 등불이라.”

 

이는 경허선사 참선곡의 첫머리에 등장한다. 사찰 불교대학에서 선학(禪學)강의를 할 때면, 불자들과 참선곡을 함께 독송한다. 서산 휴정의 선시에도 만국의 도성은 개미집과 같고 천하의 수많은 호걸들도 하루살이 같도다라고 했다. ‘우리 삶에서 진정으로 가치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사유토록 해준다. 인간에게 재물과 명예가 아닌 무엇인가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하고 선종(禪宗)을 중흥시킨 대선사(大禪師)이자 서예가이다. 법명은 성우(惺牛), 법호는 경허(鏡虛), 성은 송씨(宋氏)이다. 속명은 동욱(東旭)이고,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부친은 송두옥(宋斗玉)이며, 모친은 밀양 박씨이다. 9세 때 과천의 청계사(淸溪寺)로 출가하여 계허(桂虛)에게 계를 받았다. 1862년 마을의 선비로부터 한학(漢學)을 배우기 시작하여 사서삼경과 기초적인 불교경론(佛敎經論)을 익혔다. 그 뒤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강백(萬化講伯) 밑에서 불교경론을 배웠으며, 9년 동안 불교의 일대시교(一代時敎) 뿐아니라 논어, 맹자, 시경, 서경등의 유서(儒書)와 노장(老莊) 등의 제자백가를 모두 섭렵했다

 

견줄 이 없는 위대한 선지식

 

19~20세기 중반, 중국의 선()을 개혁한 선사가 허운(虛雲, 1840~1959)이다. 대만이나 해외에 체류하는 중국 선사들이 대부분 허운의 법맥이다. 허운이 아니었다면, 현재 중국의 선은 존재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허운에 필적할 한국 선사로 경허선사를 든다. 경허가 없었다면, 현재 한국의 선이 제대로 존립했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수십여 년 전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기행(奇行)으로 인해 그에 대해 평가가 분분하지만, 근현대의 한국선을 개척한 선지식 측면에서 경허를 살펴본다.

 

경허 성우(鏡虛惺牛, 1849~1912)1849년 전북 전주 출생으로, 법호는 경허,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9세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경기도 과천 청계산으로 출가했다. 계허에게 득도해 5년을 보내고, 13세에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어 14세에 스승 계허가 경허를 동학사 만화 강백에게 소개해 경전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87223세에 경허는 동학사에서 강사가 되어 경전을 강의했다.

 

31세 되던 해, 속세로 돌아간 옛 은사를 찾아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한밤중에 비가 퍼붓자, 하룻밤 묵고자 마을에 찾아들었다. 마침 어느 집 추녀 밑에 서 있다가 노크를 하며 하룻밤 재워 달라고 소리치자, 그 집 주인이 대문을 열고 말했다. “지금 이 동네 근방에 전염병이 돌아 사람이 계속 죽어나가는데, 스님께서도 빨리 도망가십시오.”  

▲ 경허 선사 진영    

 

경허 선사는 전염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도하고 무상감을 느꼈다. 사찰로 돌아오면서 죽음이라는 단어에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에 깊은 회의감에 빠졌다. 선사는 동학사로 돌아와 앞으로 강의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학인들을 흩어 보냈다. 다음날부터 골방에 들어가 정각을 이루지 못하면, 일어나지 않겠다는 각오로 장좌불와를 하며 턱밑에 송곳을 대놓고 용맹정진에 들었다. 경허는 영운 지근(?~866)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驢事 未去馬事到來)’라는 화두를 잡고 참선을 시작했다.

 

이 무렵 선사의 정진을 시봉하는 사미승이 동학사 아래 마을 사는 이처사와 대화를 하는 중에 의문이 있는 채로 절에 돌아왔다. 사미는 경허에게 중이 수행하지 않고 죽으면, 콧구멍 없는 소가 된다는 말을 하자, 선사는 그 말끝에 홀연히 법안이 열렸다. 이때 경허는 다음 오도송을 읊었다. “문득 무비공이란 말을 듣는 순간에 삼천세계가 내 집임을 몰록 깨우쳤네. 6월이라 연암산 내려오는 야인이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네.”

 

여기서 무비공(無鼻孔)이라는 말이 유명한 화두가 됐다.

 

188031세에 경허는 용암(龍巖)의 법통을 이었으며, 서산 휴정의 11대손, 환성 지안의 7대손이라 스스로 밝혔다(지금 법맥도는 이 기준을 따름). 그런데 이렇게 법통을 거론하지만, 경허는 무사독오(無師獨悟)한 셈이다. 선사는 서산 천장암으로 옮겨가 보림을 했다. 경허집에 의하면, 선사의 보림 과정을 이렇게 전한다.

 

한 벌 누더기 옷으로 추운 겨울이나 찌는 여름에도 갈아입지 않았다. 옷 속에는 빈대와 이가 득실거렸는데, 스님의 온몸은 이와 빈대에 의해 헐어있을 정도였다. 혹 누워 있을 때, 구렁이가 배에 기어다녀도 태연했고, 구렁이가 어깨와 등을 타고 기어다녀도 마음에 조금도 동하지 않았다.”

 

선사가 이곳에 머물 때, 1884년 수월(水月)이 왔고, 한 달 후 14살의 어린동자 만공이 왔으며, 비슷한 시기에 혜월(慧月)이 입문했다. 이들은 모두 선사의 제자들인데 세 달(三月)’이라고 불린다(수월은 상현달, 혜월은 하현달, 만공은 보름달). 선사는 충남 일대 개심사와 부석사를 왕래하면서 선풍을 드날렸다. 이후 20여 년 간 도처 곳곳 사찰에서 선풍을 떨치며 제자들을 지도했다.

 

189850세에 범어사에 최초의 선원을 개설했다. 다음 해에 해인사로 옮겨갔는데, 대장경 인출 불사와 수선사(修禪社)를 설치하는 불사에 법주(法主)로 추대됐다. 이밖에 경허는 해인사에서 결사문을 작성한다. 그 다음해에는 조계산 송광사에 머물다 실상사 백장암 중수문을 작성했다. 이렇게 선사는 영호남을 오가며 선풍을 전개하는 중, 54세에 범어사에서 선문촬요(禪門撮要)를 편찬한다.

 

190456세 되는 해에 경허는 천장암으로 돌아온다. 선사는 천장암에서 염불승 무용(無用)을 만나 참선곡중노릇 잘 하는 법을 가사문학으로 만들었다. 다음 해 57세에 광릉 봉선사 월초스님을 만나고, 오대산 금강산을 거쳐 안변 석왕사에서 오백나한 개분불사 증명법사로서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췄다.

 

경허는 삼수갑산에서 박난주라고 개명하고 서당 훈장을 하다가 19124, 64세에 갑산 웅이방 도하동에서 입적했다. 1913년 만공과 혜월이 갑산으로 가서 스승의 시신을 꺼내어 다비했다. 선사는 집착 없는 자재함으로 참 자유를 즐기다 헌옷을 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해탈 언덕으로 건너갔다

▲ 2012년 건립된 열반 100주년 기념탑  

 

경허의 선시(禪詩)

 

경허집에 실린 경허 선사의 몇 선시(禪詩)를 만나보자. 먼저 막론시비(莫論是非)’인데, 승속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애송하는 시구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모두가 꿈속의 일이로다. 북망산 아래 누가 너고, 누가 나이더냐(誰是孰非 夢中之事 北邙山下 誰爾誰我).”

 

살 때는 온몸으로 살고 죽을 때는 온몸으로 죽어라. 높이 서려면 산꼭대기에 서고, 깊이 가려면 바다 밑으로 가라.”, “고요히 고향생각 떠오르네. 세상만사 뜬구름과 같거니, 실다운 것이 무엇이랴! 백년을 두고 흐르는 물과 같이 뜨내기 인생인 것을 억지로 만나기 힘들어 오늘도 늦었고 무단히 이별한지 몇 해나 되었던가? 백발도 슬프거니 이별 또한 어이하리! 그대 가고 나면 나 혼자 여기에서 어찌 견딜 것인가?”

 

위의 시는 경허 선사가 도반인 청암사의 만우당 선사와 함께 있다가 헤어지면서 남긴 이별시이다. 선사는 제자 한암에게도 이렇게 표현했다. “덧없는 인생은 늙기 쉽고 좋은 인연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데, 이별의 섭섭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으랴진실로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과연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이 되랴!” 이별시에 경허의 인간적인 풍모가 스며온다. 승려는 깨달음과 관련된 선시를 남기는 것이 여법하다고 하겠지만, 인간 본연의 모습인 감정에 애틋함이 전해온다

 

경허의 한국선사상적 위치

 

경허는 평생 무사한(無事漢)이 되어 걸림 없는 언행으로 입적할 때까지 무애자재한 수행자였다. 일반적으로 한 인물에 대해 평가가 상이하지만, 의도적으로 경허를 폄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 점에 있어서 적어도 경허와 같은 오도(悟道) 경지가 아니라면, 부정적으로 매도하거나 학문에 입각한 평가는 자제해야한다고 본다. 경허의 한국선사상적 위치를 보자.

 

첫째, 경허는 결사정신에 의한 수행풍토를 정립시킨 근현대의 중흥조이다. 선사는 보조 지눌, 서산 휴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한국선의 등불같은 존재이다. 1899년 경허는 오도 후에 해인사에서 정혜결사를 시작으로 통도사, 범어사, 송광사 등 여러 곳에 선원을 개설해 수행풍토를 조성했다. 이 결사를 통해 한국선의 정체성을 확립시켰다고 본다. 한편 선사의 결사 특징의 하나는 정혜를 닦는 가운데서도 현실적인 구원사상이 있었다. 곧 근기가 미치지 못한 중생들에게 미륵사상을 도입함으로서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방편을 허용했다.

 

둘째, 경허의 선은 화두 참구의 간화선이다. 경허가 제자 만공에게 무자(無字) 화두를 주면서, “무문관을 통하여 다시 깨닫도록 하여라. 반드시 원돈문(圓頓門)을 짓지 말고 경절문(徑截門)을 다시 지어보도록 하여라라며, 간화선의 직절을 강조했다.경허선사참선곡에 의하면 나의 마음 어떻게 생겼는고? 의심하고 의심하되 고양이가 쥐 잡듯이 주린 사람 밥 찾듯이 목마른데 물 찾듯이 육칠십 늙은 과부 외자식을 잃은 후에 자식생각 간절하듯 생각생각 잊지 말고 깊이 궁구하여 가되 일념만년 되게 하여 폐침망찬할지경에 대오하기 가깝도다라고 했는데, 간화선의 대의정(大疑情)이 거듭 강조되어 있다.

 

셋째, 경허는 근현대 한국선의 선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현 한국선의 근원지이다. 수덕사의 만공·수월, 부산 선암사 혜월, 오대산의 한암 등이 경허선풍을 전개했다. 곧 현재의 선풍은 경허선이라고 볼 수 있으며, 현대 조계종사의 주역이다

 

학문세계와 사상

 

경허는 선()의 생활화·일상화를 모색하여, 대중 속에서 선의 이념을 실현하였고, 설법뿐 아니라 대화나 문답을 통해서 선을 선양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선풍이 새롭게 일어났으며, 많은 선사들과 선원들이 생겨났다. 오늘날 불교계의 선승(禪僧)들 중 대부분은 성우의 문풍(門風)을 계승하는 문손(門孫)이거나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성우의 선풍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무생(無生)의 경지를 이상으로 삼는다. 인간의 참모습을 그는 생김 없고, 없어짐 없는근원적 예지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둘째, 무상(無常)을 초극(超克)하는 길은 오직 선()에 있다고 보았다. 셋째, ()과 교()는 하나라고 주장하고, 교선겸수(敎禪兼修)를 강조했다. 넷째, 간화선(看話禪)과 염불선(念佛禪)은 완성된 경지에서 볼 때, 방법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저서로는 경허집이 있다.

수암(守岩) 문 윤 홍<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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